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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9)화 (49/131)

49화

다시금 혼자가 된 방에서 그레이스는 깊게 숨을 뱉고 몸을 일으켰다.

따지고 보면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육체였지만, 움직일 때마다 몸이 납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추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작아진 체구의 여성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의미 없는 행동을 해?>

<쓸데없어.>

<거울을 봐, 그때랑 크게 달라졌어?>

<여전히 못생겼어!>

그 모든 비난은 결국 추하다는 욕으로 이어졌다. 그레이스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못생겼는데 남들에게 민폐까지 끼치는 여자.

그래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세상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욕하기 바빴기 때문일까, 그레이스는 원래의 자신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래도 해야지.’

아무리 두렵고 도망치고 싶더라도, 바꾸어 보기로 했으니까.

머릿속을 울리는 끊임없는 비난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그녀는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 옷을 입기로 했다.

⋆★⋆

티 룸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비록 여기서도 그레이스의 속은 편치 못했더라도, 방문객인 클레타 던에게 있어서는 온화하고 따스한 장소였다.

그레이스는 우려진 차를 클레타에게 직접 따라 주었다.

“제, 제가 해도 괜찮아요.”

“제 손님인걸요. 대접하게 해 주세요.”

클레타는 그레이스의 정체를 알게 된 지금, 이렇게 차를 대접받고 존대받는 게 불편했다.

가뜩이나 그녀의 처지 때문에 동정하는 이들이나 동지 외에는 무례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클레타를 공손하고 대등하게 대우했다.

그레이스는 테이블 가운데에 있는 다과를 클레타 쪽으로 밀어 주었다.

“클레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일단, 불편할 텐데 와 주어서 고맙다고 전해 주려고 왔어요.”

“아, 아니에요! 이렇게 많이 도와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불편함을 느끼겠어요.”

클레타 던이 화들짝 놀라며 그레이스의 말을 부정했다.

“그래도, 어제의 일이 있잖아요.”

“믿지 않아요!”

“……!”

“그,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야말로 부인께 죄송해요.”

클레타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계속 부인 앞에서, 부인에 관한 억측을 했잖아요. 신문에 있는 게 전부 진실도 아닌데…….”

“아……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어요.”

클레타 던이 눈썹을 늘이면서도 강경하게 말했다.

“같이 일하는 분들도 그런 편견 속에서 살아왔는걸요. 그러면서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부인에 대해 떠들었어요. 사실, 그것에 대해 사과를 드리고 싶다고 간밤에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정당화될 수 없어요.”

클레타의 말에 그레이스의 목이 턱, 하고 막혔다. 누군가가 목소리 높여 자신의 편에 서 주는 장면이 생경했던 탓이다.

“고, 고마워요.”

“부인은 저희의 은인이에요. 복수라는 말도 믿지 않아요.”

클레타의 말을 들으며, 그레이스 마음속에 무언가가 차올랐다. 동시에 눈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어지르던 날카로운 상념은 다시 사그라들었다.

“무엇이든 부탁하세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테니까요.”

“그게…….”

그레이스는 속을 가다듬으며 조금씩 말을 이어 나갔다. 약간의 거짓을 섞으며, 클레타가 가장 큰 직물 공방에 있는 피시언 혼혈들과 연을 터 직물을 거래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피시언족은 어떻게 구분하죠? 본 적이 없어서요.”

“그들의 피부는 푸른색이에요. 혼혈도 마찬가지죠. 생경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어 더욱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일을 구하기 힘들고, 재능에 비해 좋은 대우도 받지 못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깊게 교류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없었으니, 피시언족의 능력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피시언족의 천은 좋은 게 많아요. 그들만이 만들 수 있는 종류도 있지요. 이 경우에는 그 땅에서만 나는 재료가 필요해서 제국에서는 더욱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요.”

“부인은 이런 걸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대단하세요!”

그야 소설로 봤으니까…… 그레이스는 차마 그 사실은 말하지 못했다.

“……피시언족과의 거래에 성공하고 그들을 존중하면 아르시아 왕국에도 연락이 닿을 거예요. 아르시아국은 여러 민족이 합쳐진 만큼, 서로 간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든요.”

“피시언족은 특히나 타국에서 차별받은 만큼, 그들을 존중해서 좋은 거래를 마치면 아르시아국에서 다른 천을 수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의미군요.”

“네, 실제 금전적 소득은 얻을지는 거기서 어떻게 거래하느냐에 달렸지만요.”

클레타 던은 그레이스의 설명에 잘 알겠다며 끄덕였다.

“누가 그 거래에 나설지에 대해 상의해 볼게요. 직접 해야지 후에 소득 분배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있으니까요.”

애초에 작은 직물 공방과 함께 이루는 거래였다. 직물에 대한 값어치는 그들이 더 잘 헤아렸기에 반드시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제안을 할 게 있어요.”

그레이스의 ‘제안’이라는 말에 클레타는 눈이 동그래졌다. 부탁이 아니라 제안이라는 것은 클레타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아원이 불탄 지금, 거처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옮긴다고 해도 그럴 만한 자금이 없는걸요.”

“지금까지 만들고 다 팔지 못한 티백은 타 버렸지만,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최근 여러 계약 이야기가 오가며 대량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직 재료가 도착하지 않은 때였다.

“거처를 차밭이 있는 영지 쪽으로 옮기는 걸 제안할게요. 차밭 쪽에는 빈집이 있을 거예요. 좀 낡기는 했지만 아이들과 당신들 전부 살 수 있어요.”

“……그런.”

“그리고 같이 장기 거래하기로 한 차밭이 있잖아요. 거기 분들은 아이를 꽤 좋아했거든요.”

‘좋아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클레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 차밭을 운영하는 자들은 어린 나이의 가족을 잃었다. 그런 만큼 조금이라도 젊거나 어린 이들을 보면 떠나보낸 가족이 떠올라 모질게 굴지 못했다.

‘가족을 잃은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으니까.’

서부 오염은 생각보다 오래 진행된 상태였다. 원작보다는 빠르겠지만 이번에도 성녀의 발견은 늦었고, 그만큼 오염된 구역이 많았다.

그리고 제국에서도 외진 서부는 발전이 느린 만큼 도움의 손길도 빨리 닿지 못했다.

그 서부 출신인 이들이 가족을 잃고 갖고 있던 재산을 모아 땅을 사서 일군 게 그 차밭이었다.

이 또한 원작에서 아리아와 차밭 주인의 대화를 통해 나온 정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그 장소로 이전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첫 홍보는 수도 내에서 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전하는 데에도 큰 비용이 들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아낄 수 있는 자금은 아끼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거 때문에 더 위험해질 뻔했어.’

그레이스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질 줄 몰랐지만, 이는 방심해서 나온 결과였으니까.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말을 이었다.

“미리 서신을 주고 이동하면 될 거예요. 그리고 만약 허가가 내려온다면 이동은 저희와 함께하는 게 더욱 돈을 아낄 수 있을 거예요.”

“어디 가실 예정인가요?”

“아마도요. 각하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하지만요.”

클레타는 아주 미안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부인께 계속 도움만 받네요. 이 은혜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거예요.”

“아니에요. 별거 아닌걸요.”

“이런 걸 별거 아니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그냥 제가 어쩌다 알게 된 정보일 뿐이니까요.”

정말 그랬다. 원작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결 방안을 꺼낼 수 있었다.

그레이스의 생각은 그러했다. 하지만 클레타는 말했다.

“모두에게 같은 정보가 있다고 해서 똑같은 일을 하지는 않아요.”

“……”

“그러니까 부인은 대단하신 거예요.”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로 선한 일을 하면 좋을 텐데, 누군가를 도와주면 좋을 텐데.

애석하게도 모두가 그러지는 못했다.

그레이스는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진짜 대단한 거 아닌데…….’

그녀는 자신에게 이런 정보가 없었다면 그들에게 손을 선뜻 내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고 있었고, 그냥 원작 등장인물이 행한 것을 한발 먼저 행했을 뿐이었다.

도둑질을 한 주제에 칭찬까지 받으니 부끄러웠다.

‘좀 더 떳떳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

아니나 다를까, 벤자민이 황궁에 찾아간 이유는 서부 오염과 관련 있었다.

아리아의 능력 덕분에 오염이 서부의 최외곽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알아낼 수 있었다.

벤자민이 돌아온 후 둘은 정원을 천천히 돌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녀의 도움으로 오염의 근원이 꽤 먼 곳에 위치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부인께서 해당 방법을 제안해 주신 덕분이지만요.”

“그런 방법을 떠올릴 수 있던 것도 성녀께서 계셨기 때문이에요.”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 것이잖습니까? 부인은 충분히 대단합니다.”

“…….”

그레이스는 이런 칭찬을 연달아 들으니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연신 마음속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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