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8)화 (48/131)
  • 48화

    사실 뒤라고 해도 숨을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사고를 보러 왔기에, 그의 뒤에는 군중이 있었다.

    방금 보고를 한 사내의 목소리는 컸기에 근처에 있던 몇몇은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공작 부인을 향한 복수라는데?”

    “공작가라면 여러 군데가 있지 않아?”

    “하지만 여기서 제일 근처에 있는 건…….”

    그들의 시선이 다닥다닥 그레이스의 등 뒤로 달라붙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쉬기 힘들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사람들의 의심이 한데 얽히니 머릿속이 더 어지러웠다.

    “허억…….”

    “부인, 괜찮습니다.”

    벤자민은 무엇이 괜찮은 건지, 연신 괜찮다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는 그레이스를 달래면서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차가운 얼굴이었다.

    “목소리가 너무 크군.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남들도 다 알 수 있도록 발설했으니 처벌을 기다리도록.”

    벤자민은 다시금 그레이스를 말 위에 태웠다. 사실 이런 식으로 귀가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마차를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그녀는 창백해진 채 그에게 속삭였다.

    “가, 각하…… 저 사람들의 거처를 부탁해요.”

    그레이스가 말하는 ‘저 사람들’이란, 고아원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런 때에도 다른 이들을 걱정하는 부인을 보자 벤자민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지금, 지금 가장 불안한 사람들은 저 사람들일 테니까…… 안전한 곳으로.”

    “알겠습니다.”

    “괜찮다면 공작가로 데려갈 텐데…….”

    그레이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 때문에 공작가로 가는 걸 거부할 거라고 판단했다.

    벤자민은 괜찮다며 그녀를 다독이고 잠시 쉬고 있으라고 했다. 그가 치안대 중 한 명을 불러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레이스의 귀에 이명이 울리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 뒤로는 그 어떤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다.

    ⋆★⋆

    눈을 뜨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천장이었다.

    ‘별관…….’

    처음에는 정말로 낯설었던 곳이, 이제는 그레이스의 돌아올 장소였다.

    잠깐이나마 머리가 맑았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 온갖 상념이 그녀를 괴롭혔다.

    <정말 네가 아무것도 안 한 거 같아?>

    <떠올리지 못한 거겠지, 넌 멍청하니까.>

    <못생기고 멍청해.>

    “윽…….”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레이스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채웠다.

    이런 목소리를 매일 듣다 보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저택에 처박힐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것도 나 때문인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누구 탓이겠어?>

    자책하는 그레이스를 향해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사실 일방적인 질책에 가까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옆에 있는 설렁줄을 당겼다.

    그레이스의 호출에 샐리가 나타났다.

    “일어나셨나요, 마님?”

    “……응, 혹시 내가 누워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

    “마님께서 주무시는 동안, 본관에 손님들이 오셨어요. 그리고 주인님께서는 잠시 황궁으로 향하셨고요.”

    “그렇구나.”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부탁대로 고아원 사람들을 공작저 내부로 들였다.

    어떤 이들은 갑자기 갈 곳 잃은 이들을 돕는 공작을 찬양했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레이스에 대한 소문을 잠식시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그 모습을 직접 보지 않은 그레이스라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원작을 알아서 그런가.’

    도무지 그레이스를 향해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들만 가득했던 원작, 그 내용을 떠올리니 속이 쓰렸다.

    <거 봐, 잘 아네.>

    <사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니까?>

    ‘가만히 있으면 죽어.’

    그레이스는 자신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목소리에게 반박했다.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면 차라리 죽…….>

    짜악!

    “꺄악, 마님!!”

    그다음 말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듣고 나면 제 안에서 겨우 유지되던 것들이 꺾여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양손으로 세게 제 뺨을 내리쳤다.

    양 뺨이 매우 얼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이 그나마 맑아졌다.

    ‘이건 뭐 ‘둘 중 어디 아플래?’도 아니고.’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아무리 무서워도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갑갑했지만, 그레이스는 나아가고 싶었다.

    당연했다.

    살아 있는 이상, 살아가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었다.

    ‘대체 왜 나를 향한 복수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야.’

    벤자민이 지금 황실로 향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었다.

    톰 버킨에 관한 것 혹은 이번 화재 사고에 대한 도움 요청 또는…….

    ‘서부 오염.’

    원래라면 시간이 더 걸렸겠지만, 어제 아리아의 도움으로 빨리 끝마쳤다면 이야기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

    ‘자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겠지만 결론적으로 수원을 추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거야.’

    벤자민은 머리가 좋았으니 결론적으로 서부의 최외곽이 원인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서부 오염에 대한 결과가 나오면 원정대가 꾸려질 거고, 꼭 따라가야 해.’

    원래라면 따라가기는커녕, 벤자민이 가는 것도 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톰 버킨의 일과 고아원 원장의 발언으로 다시금 그레이스가 화제에 올랐다.

    결국 선택지는 없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넘겨야지.’

    그런다고 비난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일부 사그라질 것이다.

    ‘원정대가 아무리 일찍 꾸려진다고 해도 서부까지 갔다 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조금만 버티면 관심사는 자연히 다른 곳으로 넘어갈 거야.’

    제도에는 큰 직물 공방이 두 군데 있다. 원작에서는 얼마 안 있어 그 두 직물 공방이 담합하여 가격을 조작하고 있었고, 커다란 길드라는 점을 이용하여 작은 직물 공방을 하나씩 망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직물 공방이라고 해도 모든 옷감을 다 만드는 건 불가능하니, 몇 가지는 수입을 할 수밖에 없어. 그 중간 거래처를 계속 빼앗는 형식으로 작은 공방들을 말려 죽인 거지.’

    그레이스가 모슬린을 그 두 곳에서 사지 않은 이유는 미래의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위법 사실이 밝혀진 두 공방은 한동안 장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대외적인 이유는 자숙이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귀족들은 거의 날마다 파티를 열었고 이름 높은 귀족일수록 한 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는다. 연회를 위한 새 드레스를 맞추려면 새 옷감이 필요한데, 제일 큰 공방인 자신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곤란해지는 건 높으신 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쯤 서부 일을 무사히 해결하고, 친교의 의미로 황실에서 파티가 열렸다.

    ‘아리아는 거기서 다들 구하지 못해 안달인 귀한 천으로 지은 옷을 입게 돼.’

    실베스터가 따로 마련해 준 것이었고, 모두가 그런 그녀를 보며 동경하고 시기했다.

    그레이스는 이에 대한 대안책으로 작은 공방에 미리 다른 거래처를 알려 주었다.

    바이먼 제국에서 조금 떨어진 아르시아 왕국이었다.

    ‘수입에 유리한 입지야 금방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레이스는 원작 설정을 떠올렸다.

    왕국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작은 소국이었으나, 그 왕국은 여러 민족이 모여 이룬 나라였다.

    그리고 그 민족 중 하나인 피시언족은 천을 만드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들이 바이먼 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소국 출신이라는 것 외에도 아르시아 왕국과 바이먼 제국의 사이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으나, 이 제국에는 피시언 혼혈이 꽤 숨어 있었다.

    ‘전부 다 큰 직물 공방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간 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적은 품삯을 받으며 일했다. 이를 알아채는 것도 아리아였다.

    기념 파티를 마치고 나서 직물 공방의 문제를 해결하다 피시언 혼혈들이 받는 부당 대우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해결해 준 보답으로 피시언족과 거래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시아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나, 계약 자체는 그리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원작에서는 이득을 보지 못했다고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으나, 아리아는 돈보다는 사람 간의 관계와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부분에서 금전적인 득을 많이 보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떠나기 전에 미리 말해 두자.’

    어차피 공방 간의 계약은 그레이스 펠튼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클레타에게 연락하냐는 건데.’

    샐리를 통해서 연락하기도 애매했다. 그레이스는 시선을 굴려 창밖을 보았다.

    <그 여자가 네 말을 들어주겠어? 그냥 그만둬.>

    ‘시끄러워.’

    솔직히 만나 준다고 해도 저택의 안주인이라서 만남에 응할 확률이 높았다.

    그레이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부탁할 만한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그레이스는 제 뺨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샐리에게 말했다.

    “티 룸에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 줄 수 있을까?”

    “네, 마님.”

    “본관에 있는 클레타 던이라는 사람을 불러와 줘.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알겠습니다. 마님의 치장을 도와줄 아이들을 따로 보낼게요.”

    “부탁할게.”

    샐리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시선만 보내다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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