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렇다면 역시 나는 내가 아는 원작과는 다르게 행동해야 해.’
원작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별관에만 머문다면 기다리는 것은 언제일지 모를 죽음뿐이었다.
위험할지라도 진실을 접하는 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내가 만약 죽는다면 의문을 가져 줄 만한 사람들을 만들어야겠어.’
그레이스의 죽음이 그렇게 간단히 처리된 것은 저택 내에서만 머물러, 그녀의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만약 그레이스를 지지하는 사람, 최소한 서로 호의적인 사이가 있다면 의문의 죽음 이후 조용히 지나갈 수 없다.
그녀는 무려 한 공작가의 부인이었으니 말이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계획을 바꾸어야 할 거야. 원작보다 늦춰질 수도 있지.’
그사이에 다른 빈틈을 찾을 수도 있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만들 수도 있다.
‘만약 진짜 벤자민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전에 더 안전하게 이혼할 수도 있고…… 아니라면 여기 남아 있는 게 제일 안전할 테니까.’
오늘따라 머릿속이 맑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이렇게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 제일 힘들었던 건 생각과 감정의 정리였던 탓이다.
‘꽃이 많아서 그런가?’
원래의 그레이스는 꽃을 상당히 좋아했던 것 같으니, 환경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스가 꽃을 둘러보자 벤자민이 물었다.
“이곳이 그리 마음에 드십니까?”
“음…… 자주 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해요.”
“자주 오는 것은 거리 때문에 부인께서 힘들 겁니다.”
“그렇군요.”
그레이스가 아쉬워할 찰나, 벤자민이 제안했다.
“공작저에도 온실을 하나 만들까요? 이런 식으로 꾸며진 것으로 말입니다.”
“……! 그래도 되나요?”
“당신을 위해서는 안 될 것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시공이 끝나도록 주문하지요.”
그레이스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기대로 달아올랐다. 그레이스가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벤자민이 웃었다.
둘은 이혼 조정 기간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다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차피 당신께서 원할 때 하나 만들려고 했습니다.”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말을 덧붙였을 때였다. 밖에서 마부가 급하게 난입했다.
“주, 주인어른……! 마님! 두 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것이 화재가 일어났다고 방금 전갈이……!!”
화재 사고.
갑작스러운 단어에 그레이스의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굳은 얼굴을 살피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
“고, 고아원 쪽입니다.”
고아원이라는 보고가 들리자 그레이스는 바로 뛰쳐나갔다. 생각보다 몸이 앞선 채 무작정 뛰어나가는 형태였다.
벤자민은 당황하며 그녀를 붙잡았다.
“부인! 진정하십시오!”
제도에는 고아원이 그곳 한 군데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보고가 올 만한 장소는 딱 한 곳이었다.
벤자민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여기서부터 고아원까지는 혼자 갈 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하, 하지만……”
불이 난 현장에는 사람이 모여 있을 텐데, 마차로 가면 오히려 느려질 게 뻔했다.
자신이 간다고 뭘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면서 그레이스는 무턱대고 가려고 했다.
그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들이 다쳤으면 어쩌지? 다른 사람들은? 혹시 또…….
‘불이 난 게 나 때문이면 어떡해?’
그럴 리가 없는데, 전혀 상관없는 일에 자신을 연관 지었다.
그레이스의 동요를 읽어낸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방 풀어냈다.
“말을 타고 가지요. 그럼 되지 않겠습니까? 저와 함께 가면 됩니다.”
지금 당장 그 장소로 향하지 않으면 그레이스의 상태가 더욱 악화될 것 같았다, 벤자민은 붙잡고 있던 그레이스의 몸에서 손을 뗐다.
“갑자기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도 되겠냐는 의미였다.
그레이스는 덜덜 떨며 내밀어진 벤자민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은 그녀를 붙들고 이끌었다.
마차에 묶여 있던 말 한 필을 풀어내며 그레이스를 위에 앉히고 그 또한 올라탔다.
“오래간만에 타, 많이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괜찮다면 제게 기대십시오.”
그는 출발하기 전에 그녀에게 여러 주의사항을 설명하며 나아갔다.
말은 생각보다 빠르고 불편했다. 심한 운동을 하지 못하는 그레이스의 몸이 이리저리 들썩이며 체력은 순식간에 깎여 나갔다.
찬 바람을 맞으며 식은땀 흘리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벤자민은 조금씩 속도를 줄였다.
저 멀리 어둠도 가리지 못하는 짙은 연기를 발견한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팔을 붙잡았다.
불안이 이끈 무의식적 행동이었다.
연기가 일렁이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밝은 주황빛이 보였다.
‘이상해…….’
눈이 아릴 정도로 밝고 따스한 빛이었다.
‘왜 밤인데 해가 뜨는 것처럼 밝지?’
타닥타닥, 거대한 불꽃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많은 사람이 불타는 고아원을 둘러싼 채 술렁거렸다.
마차로 왔으면 절대로 진입할 수 없을 정도의 인파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모, 몰라. 갑자기 불이…….”
그레이스의 숨이 거칠어졌다.
“부인, 부인께서는 그냥 돌아가시는 게…….”
“지, 직접…… 확인, 해야겠어요.”
자신이 확인한다고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고집부렸다.
클레타는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알게 된 사람,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비록 친구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온갖 정이 다 든 후였다.
“그럼 힘들어지면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
벤자민의 부탁에 그레이스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는 그레이스의 외관이 제대로 가려졌나 확인하며 말을 몰아 인파 사이로 들어갔다.
“공작 각하!”
벤자민을 따르는 치안대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벤자민은 말에서 내린 뒤 그레이스를 내려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사상자는?”
“갑작스럽게 화재가 고아원 내부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약간의 화상을 입은 이들만 있을 뿐, 사망자는 없습니다.”
“단순한 사고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치안대는 고개를 내저으며 구석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심각한 화상을 입은 남자였다.
“화재의 발생지에 이 남자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해당 고아원은 젊은 여성과 아이들만 거주하는 사실을 확인한바, 이자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그레이스의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고아원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교차하는 게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제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펜던트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걸 알면서 그녀는 계속 가슴께를 만지작거렸다.
“말할 상태가 아니군.”
벤자민은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치안대는 그의 반응에 망설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던 클레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시, 실례합니다.”
“아, 클레타 던 씨군요.”
클레타는 처음 축제에서 마주쳤던 벤자민의 얼굴을 알아보고 고개 숙였다. 그가 공작이란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개 드십시오. 괜찮습니다.”
“그, 그게. 무언가 물어보아도 괜찮을까 하여…….”
클레타의 말에 그레이스의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도 모르면서 입을 막고 싶었다.
말하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말씀하시지요.”
“이, 일단, 저 남자는 원래 고아원을 맡았던 원장이에요. 어떻게 숨어들어왔는지…… 애초부터 숨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는 기름을 보관하던 곳에 불을 일으켰다. 불을 지른 뒤 그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은 정말 이상했지만, 몸의 상태를 보아하니 꽤 험하게 지내온 것 같아 자포자기 심정으로 저지른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런데 다 나오고, 저 사람이 정신을 놓기 전에 이상한 말을…… 했는데, 그게…….”
클레타 던은 말하려고 하면서도 망설였다. 꺼내서는 안 되는 금기를 입에 담으려고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벤자민은 그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고, 치안대는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던 치안대의 일원 중 한 명이 말했다.
“공작 부인을 향한 복수라고 저 남자가 쓰러지기 전에 말했습니다.”
“……!”
“복수?”
벤자민은 그의 말에 눈을 찡그렸다가, 아차 하며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던 클레타의 시선이 그레이스에게 향했다.
“……린덴 부인.”
클레타의 목소리가 어쩐지 황망한 듯했다. 그녀 말고도 저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이 하나둘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의 걸음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복수라니……?’
그녀가 아는 한, 그레이스가 저지른 일은 없었다. 바람이 불며 보닛에 꽉 눌린 머리칼이 삐져나와 흩날렸다.
붉은 머리카락은 밝은 불에 비추어 타오르는 색처럼 보였다.
한동안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그녀를 비웃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멍청이!>
“부인, 이만 돌아가지요.”
벤자민은 제가 입고 있는 재킷을 그레이스에게 둘러 주며 그녀를 뒤로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