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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6)화 (46/131)

46화

“…….”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절대로 묻지 못할 궁금증을 마음에 품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시간이 흐른 뒤,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군요.”

벤자민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조금은 들뜬 듯했다.

그가 먼저 내리며 물었다.

“제가 부인을 에스코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릴게요.”

그레이스의 승낙에 벤자민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럴 때 보면 숨기는 게 전혀 없어 보이는데.’

그의 손을 잡으며 온갖 생각이 뒤따랐다. 하지만 곧 그레이스의 시선에 아름다운 외관의 건물이 들어오며, 심란한 생각이 끊겼다.

“와…….”

“마음에 드십니까?”

그레이스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퍼지자, 벤자민이 뿌듯함을 담아 물었다.

“무, 무척 아름답네요.”

하얀색의 얇은 기둥에 투명한 유리 벽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도등이 주변에 늘어져 있어, 유리 건물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택 밖에 존재하는 이 시설을 이렇게 완벽하게 관리해 왔다는 것에서 샤를 후작가의 힘을 알 수 있었다.

“샤를 후작의 후계가 부인을 맞이하며 만든 플라워 하우스라고 하더군요. 저희 공작가에도 이 정도 규모의 플라워 하우스는 없으니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레이스는 웅장한 건물의 높이를 위에서부터 훑어보며 벤자민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이런 사유 건물에 막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오늘 하루 동안 사용을 허가받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꼭 왔어야 했던 거 아니에요?”

벤자민은 연신 힘들면 다음에 가도 된다고 그레이스에게 강조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허가라는 말이 나오자, 즉흥적인 게 아니라 미리 준비한 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레이스가 화들짝 놀라자, 벤자민은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또 허가받으면 될 일입니다. 소후작과 면식이 있는 사이니까요.”

“그, 그렇군요…….”

그건 일종의 노쇼였다. 오늘 일정을 취소했으면 샤를 후작가의 신뢰를 다소 잃을 뻔했다.

‘큰일 날 뻔했다.’

플라워 하우스 내부는 밖보다 더 화려했다. 건물은 하얀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안의 꽃은 다양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마정석을 사용해 내부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 덕에 계절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다.

그레이스가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자, 벤자민이 키득거렸다.

“부인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 식물에 관심이 많으시잖습니까.”

‘식물?’

순간,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레이스, 너는 정말로 꽃을 좋아하는구나.”

그녀의 부모님이 그레이스에게 하는 말이었다.

‘식물이 아니라 꽃을 좋아했었는데.’

벤자민이 보기에는 식물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 건지, 아니면 그냥 크게 묶어서 칭한 건지.

‘애초에 좋아하는 것치고는 지금 기억하는 꽃 이름도 별로 없고.’

정말 좋아했으면 이름을 잘 알았을 터였다. 하지만 현재 그레이스가 이름을 아는 꽃은 거의 없었다.

“그랬던가요?”

얼떨떨해진 그레이스는 결국 아리송한 답을 뱉고 아차 했다.

방금 한 대답은 마치 타인을 평가하는 듯한 투였다. 그레이스가 달라진 걸 눈치채지 못한 벤자민이더라도 여기선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네, 그랬습니다.”

“…….”

하지만 벤자민은 평범하게 맞장구치고 지나갔다.

“……네, 그랬군요.”

그레이스는 그의 평이한 반응에 떨떠름해졌다.

‘정말 눈치채지 못한 거야?’

어쩌면 그레이스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고 느끼고 그냥 넘어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보다 부인, 이쪽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제도에서 보기 힘든 꽃이 많습니다. 남동부 쪽에 많이 피는 종류인데 샤를 소후작 부인이 고향을 그리워할까 봐 소후작이 마련한 선물이라고 하더군요.”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많았는지 매우 들떠 보였다.

이럴 때는 그가 한없이 순수하게 그레이스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은 구경을 허락해 주신 샤를 소후작 부인께 나중에 감사의 편지를 보내야겠어요.”

“그런다면 필시 기뻐할 겁니다. 꽃을 준비해 드릴까요?”

“편지와 같이 보낼 꽃다발을 위해서요?”

“아뇨, 편지지에 붙일 압화용으로요. 저번에 보내 드린 꽃에는 남동부산의 꽃이 없었지 않습니까?”

“……아.”

“다른 꽃도 좋겠지만, 그러는 편이 더 당신의 마음에 들 것 같아서요.”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사흘 내로 가져다드리겠다고 약속하지요.”

그레이스는 거절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받기로 했다.

‘너무 거절하는 것도 안 좋고, 편지에 쓰려는 거니까.’

“고마워요.”

“무엇을요.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그레이스는 플라워 하우스 내부를 둘러보았다. 꽃의 이름은 모르지만 아름다운 장소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플라워 하우스를 관리하는 정원사의 솜씨가 여간 대단한 게 아닌 건지, 만개한 꽃은 색이 다채로우면서도 조화로웠다.

벤자민은 그중에서 잎이 큰 꽃 하나를 꺾어 그레이스에게 건넸다.

“사실, 몇 송이 정도라면 꺾어 가도 된다고 허가받았습니다.”

“고, 고마워요.”

“무엇을요. 지난번에 큰 꽃을 선물 드리지 못하여 신경 쓰였습니다. 다만 가격을 지불한 게 아니라 마음이 쓰일 뿐입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말한 지난번이 언제인지 떠올렸다. 소담하고 예쁜 종류로 한가득했었다.

“그때 그 꽃도 좋았어요.”

“그래도 그건 전부 부인의 취미를 위해 준비된 거였으니까요.”

“……!”

그레이스는 그제야 그가 압화하기 좋은 꽃으로만 골랐음을 깨달았다. 벤자민은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최근 그리 만든 것들을 주위에 선물하시니, 혹 많이 만들어지면 저에게도 오지 않을까 하고요. 사실 꽤 계획적이었습니다.”

계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앙증맞은 이유였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거머쥘 수 있는 자가 고작 제 부인이 납작하게 누른 꽃을 바랐다.

“그걸 바라실 줄은 몰랐어요.”

“그럼 앞으로는 기억해 주시면 되겠군요.”

그는 잡은 손을 부드럽게 이끌며 덧붙였다.

“앞으로 행복한 일만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더없이 진실되었다.

‘이게 거짓말이면 배우를 해야지.’

그가 포개진 손을 부드럽게 이끌며 정원 내를 안내했다. 직접 하나하나 설명하는 걸 보아 그는 이 장소가 처음이 아닌 듯했다.

‘익숙해 보이네.’

꽃이 어디에 무엇이 심겨 있는지, 그 종류가 무엇이고 특징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그는 원래부터 이곳에서 살던 사람 같았다.

이 플라워 하우스의 주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각하께서는 여길 잘 아시네요?”

“아.”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은 허를 찔린 듯 이어 나가던 설명을 멈추었다.

그의 귓바퀴가 붉게 타올랐다.

“그, 그게…….”

“그게요?”

“그러니까…….”

벤자민은 마치 제 딴에는 감쪽같았던 거짓말을 고백하는 아이처럼 망설였다. 그레이스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것이었는데 그가 당황하자 속으로 더 당황했다.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공부했습니다.”

“……?”

“…….”

“네?”

둘은 거의 동시에 말을 뱉었다. 그레이스는 뜬금없이 공부했다고 고백하는 벤자민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민망할 때면 나오는 버릇 중 하나였다.

“언젠가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에 공부했습니다. 들킬 줄은 몰랐지만요.”

꽃을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녀도 자칫하면 그냥 넘어갈 뻔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의 태도에 입이 살짝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의 의심이 전부 거짓말 같았다.

‘이런 사람이 왜 그레이스가 바뀐 걸 못 알아보는 거지?’

사실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레이스가 아무리 부정하고, 머릿속에서 그럴 리가 없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져도 외면할 수 없었다.

벤자민은 확실하게 그레이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렇다면 원작은 왜 그렇게 된 거지?’

적어도 벤자민에게는 그레이스를 죽일 만한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 정도 호의라면 차라리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좋은 조건을 붙여 이혼해 줄 것처럼 보였다.

‘그레이스가 붙잡았나?’

원작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아니면 원작에서 흑막이자 최종 빌런 역을 맡은 만큼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을 수도 있었다.

‘이상하네…….’

평소보다 맑은 머리로 상황을 찬찬히 돌아보면 여간 이상하지 않은 게 없었다.

‘나는 왜 당연하게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죽인 거라고 생각했지?’

원작에서 모호하게 기술되다가 저택 내에서 병사를 한 게 원인이었나? 그레이스는 생각을 되짚었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책에서는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탓이다.

‘있어 봤자 신문이나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무능한지에 대한 정보뿐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또 의문점이 하나 피어올랐다.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이토록 호의적이었다면, 그런 소문이 있다는 걸 정말 몰랐을까?

‘갑자기 내 인생의 장르가 스릴러가 되는 기분인데.’

원래 삶에서 죽어 빙의하니까 이 몸이고, 퍽 다정한 남편의 진짜 속내는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그레이스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정말 힘든 상황에 처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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