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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5)화 (45/131)

45화

“페이 마틴!”

나보다 딜런의 목소리가 먼저 뻗어 나갔다.

갈기늑대 마수가 입을 쩍 벌렸다.

“기다려!”

나는 외치며 동시에 공간 환영술을 위해 두 팔을 펼쳤다.

한시가 급했다. 일순간에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눈이 시큰했다.

비교적 가까이 있던 조무래기 마수들이 환영술에 걸리며, 고개를 쳐들고 듣기 싫은 비명과 함께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볼품없이 발이 꼬여 엎어지기도 했다.

미처 환영술에 걸리지 못한 마수들을 향해 다시 다른 손을 뻗었고, 주변으로 빠르게 단단한 형체를 가진 가시넝쿨이 쏘아져 나갔다.

기사들 사이를 휘젓듯 빠른 속도로 마수를 향해 가자 뒤늦게 눈치챈 기사들이 잽싸게 옆으로 몸을 피했다.

목표지는 페이의 바로 앞에 선 늑대 마수였다.

끼잉!

넝쿨이 마수 주둥이에 어퍼컷을 치듯 날아가 위아래로 쩍 벌어진 주둥이와 앞발을 칭칭 감았다.

환술이 걸린 마수는 몸을 휘청이며 내게로 눈을 번뜩였다.

그 순간, 공간 환술을 펼쳐 놓은 채 잠시간 마수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우선 사상자를 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주 쓰지도 않는 능력을 여러 개 동시에 펼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보다도 더 가까이 있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빨리!”

“플레어!”

불의 마법을 읊는 마법사의 손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구웅, 화르륵!

칭칭 감겨 옥죄고 있는 넝쿨을 따라 불길이 일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늑대 마수가 그대로 통구이가 되어 버리더니 이내 시커먼 잿더미로 변했다.

다행히 페이 마틴은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았다.

“으…….”

안구건조증 걸린 사람처럼 두 눈이 시큰거리다 못해 눈물이 고일 지경이었다.

그사이 기사들은 환영술에 걸려 움직임이 더뎌지고 멍청해진 마수들을 가차 없이 썰었다.

덕분에 조금 틈이 생겼다. 숨을 고르며 눈을 꾹꾹 누르자 그새 뜨끈해진 눈두덩이가 피로하게 느껴졌다.

쟤는 대체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환술을 쓰지도 못하면서 왜 위험하게 앞에 나서는 거야.

지금처럼 처음부터 공간술을 펼칠 게 아니라면 환영술사는 기사들 뒤에서 움직이는 게 편하다.

내 눈이 잘못된 건진 몰라도 꼭 일부러 마수 앞에 나간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집순이가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것 같은 피곤함을 느끼며 서둘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노아고, 카일러스고 지금만큼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쿠웅!

어?

땅에 발을 찧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내 몸이 무릎 정도 높이로 붕 떴다.

“헤이젤―!”

페이를 구하느라 내 근처로 마수가 이동한 걸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육중한 발이 땅에 만들어 낸 충격과 바람에 그대로 태풍에 밀리듯 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엉덩방아만 찧었지만 하마터면 그대로 밟힐 뻔했다.

더 늦게 알아챘으면 볼썽사나운 모습도 보일 뻔했다.

“아야야…….”

고통은 둘째치고 눈앞이 먼지투성이였다.

아이고, 사람 살리다가 내가 먼저 죽겠네.

내가 주인공 버프만 받았더라도 이런 엉덩방아는 찧지 않았을 텐데!

매일 훈련에 임하며 지덕체를 쌓는 기사도 아닌데 어떻게 다 피하느냔 말이야.

“괜찮아?”

순식간에 마수 한 마리를 두 동강 낸 딜런이 다가와서 나를 일으켰다.

기사들은 남은 한 마리 대형 마수와 조무래기 마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진짜. 야, 너 씨… 빨리, 빨리 막았어야지!”

나는 괜히 딜런에게 화풀이를 했다.

“미안해, 미안해.”

“빨리 저거 남은 거 치…….”

어?

나는 남은 마수를 향해 손짓하다가 그대로 멈췄다.

일어난 먼지 사이로 적어도 다섯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검은 뭉텅이가 보였다.

“부단장님!”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며 주변에서 기함하는 소리가 났다.

나도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다섯 마리의 대형 마수가 무너진 벽 사이로 뒤따라 나타났다.

아직 남은 한 마리까지 합치면 총 여섯 마리. 조무래기까지 수십 마리는 훌쩍 넘는다.

토벌을 나가도 이렇게 대형 마수를 한 번에 만날 일은 없었다.

물론 이 몸에 들어와서 토벌을 나간 건 손에 꼽지만, 다른 기사들도 몸을 굳히며 놀란 것을 보니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이건 원작에 전혀 없는 내용이었다.

대체 이거 뭔데!

딜런이 얼굴을 굳히며 외쳤다.

“전원 다시 대형을 맞춰라!”

그사이 정신을 차린 페이 마틴은 뒤로 물러나고, 빠르게 기사들이 대형을 재정렬했다.

이건 이제 농담이라도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

딜런이 빠르게 앞으로 갔다.

어느새 대형을 맞추며 내게 가까이 온 럭스가 물었다.

“괜찮아, 너?”

엉덩이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못 참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보다 종이 인형처럼 날아가 버린 게 조금 수치스러울 뿐이다.

“괜찮아. 좀 수치스러울 뿐이야.”

“그건 걱정하지 마. 바람의 여신 같았어.”

“야.”

럭스가 익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내 뒤에 좀 있어. 힘 많이 썼잖아.”

“예전엔 더한 짓도 했는걸.”

“지금은 일반인이니까. 너 없었으면… 오랜만에 아찔했다, 진짜. 놀러 와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그러게 말이다. 알면 잘해라.”

“예, 누나.”

동갑인 주제에 한 번 더 농담하며 럭스가 진지한 얼굴로 활시위를 당겼다.

“자, 뒤에서 오빠 하는 거나 봐.”

누가 오빠야.

누나랬다, 오빠랬다.

나는 럭스의 뒷모습을 눈으로 흘기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쐐액―!

무서울 정도로 강한 힘으로 날아간 한 쌍의 화살이 정확히 대형 마수의 두 눈에 하나씩 콱콱 박혔다.

한 쌍의 화살로 정확히 목표물을 맞히는 건 럭스의 주특기였다.

소름 끼칠 정도의 정확성이었다.

끼에에엑! 하는 비명과 함께 마수가 몸부림을 쳤다.

진흙 덩이를 거대하게 쌓아 올린 것 같은 외형은 둘째치고, 악취가 심한 놈이었다.

쿵쿵 뛰어다닐 때마다 바닥에 사람 머리통만 한 진흙 덩이가 뚝뚝 떨어졌다.

정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놈이었다.

럭스가 다시 한 쌍의 화살을 쏘았다.

역시나 명중이었다.

럭스의 실력에 감탄하는데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생각 없는 행동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얼른 해치울 생각도 안 하고 왜 저러는 거야?

아직 마수를 처리하기도 전인데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곧 왜 다들 행동을 멈췄는지 이해했다.

새로 나타난 마수의 모습에 나조차도 환영술을 펼칠 생각도 못 한 채 움직임을 멈춰 버렸으니까.

스스스스.

스스스슥.

마치 천이 바닥에 쓸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나타난 마수는 나타나선 안 될 마수의 외형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마에 박힌 선명한 보라색 마정석.

인간과 비슷한 형태에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

그 사이로 보이는 흉흉한 붉은 눈.

추종자의 모습이었다.

“…….”

나는 말을 잃었다.

럭스도, 딜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 진짜 뭐지?

정말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거 아닐까?

아니면 내일 세상이 멸망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이 생각부터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하루에 두 번이나 추종자가 나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아직 새벽에 나타난 게 정말 추종자 마수였는지 확인도 못 했는데.

“여기… 황궁 안인 거 맞지?”

뒤에서 마수를 조종하는 추종자를 보고 럭스에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오늘 진짜 뭐지? 이 정도면 네가 끌고 온 거 아냐?”

“어휴, 이놈의 인기란.”

내가 받아치자 럭스가 낄낄거렸다.

이 상황을 즐기고자 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웃으면서 럭스는 다음 화살을 날릴 준비를 하는 중이었고, 나는 그 옆에서 기사들의 움직임을 읽으며 다음 환영술을 쓸 타이밍을 잡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에 긴장한 기운이 자욱했다.

“황궁이 아니고 완전 도떼기시장이네. 태자 전하는 어디 계신대? 빨리 태자 전하께 이 사실을 전해!”

그러고 보니 아까 딜런이 대화를 나누고 왔다고 했는데 황태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이런 건 주인공이 멋지게 해치워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게 주인공의 몫이지 않나?

하여간 진짜 쓸 데 있을 땐 안 나타난다.

그간은 얼굴을 보지 않아서 좋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주인공이 나서야 할 때였다.

“데이워스 공녀님과 서문 성벽 쪽으로 출발하신 상태라고 합니다!”

어디선가 다른 기사의 외침이 들렸다.

나는 까드득 이를 물었다.

현장에 나간 걸 뭐라 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지.

“여긴 우리가 빠르게 마무리한다!”

내 마음을 읽은 듯 딜런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더욱 기세를 올리며 마수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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