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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4)화 (44/131)

44화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었는데도 진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뜻이 같아 잘됐다며 제 손을 잡아끌었다.

‘여길 나가자. 나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서 둘이 사는 거야.’

‘노예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 텐데.’

‘여길 나가면 누가 아는데? 그리고 알아도 상관없어. 밀어낼 거야? 그런 등신 같은 짓 할 거 아니지?’

진저 페리안은 당돌했다.

신비로운 외형과 다르게 가끔 유쾌할 정도로 걸쭉한 입담을 쏟아 냈다.

다채로운 여자였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여자.

노예의 손을 기꺼이 잡아 주고 나가자며 이끈 여자.

이 자를 제게 보내기 위해 당분간 오지 못한다고 말했던 건가.

외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그녀가 주는 소식에만 의존해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배신하더라도 그녀를 믿고 따르기로 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진저가 위험에 노출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생각 끝에 다시금 궁금증이 들었다.

‘아차, 오른쪽 눈썹이 아예 없는 애 이름이 뭐더라… 여하튼 오른쪽 눈썹 날아간 애 조심해요. 얼굴에 큰 흉터를 남기고 싶지 않다면요.’

마지막에도 의문스러운 말만 남긴 채 사라진 사람.

과연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에그먼은 벽에 세워진 검을 들어 올렸다.

아홉 번의 경기가 남았다.

그중 네 번의 경기만을 이겨야 한다.

또 밤이 돌아올 것이다.

이 세계의 낮이 다가온다는 소리다.

에그먼은 진저를 잠시 떠올린 뒤 몸을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는 딜런이 올 동안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시간을 보냈다.

책상을 슬쩍 보니 일이 좀 쌓이긴 해도 그렇게 몰려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혹시나 내가 그만둔 이후 황태자가 딜런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일을 모조리 맡기고 놀러 다니진 않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가 보지.’

어쩌면 사직서를 날리면서 한 말이 제드에게 꽤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절대 기사들을 과로하게 하지 말라는 말.

제대로 안 들어주면 정말 릴리 데이워스까지 찾아가서 다 까발리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사직서를 내는 족족 찢어 버릴 땐 진짜 황태자고 뭐고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는데.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더 깊숙이 묻었다.

본의 아니게 진행된 거긴 하지만 릴리가 카일러스에게 납치당하는 것도 막았고…….

“아니지. 그것뿐만이 아니지. 제드와 릴리, 그리고 카일러스와의 관계를 아예 단절시킨 거나 마찬가지지.”

카일러스가 원작에서 저지른 일은 납치뿐만이 아니다.

아예 릴리를 데리고 있었던 시간도 있었으니까.

“근데 그 이유가… 정확하게 나왔었던가?”

아닌 것 같은데.

내 기억으로 카일러스는 작품 내내 릴리 데이워스를 사랑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내게는 연기한 거라고 해도, 그도 사람이고 인간이니 진짜 사랑을 했다면 뜨겁진 못해도 미지근한 그 어떤 반응을 보였을 텐데.

옆에 두었지만 릴리를 아껴 주지도 않았고, 그 어떤 애정도 보여 주지 않았다.

뭘까.

왜 굳이 릴리를 옆에 두려고 했을까.

황족인 제드 테리 엘키엄과 대치하면서까지.

오히려 귀찮은 기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옆에 두지 않았다면 제드와 대치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끝끝내 릴리를 곁에 두고 싶어 했었던 구절이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다.

단명하는 엑스트라인 나와 달리 릴리는 성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금은 친화력에 가까울 정도의 작은 힘이고, 제드의 곁에서 점점 힘을 키워서 나중에는 성녀에 가까운 강한 힘을 내게 된다.

그런데 카일러스에게 성력이 필요하다는 구절은 없었다.

애초에 흑마법에 어마어마한 내성이 있는 사람인데 굳이 성력이 필요할 리가.

“아니면…….”

내가 전혀 못 느낀 거라면?

사실은 릴리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라면?

릴리 특유의 해맑은 웃음이 생각나고, 덩달아 노아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음… 짜증이 좀…….”

나네.

그러다가 기분이 급속도로 바닥에 처박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르르, 쾅!

마치 거대한 울음과도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딜런이 들이닥치듯 안으로 들어왔다.

“헤이젤!”

별안간 쏟아진 굉음과 딜런의 외침에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깜짝이야. 왜? 무슨 일이야?”

마음을 잠식하던 생각이 쏙 사라졌다.

갑자기 벽이 무너지기라도 했나.

딜런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후문 게이트 포털 쪽에 마수가 출현했어.”

“아, 난 또 뭐라… 뭐라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던 나는 딜런하고 똑같은 표정이 돼 버렸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뭐가 나타났다고?”

딜런에게 다시 물었다.

후문 쪽이라면 여기 기사단 훈련장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이었다.

후문 게이트 포털이라면 황궁 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딜런이 미친 게 아니라면 황궁 안에 마수가 출현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후문 게이트 포털 쪽에 마수가 출현했다고. 지금 당장 도와줄 수 있겠어? 일반인이니 강제로 소집하진 않아. 다만…….”

“뭐 해, 빨리 가지 않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당장 딜런을 따를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페이 마틴에게 이 일을 맡기는 건 내가 너무 한심할 것 같았다.

누구 하나 다치느니 내가 가서 조금 도와주는 게 낫지.

딜런이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끄덕이며 곧장 내게 검을 내밀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검을 잡았다.

“혹시 모르니까.”

“부서져도 난 몰라.”

“씹어 먹어도 괜찮아. 네 검, 태자 전하 사무실에 아직 있는데.”

“가져다 버리라고 해.”

짧게 웃음을 터트리고 다른 검을 챙긴 딜런과 나는 빠르게 후문 쪽으로 뛰어갔다.

“근데 보호 결계는 어떻게 된 거야?!”

“게이트 포털 쪽에는 보호막이 고작 한 겹인 거 알잖아. 매번 포털을 이용할 때마다 결계를 풀 수도 없는데 하필이면 거길 비집고 들어왔어.”

“마수가 정말 맞아? 새벽에는 서문을 부쉈다더니, 어떻게 수도에 몇 시간 만에 또 나타날 수가 있어. 혹시 새벽에 들이닥친 그 마수는 아니지?”

우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계속 말을 주고받았다.

“아냐. 보고된 마수와 외형이 달라. 서쪽 성벽으로는 우리 애들 일부를 수색하라고 보내 놨으니 곧 보고가 들어오겠지.”

“그럼, 여긴?”

“2 기사단하고 남은 인원이 해결 봐야지. 급하게 황제궁과 황후궁에도 사람을 나눠 보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너 있어서 우리만으로도 해결 보겠는데.”

나는 곧장 눈을 부라렸다.

“장난하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황태자 전하와 피해 복구에 대해서 상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결계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라고.”

“사상자는 아직이지?”

“응, 지금 막 대치 중이야.”

딜런과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우웅, 하고 바닥에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가까운 곳에 마법 방벽을 설치하는 신호였다.

“하, 진짜. 죽을, 죽을 것… 같.”

“너 그동안 운동 안 했구나.”

“할 일이 뭐가 있는데, 내가. 하, 진짜. 내가 여길 오는 게, 아니었, 는데.”

나는 옆에 검을 차고서 손으로 무릎을 딛고 잠시 숨을 골랐다.

딜런은 멀쩡한데 나만 헉헉대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딜런을 먼저 보내고 조금 더 쉰 뒤에 나도 뒤따라 다시 뛰었다.

이윽고 검은 연기가 보이는 것 같더니 마수들의 모습이 시야에 나타났다.

정말 외부 성벽과 이어지는 그 경계선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진짜잖아.”

딜런이 거짓말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정말 황궁 안에 마수라니.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훈련 겸 정기 대토벌을 나간 것도 아니고 정말 황궁 안에.

이미 모인 기사들이 사방에서 대치하고 꾸물꾸물 밀려들어 오는 조무래기 마수들을 쓸고 있었다.

심지어 거대한 대형 마수가 셋!

양쪽에 뿔이 난 갈기늑대 형상의 마수가 하나.

페라리움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버팔로와 같은 마수 두 마리가 황궁 내를 휘젓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도 호출을 받아 대거 모인 탓에 꽤 인원이 많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내가 빠져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기사들이 몰려 있었다.

대충 장애물 정도만 끼얹어 주고 빠지면 저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계산이 끝나자마자 딜런의 곁으로 가서 두 손을 바닥에 내리며 환영술을 펼치려는데…….

“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레몬색 머리카락을 가진 기사가 뒷걸음치다 쓰러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로 앞에 갈기늑대 마수가 검은 침을 뚝뚝 흘리며 페이 마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거리는 약 50m.

갈기늑대 마수가 풀쩍 뛰기만 한다면 단숨에 먹힐 수도 있었다.

이런 미친!

아니, 쟤 왜 저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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