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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3)화 (43/131)
  • 43화

    인간.

    그보다 더 좋은 제물이 어디 있으랴.

    특히 강한 힘을 가진 자들.

    오러를 보유한 검사들이나 마력을 가진 마법사들이라면 환장한다.

    내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부분이다.

    물론 가만히 있어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운명이 완전히 틀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위험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이고, 그로 인해 모든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살고 싶을 뿐.

    영웅이 되고 싶었다면 애초에 안락한 삶 따위 처음부터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영웅은 개뿔.’

    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 건데!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 매일 책을 읽고 꽃을 보는 게 그저 낙(樂)인.

    곱게 늙어서 가끔 홍홍 웃으며 마을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는 게 꿈이란 말이야!

    하지만 앞으로 꽤 많은 사람이 그 제물의 희생양이 될 텐데…….

    나는 정말 모른 체하는 게 맞나?!

    …정말 이게 맞나?!

    “정신 차려.”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생각을 이어 가다 짝! 하고 두 뺨을 쳤다.

    나부터 죽게 생겼다고, 지금!

    사실 처음에 흑막 카일러스 하디드가 최종 흑막이 강림하는 매개체가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카일러스 하디드가 최종 흑막을 처리하는 데 앞서 제드와 릴리에게 함락당해 자취를 감춘 건 확실해.’

    최종 흑막이 모습을 드러내던 날.

    그 묘사를 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쩌적―

    땅이 갈라지고 주변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귀가 먹먹해지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이윽고 몸이 밀릴 정도로 강렬한 태풍이 몰려왔다.

    까드득, 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왕의 강림을 위해 모였던 마수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리나케 물러나며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쿵! 육중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갈퀴와도 같은 검은 손이 땅을 딛고 올라왔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자욱하게 깔린 마력에 기사들의 몸이 밀려났다.

    제드는 덜덜 떨고 있는 릴리를 품에 안고 보호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윽고 거대한 천막을 쓴 것 같은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아지랑이가 몸을 감싸고 있고, 성벽만큼이나 거대한 몸체였다.

    죽음의 냄새와 함께 뚝뚝 검은 피를 흘렸다.

    그 기운만으로 주변의 생명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왕의 강림이었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깃들어 있던 상태가 아니라 정말 갓 지옥에서 올라온 것처럼 묘사되었다.

    수백 명, 수천 명의 제물을 삼키고 지옥에서 끌어 올려진 악(惡) 그 자체.

    감히 마주하기가 힘든 악취와 기운이 자욱했다고 한다.

    카일러스 하디드는 악당인 거지 괴물은 아니었다.

    “…….”

    우선은 딜런을 기다려 보자.

    그 달려온 기사가 말해 준 것도 제대로 된 보고도 아니었잖아?!

    어두운 새벽이라 제대로 못 봤을 수도 있다.

    공포에 질린 사람이 다른 마수를 추종자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른 문제도 골치가 아팠다.

    딜런의 도움과 함께 운이 좋아서 제드와 릴리를 만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만날 것 같은 안 좋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어차피 한 번은 만나서 인사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남편이 누군지만 꼭꼭 숨겨야지.

    나는 딜런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들려올 소식을 기다렸다.

    ⋆★⋆

    그 시각, 에그먼의 방.

    어제 경기에서 승리 후 에그먼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제는 뭐였을까.’

    진저를 통해 자신의 안부를 확인하고 도와주기 위해 왔다는 여자를 떠올리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고, 얼굴을 뚫어져라 본 기억이 있는데.

    사실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도 확실히 분간되지 않는다.

    작고 여린 목소리인데도 힘이 느껴져서인 것 같다.

    아니다. 좀 높은 남자 목소리였던가?!

    혼란스러웠다.

    대체 정체가 뭐였을까.

    진저에게 선물해 준 목걸이까지 가지고 있으니 확실히 진저와 아는 사람은 맞는데.

    마치 누군가에게 홀린 것만 같았다.

    진저가 안전하다는 건 확실한데 아니, 확실하다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여기서 나갈 수가 없으니.

    그러나 누군지도 모를 존재가 한 말은 모두 선명하게 기억이 남았다.

    ‘앞으로 열 번의 경기를 더 치러요. 당신은 거기서 딱 네 번의 경기만 이기는 거예요. 오늘은. 음, 누구라고요?!’

    ‘젠과 마티스.’

    ‘아, 그렇지. 그럼 문제없겠다. 오늘은 이기든 말든 당신 마음이고, 꼭 기억해요. 딱 네 번만 최종 우승해야 해요. 그러면 5순위 안에서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죠? 그 이하로 떨어지면 지방으로 가게 되니까요.’

    이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생태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 들어온 노예가 아닌 이상 5위 밖으로 밀려나면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된다.

    노예들 사이에선 ‘폐기당했다’라고도 한다.

    같은 승리를 해도 베팅 금액이 현저하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거기서 다시 최상위 검투사가 되면 다시 돌아올 수는 있지만 옮기는 건 좋지 않다.

    언제 진저가 올지 모르니 절대 길이 엇갈리면 안 된다.

    에그먼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말투는 가벼웠지만 노예를 깔보는 기운은 전혀 없다.

    제 앞에 선 정체 모를 이는 손가락으로 한참을 뭔가 세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11번째 경기 전에 사람 하나를 보내 줄 거예요. 그때 다음 계획을 말해 주도록 하죠. 암호는 <빵은 프랑스 빵이 맛있대요, 정말 그런가요?> 이거예요, 알아챌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프랑스?’

    ‘그냥 여기 사람들이 안 쓰는 단어를 조합해서 만든 거예요. 어쨌든 조만간 사람을 보내서 정확한 이야기를 해 줄게요. 그러니까 최대한 버티고 있어 주세요. 나도, 진저도 애쓰고 있을 테니까.’

    ‘가는 겁니까?’

    ‘진저한테 할 말 있어요? 전해 줄까요?’

    잠시 멈칫한 채 입을 달싹이던 에그먼이 입을 열었다.

    ‘…아프지 말라고만 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안부는 꼭 전해 주도록 할게요. 행운을 빌어요.’

    그 여자, 아니 남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은 문을 나갔고 곧장 정적이 찾아왔다.

    한참이 지나도 밖에서 소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아, 그 사람이 온 걸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바로 문 앞을 지키던 관리자도 아무 말이 없었으니까.

    진저 페리안.

    그녀를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진저 페리안은 외출조차 되지 않는 생활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이탈자나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뭐죠?’

    ‘…….’

    ‘아, 여기 있네요. 에그먼. 당분간 당신을 관리할 진저 페리안이라고 합니다. 임시지만 잘 부탁해요.’

    처음 목적이 불순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에그먼은 이곳에 온 이후부터 늘 탈출을 꿈꿔 왔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때를 기다릴 뿐.

    진저 페리안은 그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다쳤어요. 괜찮아요? 기다려요. 의사를 부를게요.’

    ‘진저 페리안.’

    그녀가 관리자로 온 이후 이뤄진 첫 결투에서 자상을 입었다.

    일부러 자신을 베도록 만들었다.

    진저 페리안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도박이었다.

    ‘당신이 치료해 줘.’

    ‘…뭐라고요? 난 관리자지, 의사가 아니…….’

    ‘괜찮아. 다른 놈들은 필요 없으니까.’

    그 후로 에그먼과 진저는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훈련이 끝나는 오후부터 밤 결투가 시작되기 전, 그리고 결투를 마치고 검투장 문이 내릴 때까지 거의 항상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선을 지키고 곁을 전혀 내주지 않았던 진저 페리안은 처음보다 수다스러워졌고 에그먼을 걱정하는 일도 많아졌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는 건 어때? 내가 보고 올리면 되니까.’

    ‘빚만 늘겠지.’

    ‘…이번 경기에 나오는 사람. 좀 위험해 보이는데.’

    ‘위험해 봤자 죽을 일밖에 더 있나.’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다치면 네가 치료해 줘.’

    여자의 동정을 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 또한 그녀를 동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쪽 세계를 주무르고 있다는 하디드 공작의 사람이니 그녀가 뭐라고 하든 사실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떤 삶을 살아왔든, 그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하등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신도 남자라고 진저 페리안에게 동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면 주물러 주고 싶었고, 제가 눕는 침대에서 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마음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땐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아 진저 페리안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당신이 나한테 왜 그랬는지 알고 있어.’

    ‘…….’

    ‘모든 걸 망칠까 봐 겁나? 그게 아니라면 내 손을 잡아. 여길 나가게 해 줄게. 당신이 어떤 눈빛으로 날 보는지는 이제 다 아니까.’

    진저 페리안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계산적으로 굴고 진저 페리안을 유혹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에그먼은 어느새 진저 페리안에게 함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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