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무슨 일이 있었냐는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은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일입니다.”
평소였다면 그레이스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오늘따라 끈질기게 질문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건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은 거냐는 질문에는 벤자민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스도 편지에 찍혀 있던 문장을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황실에서 온 편지에 저렇게 표정이 굳어 있다는 건 중요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는 걸 테니까.’
벤자민은 결국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론델 운하에 관련된 일입니다.”
“……아.”
론델 운하, 그레이스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서부 오염에 관해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되는 건가?’
“론델 운하의 정화 작업을 끝마쳤으나, 운하의 상태가 또 좋지 않아져서 말입니다. 이에 대해 잠시 조사해 줄 수 있는지 청이 왔습니다.”
그레이스의 추측이 맞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의문이 따랐다.
“론델 운하는 중요한 문제죠. 다만, 그걸 각하께 조사를 명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벤자민 말고도 운하를 조사할 수 있는 인원은 많았다.
“정화 작업을 하던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 중에서 제가 두 번째로 신분이 높았기에 명이 내려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첫 번째는 말하지 않아도 황태자인 실베스터였다. 벤자민은 자신이 두 번째로 높다고 했으나 펠튼 공작과 황태자 중 누가 더 높은 지위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애매했다.
‘많은 불만이 들어오고 있으니, 그 자리에 공작인 벤자민을 보냄으로써 불만을 잠재우려는 수법인가?’
“그리고…….”
벤자민은 조심스럽게 말을 덧대었다.
“론델 운하 근처에는 마도구 공방이 있습니다. 제도에서 제일 큰 규모로요.”
마도구와 펠튼 공작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애초에 펠튼 공작가에서 시작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몇몇 이들은 마도구 공방이 론델 운하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마도구가 빠른 시간 내로 자리 잡을 수 있던 이유는 마도구를 운용하는 데 쓰이는 핵심 재료인 마정석이 자연에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론델 운하의 시작점 바로 근처에 마도구 공방이 세워질 수 있던 이유 또한 필수 재료인 마정석이 오염 물질이 아니란 것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마도구 공방 탓을 한다고?’
펠튼 공작가의 힘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커지니, 이를 견제한 이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낸 것이다.
‘애초에 벤자민한테 가 보라고 명령을 내린 것 자체가 그 소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리겠지.’
그레이스도 알아챈 사실을 벤자민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숨기려고 한 건가?’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다가 벤자민에게 물었다.
“그럼 론델 운하에는 언제쯤 들르실 생각인 건가요?”
“외출을 끝낸 후에 따로 들를까 합니다.”
“저와의 약속 때문이라면, 저는 그냥 먼저 돌아가도 괜찮아요.”
“그, 그건 아닙니다!”
벤자민은 그들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론델 운하를 들를 생각이 있어 보였다. 그럴 거면 차라리 목격자가 많을 시간에 들르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그가 외출을 끝낸 후 따로 들르게 된다면 늦은 시간일 터였다.
“늦은 시간에 가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지금은 부인과 선약이 있으니까요.”
그레이스는 눈썹을 축 늘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벤자민이 왜 그 일을 수락했는지 알 거 같아.’
만약 벤자민이 요청을 거절하면 다른 이를 고르는 데 시간이 할애된다. 그러면 론델 운하의 정화 작업은 더뎌질 것이며, 그만큼 제도의 삶의 질은 떨어진다.
‘사실 제도뿐만이 아니지, 이건 서부 오염의 문제니까.’
정치적 의도가 어찌 되었건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벤자민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를 보호하고 보살피려는 성정이었다.
“다음에 다시 외출하면 되잖아요. 안 그런가요?”
사실 오늘 벤자민이 론델 운하를 검사하고 나면 한동안 바빠져 같이 외출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레이스는 아무것도 모른 척 그리 말했다. 그녀는 그가 바로 제안을 수락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벤자민은 망설였다.
“부인과의 약속이 계속 취소되면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질까 봐 걱정됩니다.”
“운하와 제 약속을 같은 선상에 두면 안 되는 거잖아요.”
사실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염려하듯 말했을 때,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가 술렁거렸다.
그녀는 제 마음속의 술렁거림을 외면했다.
“계속 양보하다 보면 부인의 것이 남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지지 않았다.
‘뭔가 우선순위가 잘못된 거 같은데.’
벤자민은 그럼에도 그레이스를 우선하고 싶은 눈치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론델 운하를 먼저 들르는 게 맞았다.
또 어쩌면, 그레이스 마음속 어딘가 숨어 있는 회피적 성향이 그녀를 부추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가 풀며 제안했다.
“그럼 오늘은 같이 론델 운하에 들러 볼까요?”
“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정말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낸 듯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하, 하지만 그러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운하 근처에는 번화가가 있으며, 벤자민이 공식적으로 검사를 나온 이상 이목이 몰리는 건 예견된 바였다.
그레이스는 창문에 비친 제 차림을 확인했다.
벤자민이 편히 입으라고 했으나, 그녀는 또 몸에 밴 습관대로 몸을 전체적으로 감싸는 펑퍼짐한 드레스에 보닛을 꾹 눌러쓰고 있었다.
이 정도면 공작 부인이라는 걸 알아도 얼굴은 함부로 확인할 수 없을 게 뻔했다.
‘톰 버킨 같은 기자들이 내 정보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건 그만큼 그동안 그레이스가 외출을 삼갔다는 거니까.’
차라리 조금씩이나마 모습을 드러내는 게 장기적으로 득이다.
그레이스는 역대 공작 부인 중 가장 못나고 무능하다고 알려진 것치고는 많은 관심을 샀다.
‘펠튼 공작 부인이라는 위치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또 그런 것치고는 그레이스의 친정인 린덴 자작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는 거 같으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정보에 가치가 없게 만드는 게 중요해.’
그리고 지금 톰 버킨의 죗값을 줄이는 데 있어서는 다른 기자들의 민폐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그레이스는 제 보닛을 톡톡 건드렸다.
“이게 있어서 나름 괜찮을지도 몰라요.”
벤자민은 그럼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괜찮습니까?”
“네, 정말로요. 어차피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할 테고요.”
그레이스가 ‘맞죠?’ 하며 덧붙여 물었다. 벤자민은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마부석을 두드렸다.
“론델 운하의 시작 지점으로 행선지를 바꾸도록.”
마차 벽 너머로 알겠다는 답변이 들렸다.
벤자민은 행선지를 바꾼 뒤에도 여전히 망설임이 가득해 보였다.
“정 힘들 거 같으면 마차 안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럼 괜찮다가 힘들어지시면요.”
이쯤 되면 유리 취급을 넘어섰다. 그레이스는 여기서 더 실랑이해 봤자 영양가가 없을 거 같아 그냥 알겠다며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는 긴 침묵이 이어졌고, 마차가 멈추고 도착했다는 마부의 말이 들리고 나서야 고요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부가 발 디딤판을 문 앞에 두자, 벤자민이 먼저 내리며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리시지요.”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잠시 주변을 훑었다. 번화가치고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을 알아채고, 그는 크게 안심했다.
남들의 눈에는 구분되지 않았겠지만 그레이스는 이상하게 늘 비슷한, 평온한 미소를 띤 벤자민임에도 구분이 되었다.
‘신기하네.’
운하는 마차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원한 느낌이 들며, 물내음이 맡아졌다.
미리 와서 조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복장을 살펴보니 몇몇은 신전에서 온 듯했다.
“정화 작업을 하고 있네요.”
“오늘은 성녀께서 계시지 않아 완벽하게 하지 못하지만요. 이미 한차례 성녀를 불렀지만 실패했으니 완벽한 원인을 깨달을 때까지는 보완하는 데 그치려나 봅니다.”
신전 사람들은 성녀인 아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씩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보닛이 단단하게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에스코트하며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과한 예는 갖추지 말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벤자민과 그레이스가 도착하자 모두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몇몇 이들은 그레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레이스는 그 시선을 느끼며 괜히 쭈뼛, 하고 솜털이 서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어렵구나.’
고아원에 있을 때는 이런 기분을 느낀 적 없었다.
‘그 마도구 때문일 거야.’
지금은 변장용 마도구가 없어 ‘그레이스 펠튼’으로서 자리에 서 있었으니, 떳떳하게 그들의 시선을 받을 수 없었다.
지은 죄도 하나 없으면서 괜히 그랬다.
“각하, 옆에 계신 분은……?”
그레이스가 제 소개를 하지 않자, 기다리던 이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가 벤자민에게 물었다.
“내 아내일세. 원래 오늘 아내와 선약이 있었는데, 이 사태를 알고 먼저 들르자고 배려해 주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