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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1)화 (41/131)

41화

“네, 저도 부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라는 말은…….”

“그리고 또, 고아원 원장은 역시 아직 주변에 있겠죠?”

그레이스는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벤자민의 말을 뚝 끊고 말을 이었다.

벤자민은 눈썹이 축 처진 채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가 고아원을 이용해서 계속 돈을 긁어모았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 돈을 벌 능력이나 신용이 없다는 것이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그래서 치안대에 연락을 해 치안을 강화했으며, 클레타 던에게 원장의 외관을 말해 달라 했습니다. 대충, 침입자를 멀리서 본 것 같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된다고 했으니까요.”

“만약 그가 떠나 있던 사이에 외관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면 잡는 데 어려움은 없겠네요.”

“예, 마도구를 사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게다가 사더라도 비싼 걸 살 여력은 없을 겁니다.”

벤자민은 설명하면서도 그레이스의 안색을 힐끗 살폈다. 처음보다 안색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다만 조급해진 사람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고아원에 있는 분들께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습니다. 부인께서도 방문하실 예정이 있다면 알아 두십시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는 건 아닌걸요. 그래서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그레이스의 말에 벤자민은 눈을 깜빡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렇군요.”

그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미묘했다. 그레이스는 대체 벤자민이 왜 저런 반응인가, 싶었지만 벤자민의 속을 완전히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레이스가 벤자민을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굴렸다.

벤자민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잠시 고민하다가 운을 뗐다.

“그, 있잖습니까. 딱히 무언가 즐길 만한 상황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만.”

“네?”

“근래 부인께 안 좋은 일도 있었고, 저번에 식사도 취소되었던 일이 있으니…… 혹 괜찮으시면 저와 외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쁘지 않으세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그레이스는 바로 질문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질문을 돌려 말한 거절로 알아들은 것인지, 그의 분위기가 축 늘어졌다.

“아, 아뇨! 거절이 아니라, 일이 많으셨던 거 같아서요.”

“최근은 여유롭습니다.”

‘여유로워도 되는 거야?’

그레이스의 질문이 거절의 의도를 담은 게 아닌 것을 깨달은 벤자민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실렸다.

‘그보다 왜 이렇게 날 붙잡으려고 하는 거야?’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다. 다만 그 ‘우호’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백 보…… 아니, 천 보 양보해서 인간 대 인간으로 호감이 있다고 쳐도, 그럼 원작에서는 왜 그레이스가 그런 취급을 받은 거지?’

벤자민은 그레이스와 늘 함께 외출하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지금도 그것을 전제로 제안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원작에서도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데리고 외출하려고 하는 낌새가 보였어야 하는데, 딱히 그에 대한 기억에 없었다.

그레이스가 생각에 빠져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았지만, 근처에 서 있던 벤자민은 얌전히 기다렸다.

“어디 갈 건데요?”

그레이스의 수락과도 같은 질문에 그가 활짝 웃었다.

“제도 외곽을 둘러볼까 합니다. 그곳이 인적도 드물어 편하니까요.”

‘외곽에 무슨 일이 있던가?’

그레이스는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뒤적여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기억하는 원작에서는 벤자민과 그레이스가 외출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벤자민은 분명 축제도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어.’

그럼에도 원작에서는 둘이 축제도 참가한 적 없었고, 벤자민은 아리아에게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그레이스가 된 것을 계기로 벤자민이 바뀐 건 아닌 거 같아.’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빙의한 순간부터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레이스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벤자민은 원작의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도 계속 외출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

“부인?”

어차피 톰 버킨을 재판장에 넘기고, 원장을 잡을 때까지 그레이스가 따로 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혹시, 싶었지만 벤자민이 자신을 기분 전환시켜 주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요. 그럼 나갈 준비 좀 할게요.”

그레이스가 확답을 내리자 벤자민이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별관까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에스코트라.’

그레이스의 시선은 별관 쪽으로 향했다. 그가 에스코트할 만큼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너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불쌍해서야.>

<동정인 걸 잊지 마.>

<착각하는 순간 버려질걸? 당연하잖아. 주제도 모르는데.>

벤자민이 내민 손을 잡으려는 순간, 머릿속에 또 다른 잡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를 간간이 괴롭히는 소리였다. 그레이스가 자신을 뜯어먹으려는 듯 달라붙는 소음에 손을 멈추자, 벤자민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오늘은 햇살이 좋습니다. 준비 시간은 얼마든지 걸려도 좋으니, 부인께서 좋아하는 옷을 입으시면 좋겠군요.”

온갖 날카로운 소리 사이에 벤자민의 목소리가 섞이자 듣기 싫은 목소리들이 흩어졌다.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일으키며 천천히 이동했다.

‘좋아하는 옷…….’

그의 말에 그레이스는 옷장 구석에 박혀 있는 화사한 옷을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 원래의 그레이스의 취향이었을 테고, 현재 그레이스의 마음에도 들었다.

‘어울릴까?’

그럼에도 입지 못하는 건 필시 마음에 남아 있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불안감을 자신이 가질 이유가 없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휘둘리고 있었다.

“음, 있으면요.”

“영 고민된다면 편안한 옷을 입으시지요. 원래 밖을 돌아다닐 때는 편한 옷이 제일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레이스의 대답에 벤자민은 행여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부담을 주었을까 싶어 바로 말을 덧대었다.

솔직히 그레이스는 그런 벤자민의 배려가 종종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느껴졌다.

둘이 별관 바로 근처까지 다다랐을 즘, 본관의 집사가 급히 벤자민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급히 확인하셔야 할 것이…….”

집사의 손에는 황실 직인이 찍힌 편지가 들려 있었다.

벤자민은 그 편지를 보고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그럼 천천히 채비하시지요.”

그레이스는 잠시간 느껴졌던 위화감에, 눈동자만 굴려 편지와 벤자민을 교차해 보다가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올게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벤자민이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그레이스가 별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레이스가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그는 집사가 가져온 편지를 읽었다.

점점 읽어내릴수록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런.”

⋆★⋆

밖으로 나올 때면 그나마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레이스는 이럴 때마다 대체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공작저가 그녀에게 좋지 않은 공간이구나 싶었다.

‘고작 밖으로 나온다고 이렇게 살 거 같다니.’

“아무래도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평범한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불편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창밖으로 풍경을 살펴보던 그레이스에게 벤자민이 염려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혀 안 불편한걸요.”

이는 예의상 한 말이 아니었다. 이 마차는 겉으로 보기에나 평범했지, 내부는 온갖 마법 공정을 마친 마차였다.

앉아 있는 의자도 푹신하고 흔들리지 않으니 불편할 이유가 없었다.

그레이스가 진심을 담아 괜찮다고 답하자 벤자민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누그러졌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의 부드러운 표정은 그레이스의 질문에 순간 경직되었다. 벤자민은 순식간에 평소와 같은 얼굴로 바꾸며 답했다.

“외곽에 플라워 하우스가 있습니다. 샤를 후작가의 소후작 부인이 운영했던 곳이죠. 유리온실로 이루어져 있어 내부 기온이 온후하고, 다양한 꽃을 접할 수 있습니다.”

‘샤를?’

그레이스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 본 듯했다. 물론 그레이스는 펠튼 공작 부인이니,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샤를 후작가와 연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인 거 같은데.’

원작에서 나온 적이 있던가? 그레이스는 눈을 바삐 굴리다, 제 앞에 있는 벤자민과 시선이 마주쳤다.

“……부인께서는 꽃에도 관심이 많으셨죠?”

청록색 눈동자에 벤자민이 담겼다. 그는 최대한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그가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물어봐도 되는 걸까.’

그레이스는 혹시 자신이 물어보면 참견처럼 느껴질까 걱정되었지만 신경 쓰였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기 시작했던 건 별관에 들어가기 전, 한 편지를 받은 후부터였다.

결국 그레이스는 고민을 안은 채 그에게 질문했다.

“각하, 무슨 일 있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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