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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0)화 (40/131)
  • 40화

    ‘그러면 이제…….’

    원장이 어디 있을까, 그게 문제였다.

    톰이 그레이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면, 그는 응당 자신의 가치를 그녀에게 보여 주고자 했을 것이다. 원장의 위치를 발고하는 것으로.

    하지만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으며 ‘소문의 배후를 캐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그 뜻은 고아원 원장의 위치는 톰 버킨 또한 모른다는 뜻이었다.

    ⋆★⋆

    ‘힘들다…….’

    비밀 통로를 통해 다시 별관으로 돌아오니, 그레이스의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체력은 이제 아기 사슴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였다.

    ‘톰 버킨이 쪽지 속 정보는 어디서 났냐고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야…….’

    톰 버킨에게 넘긴 정보는 어떤 목걸이의 소재지였다.

    ‘태양의 가호’라고 불리는 목걸이는 대대로 성녀에게 대물림되는 목걸이다.

    성녀가 제국에 처음 나타났을 때, 당대 황제는 첫 성녀의 탄생을 축복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목걸이를 만들어 ‘태양의 가호’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신전에서 그 목걸이를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오래된 목걸이의 보존을 위해, 또 도난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신전은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이미 도난당한 후라서 공개하지 못하는 거야.’

    신전 측에서는 황실에 목걸이를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황실에서 선물한 귀한 선물이 사라졌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들의 입지는 불리해진다.

    ‘아무리 신전이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해도, 제국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구설수에 휘말리게 될 거야.’

    게다가 성녀를 위한 상징적인 선물이고, 아리아는 성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누군가가 작정하고 그녀에게 목걸이가 사라진 것을 얽어 자격을 물을 수 있었다.

    ‘원작에서는 아리아가 목걸이가 도난당한 사실을 알게 되고, 찾는 과정에서 황태자 실베스터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실베스터는 황실이 아닌 아리아의 편에서 행동했다. 물론 그는 원래부터 황태자로서의 모습은 거의 없었긴 했다.

    ‘……아, 그리고 벤자민도 도와주지.’

    그레이스는 주요 사건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제 남편의 원작 속 존재감에 잠시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아냐, 난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좋은 거야. 응, 그렇고말고.’

    목걸이는 불법 경매장 중 한 군데의 지하실 보관고에 처박혀 있었다. 톰이 이 정보의 떡밥을 사제에게 살짝 던진다면 신전 내에 이야기가 돌 테고 당연히 진실을 알고 있는 이에게도 닿을 것이다.

    ‘머리가 굴러간다면, 목걸이가 있는 정확한 위치는 모르니까 톰 버킨을 죽이지는 못할 거야. 다른 이유를 대서라도 비밀리에 황실 감옥에서 신전 감옥 쪽으로 이동시키겠지.’

    그리고 톰 버킨이 목걸이의 위치는 신성한 돌로 깎은 여신의 석상 앞에서 말하겠다고 조건을 걸면 된다.

    몇 개 없는 진짜 여신의 석상은 신성한 돌이란 것으로 만들었는데, 이 앞에서 한 맹세는 절대로 깨트릴 수 없다.

    그래서 복잡하거나 세속적인 맹세는 할 수 없다는 점이 있었지만, 톰 버킨이 그들에게 시킬 맹세는 그가 신전에 목걸이의 위치를 고하면 이후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위협하지 않을 것, 이었다.

    ‘목걸이를 찾는 게 더 급하니, 신전도 맹세를 해 줄 거야.’

    그레이스는 이럴 때 원작의 내용을 기억한다는 건 정말 좋구나 싶었다. 물론 가끔 그것 때문에 기분이 진창으로 빠지는 건 사양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어떤 기억은 선명하지 않은데 어떤 기억은 또 잘 떠오른단 말이지. 기준이 있나?’

    촛대를 원위치로 두며, 그녀는 제 미간을 짚었다. 하지만 지금 고민해 봤자 해결되지는 않을 문제였다.

    ‘오늘 뭔가 많은 일이 있었네.’

    조만간 벤자민을 만나 톰 버킨은 그냥 재판장에 넘기자고 하면 벤자민은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 다음 도망간 원장을 잡아야지. 아마 돈은 다 써 버렸을 테니 남은 거라도 받아 낼 기대는 버리고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끔 제대로 형벌을 내린 다음 고아원의 소유권을 완벽하게 클레타의 것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도 나름 잘하고 있는 거 같아.’

    초반의 불안과 널뛰는 감정의 보폭과 달리, 오늘은 정말 잘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난폭하고 이상한 소리도 지금은 조용했다. 그레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계속 내가 딱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노력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원래의 그레이스도 이런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진짜 그레이스도 노력하고 싶었는데 못한 걸까.’

    어쩌면 그녀는 이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그레이스에게는 이 모든 게 현실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슬퍼졌다. 자신이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재정립한다고 해도 진짜는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되는 걸까?’

    그레이스는 눈을 감았다.

    ‘내가 진짜 그레이스라고 생각하고 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해도…….’

    그 뒤에 이어질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

    검은 그림자가 여자를 쫓았다.

    진득하고 깊은 아귀 같은 것은 익숙하면서도 두려웠다. 아주 예전부터 알고 함께하던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할 수 있을 거 같았어?>

    <곧 실패할 거야.>

    <너는 늘 자만하다가 망가트리니까.>

    <그레이스, 알고 있잖아. 너는…….>

    다정한 척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렸다.

    아무리 달려도, 귀를 막아도, 그림자와 소리는 사방에서 달려든다.

    대체 이건 왜,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레이스가 아니야…….”

    나는 그레이스가 아니야, 나는 그레이스가 아니야, 나는 그레이스가 아니야.

    나는 그레이스 펠튼이 아니란 말이야.

    그녀가 흐느끼며 중얼거리자 소리는 다시금 작아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제발 아무나, 아무나 깨워 줘…….”

    이건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그레이스는 이런 악몽을 매일 꿨을까? 대체 그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미워했을까.

    이해할 수가 없다가도 그 괴로움과 슬픔이 마음속에 깊게 파고들어, 동화되었다.

    “으흑…… 윽.”

    바스락.

    눈을 감고 있는 그레이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이불을 꽉 잡아 흐트러지는 소리가 옅게 퍼진다.

    아침 해가 뜨며, 복도에서 조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자 그림자에 숨겨져 있던 검은 잔상이 흐릿하게 비쳤다.

    “…….”

    그레이스가 천천히 눈을 뜨자, 잔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작게 숨을 토하며 힘없이 손을 들어 식은땀을 훔쳤다.

    ‘무슨 꿈을 꾼 거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조금 우울하고 불편해진 마음만이 그레이스의 곁에 남았다.

    ‘몸이 무거워…….’

    식은땀에 푹 젖은 몸은 아침부터 축 처진 기분을 선사했다. 대체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는데, 악몽임은 확실했다.

    그레이스는 땀에 젖은 구불구불한 머리를 손으로 빗어넘겼다.

    ‘머리도…….’

    어제 침대에 누울 때까지만 해도 꽤 명쾌한 기분이 들었는데, 다시 뿌옇게 흐려졌다. 무엇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고, 불안함이 들며 걱정이 앞섰다.

    그레이스는 땀에 절어 끈적한 몸을 씻기 위해 설렁줄을 당기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맞은편에 있던 거울로 향했으며, 일순 고민했다.

    이 모든 건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

    하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이 또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것에 불쾌함과 초조함을 느꼈다. 바뀌어야 하는데, 나아가야 하는데도 또 제자리로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정신 차리자.’

    그레이스가 약해질 때면 또 우울이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 세계로 온 뒤로 정말로 마음 놓고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순간 따위 없었다. 그랬다가는 우울의 잔재에 파먹혔을 테니까.

    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며 설렁줄을 당겼다.

    지금 어떤 기분이던 간에,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

    “부인, 괜찮으십니까?”

    밖에 나와 벤치에 앉아 있는 그레이스를 향해 벤자민이 말을 걸어왔다.

    “……아.”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벤자민을 마주하니, 그레이스의 마음속에는 좀 더 깊은 불신과 원망이 솟아올랐다.

    ‘이상해.’

    이제까지 벤자민을 멀리하려고 했을 때 느낀 감정과는 달랐다. 본디 부정적인 감정은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지만, 이 경우는 좀 더 깊고 질척이며…… 누군가가 억지로 끼워 넣은 듯했다.

    “여전히 복통이 심한가요? 주치의라도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어제에 비교하면 딱히 아프지도 않았고, 조금 신경 쓰이는 수준이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괜찮다는 말에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치우지 못했다.

    그의 염려스러운 시선이 영 부담스러웠던 그레이스는 다른 주제로 넘기기로 했다.

    “그보다 지금 잡혀 있는 그 기자에 관한 처분 말인데요, 저는 역시 그냥 재판으로 넘기는 게 좋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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