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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9)화 (39/131)
  • 39화

    “나를 그리 보고 싶어 했다지?”

    “당신이 펠튼 공작 부인이라고요?”

    “그래.”

    톰은 수행인을 동행하지 않고 홀로 지하 감옥까지 온 그녀를 영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밖에 기사들을 대기시켜 놨으니 허튼짓하려고 하면 소리 지를 테니 그리 알고.”

    그레이스는 톰의 눈빛을 읽고는 그리 설명하며 철창 맞은편에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톰은 그레이스를 보며 그녀가 정말 ‘그 펠튼 공작 부인’인가 의심했다.

    ‘소문이 과장되었잖아.’

    무능하고 못생긴 데다가 뚱뚱한 공작 부인이라더니, 평범하게 생겼다. 평범하고, 그저 통통한 수준이었다.

    톰은 그레이스가 높은 지위에 있음에도 도통 사교회에 나오지 않아 그런 식으로 소문이 퍼졌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공작 부인이 그냥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보낸 건가?’

    차라리 그게 타당성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한 뒷소문은 좋은 게 없었다.

    그레이스가 톰의 의심을 뚝 끊어내듯,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에 대해서 조사한 건 다 읽어 보았네. 대단한 정성이더군.”

    “……먼저 제 죄를 묻기 위해서 온 겁니까?”

    “뭐,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레이스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죗값을 어떻게 받게 될 거 같은가?”

    그레이스가 톰에게 묻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신의 최후가 썩 좋지 않을 것을 예상한 듯했다.

    “아마 각하께서는 그대를 재판에 넘길 것이다.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게 맞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이 정치와 얽힌다면 문제가 커져서, 그대는 실제 죄목보다 큰 벌을 받게 되겠지.”

    그레이스와 벤자민은 현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혼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만약 황실에서 정말 둘의 이혼을 막고 싶은 상태라면 이 일을 좀 더 크게 키울 수도 있었다.

    ‘괜히 일을 더 키워서 불안하게 만들어, 가장 안전한 곳이 펠튼 공작가라고 느낀다면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마음을 바꿀 수 있으니까.’

    그리고 원래 주변에서 다른 일이 너무 몰아치면 이혼은 일단 미뤄 두고 다른 것부터 해결하자고 여길 수 있었다. 특히 그것이 자신의 신변에 연관되었을수록 말이다.

    “그럼 저는 사형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렇게 된다면 민심이 흔들릴 게 아닌가.”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이는 없으니까. 있다 해도 그 ‘공작 부인’이니까.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대에게 기회를 주겠네.”

    “기회요?”

    “그대의 가방 내용물을 보았어. 나에 대해 조사하려던 것 말고도, 꽤 수완이 좋은 편이더군…….”

    그레이스는 톡톡, 제 무릎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가족도 있고.”

    “협박하시는 겁니까?”

    “지금 내가 제안하는 기회를 잡으면 적어도 재판장에 들어가서 무기징역을 받지는 않을 거란 의미네.”

    “그것이 협박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래서 귀족이란. 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레이스는 그의 거만한 태도에 눈을 굴렸다.

    “……남의 외관을 비웃으며 돈벌이로 쓰려고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싶네만.”

    “…….”

    “그대의 인성이 아니라 능력을 믿고 기회를 주는 거야. 고아원을 턴 사람 중 하나가 버킨, 당신이란 것을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나?”

    “그건.”

    “제 가족이 소중한 줄 알면, 남의 가족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지.”

    “제 인성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회를 줄 수 있나요? 제가 언제 또 배신할 줄 알고요.”

    “그야 아까 말했지 않았나. 그대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고.”

    “협박은 하지 않는 거 아니었나요?”

    “그래, 그대가 기회를 잡는다면 버킨의 동생들은 안락한 환경에서 자라게 되겠지.”

    따뜻한 집, 배불리 먹고 옷을 물려입지 않아도 되며, 새 책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이제껏 먹어 본 적 없는 맛있는 음식, 갖고 싶은 장난감 또한 가질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톰의 눈이 흔들렸다.

    “그 안락을 알면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쉽지 않아.”

    “그러다가 제가 다른 좋은 제안을 받아 배신하는 건 두렵지 않고요……?”

    “그대가 진짜 배신할 것이었다면 그 질문을 나에게 지금 하지 않았겠지.”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작은 쪽지를 건넸다.

    “톰 버킨, 수첩만 봐도 알겠더군. 당신은 머리가 좋아. 그러니까, 그대는 배신을 하지 않아.”

    그는 그레이스가 건넨 쪽지에 적힌 내용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대 같은 사람이 배신한 사냥개의 최후가 어떤지 모를 리가 없지 않는가. 차라리 배신한 척하고 이중첩자 노릇을 하는 게 이득이지.”

    ‘무능하다는 것도 헛소문이 분명해.’

    톰 버킨은 그레이스에게 따라붙는 소문 중 옳은 게 있기는 한가 의구심이 일었다.

    설령 제 앞에 있는 사람이 펠튼 공작 부인의 대역이라고 할지라도, 그녀가 고른 대역이 이 정도라면 그녀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침을 삼키며 쪽지를 꽉 쥐었다.

    ⋆★⋆

    ‘드, 들켰을까?’

    한편, 그레이스의 속은 바짝바짝 말라 갔다.

    그녀는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고압적인 척하고 있었으나 사실 그런 여유 하등 없었다.

    그레이스는 어둠 속에서 톰 버킨의 표정을 살피며 아직 주도권을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그레이스가 톰 버킨의 가방을 살펴 그간 취재한 내용물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이거다!’ 싶었다.

    정보상이 이 세계에 없으면 그녀에게 정보를 구해다 줄 정보상을 만들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레이스는 그의 소지품을 통해 손쉽게 알아냈으며, 톰 버킨은 가족을 위해 제가 좇던 이상을 버렸지만 머리가 좋았다.

    ‘제대로 보수만 준다면 누군가가 배신을 제안해도 하지 않을 거란 거지. 배신자나 이중 첩자의 말로를 모를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레이스는 힐끗 문으로 향하는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누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사실 공작가의 사람들이 그레이스 혼자 톰 버킨을 독대하는 일을 허가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가문 내에서 어떤 위치이건 간에 톰 버킨은 그녀를 위협한 범죄자였다. 그레이스가 아무리 부탁해도 벤자민이 허가할 리가 없으니, 그레이스가 톰 버킨에게 한 말은 거짓이었다.

    고위 귀족의 저택에는 숨겨진 통로가 여럿 있다. 역사가 오래되었을수록 그러하며, 펠튼 공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그걸 내가, 그레이스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레이스의 머릿속에도 그 정보가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선명하게.

    그 덕에 그레이스는 별관에서부터 지하 감옥까지 모두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숨어 들어올 수 있었다.

    톰 버킨에게는 그 사실을 밝혀서 좋을 건 없었다. 이 모든 건 공작가의 허가와 의지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이미 속은 타들어 가 죽을 거 같았다.

    ‘내가 건넨 정보는 꽤 쓸 만해.’

    톰 버킨의 마음은 이미 그레이스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그레이스가 그에게 건넨 쪽지에는 한 가지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과 발이 될 각오를 만들어 줄 만한 정보가.

    톰 버킨은 쪽지의 내용을 외우려는 듯 꼼꼼히 읽고는 꼭꼭 접어 입 속에 넣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됩니까?”

    ‘됐다!’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지려는 것을 참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머릿속을 어지르는 부정적인 소리를 향해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봤어? 봤냐고!

    나는 그레이스 펠튼과 달라, 뭔가 할 수 있다고, 라고.

    “당신에게 있는 좋지 않은 소문의 배후를 캐는 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소문이란 건…….”

    “그걸 부탁하려는 게 아니네만.”

    “네?”

    당연히 그걸 부탁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톰 버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일단 표정을 감추는 방법부터 배워야겠군. 재판 후에 그대가 할 일이 많아질 테니까. 이제까지는 거의 혼자 일을 했으니 숨기고 다닐 필요가 없었겠지만…… 암호를 만드는 것도 좋겠어.”

    그레이스는 할 일이 많으니 가장 중요한 것부터 진행하자며 말을 잘랐다.

    “재판을 진행하고 나면, 그대는 실제로 받아야 하는 죗값보다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거야. 지금 시기가 좋지 않거든.”

    하필이면 지금 벤자민과 그레이스가 이혼을 준비 중이고, 서부의 오염에 대한 보고가 조만간 황실에 올라갈 것이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엔 그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황실은 그레이스와 벤자민을 이혼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펠튼 공작의 기를 누르기에는 이만한 사건이 없다고 판단할 테니까.’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은 공작 부인에게 추문이 붙어 봤자 공작가에 득이 될 게 없었다.

    ‘하지만 톰 버킨이 정보만 제대로 이용한다면, 한 달 이내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그레이스는 그가 처음부터 무죄를 받게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가 정말 무고한 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실의 감옥에서는 매주 죄인을 위한 사제들이 찾아온다고 하지. 찾아오는 사제들의 직급은 매번 다르지만, 회개든 고해든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자유라고 들었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잘 활용해 보도록 해.”

    “…….”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말하고, 이제 그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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