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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8)화 (38/131)
  • 38화

    ‘그자는 분명 공작과 있었지.’

    고아원의 원장을 꼬드겨 내부를 조사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바로 그다음 날에 그들이 방문할 줄은 몰랐다.

    톰은 혀를 쯧 차며 망원경으로 공작저 뒷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즘 외출을 불규칙적으로 해서 몇 시에 할지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도 상식적으로 너무 늦은 밤에는 나오지 않을 테니 슬슬 오늘은 철수할까, 톰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어?”

    군청색의 망토를 입은 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가는 게 보였다.

    ‘뭐야?’

    톰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뛰기 시작했다.

    ‘호위도 없는 거 같은데?’

    밤이라서 호위가 안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톰은 머뭇거리다가 가지고 있던 소형 폭죽을 그녀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타앙!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여인이 쓰러졌지만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저렇게 크게 터질 줄은 몰랐기에, 톰은 당황과 동시에 미약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죄책감이 돈을 벌어 주지는 않았다.

    인간적인 마음은 너무나도 무거워, 이고 가기에는 크나큰 짐이었다.

    한때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들고 있었기에 수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빠르게 앞서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였다.

    “진짜 없나?”

    그는 망원경을 주머니에 넣으며, 소형 기록 마도구를 꺼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제발 얼굴 좀 보여 주시지.’

    그는 돈이 필요했다. 정말로.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공작 부인의 민낯이 필요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는 특종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그 작은 죄책감 때문인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여인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절뚝거리며 골목길로 들어갔다. 노련한 기자였던 톰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암시장 쪽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평소였다면 경계했겠지만 아주 오랜 기간 잠복한 끝에 큰 건을 잡았다는 흥분감에 도취한 톰은 경계하지 않고 바로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가 골목에 들어가 길을 꺾자마자 날카로운 검이 그의 목을 겨냥했다.

    “신분.”

    “……!”

    연두색 브로치가 달린 망토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가 드러났다. 그레이스가 아닌 강인하게 생긴 여성이 그에게 검을 겨냥한 채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누, 누구……?!”

    “펠튼 공작가 제2 기사단 부단장, 로젤리아 반트린이다. 당신을 펠튼 공작 부인을 위협한 죄로 지금 연행하겠다.”

    ⋆★⋆

    “지금쯤 잡혔을까?”

    별관에 들어가기 싫었던 그레이스가 정원 바깥에 앉아 샐리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그럴 거예요. 로젤리아 부단장은 대단하거든요!”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기사니까 이런 걱정 자체가 무례한 걸까? 그레이스가 중얼거리며 밤 풍경을 구경했다.

    ‘날씨 좋네.’

    요즘은 날이 많이 덥지 않고 선선했지만, 망토를 걸칠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레흐턴의 털로 만든 망토였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다닐 수 있었다.

    남들과 다른 이질적인 복장을 계속 바꾸지 않고 하고 다니면 눈에 익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외모는 감출 수 있다 해도 복장은 인식이 되니까.’

    그게 그 마도구의 맹점이라면 맹점이었다. 원작에서도 실베스터는 망토로 아리아를 찾아냈었다.

    그레이스가 뒤로 등을 기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

    “로젤리아 반트린, 제2 기사단의 부단장. 명을 무사히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네.”

    로젤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그레이스에게 망토를 돌려주었다. 그녀의 태도는 과하게 예우를 차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이것이 로젤리아가 생각하는 기사의 명예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가 마님의 망토를 한 번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 아니네.”

    그레이스는 말투를 어떻게 통일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며 그녀가 건네는 망토를 받았다.

    “저를 믿고 빌려주신 것일 텐데…… 이는 벌을 내려 마땅하신 것입니다.”

    “고작 망토를 떨어트린 것인데 뭐.”

    “하지만 주군께서 마님을 위해 손수 준비하신 것 아닙니까?”

    “옷이야 세탁하면 되는 것이고, 그대가 다치지 않고 내가 부탁한 일을 무사히 수행하고 왔으니 되었어.”

    “……그리고 또.”

    “음?”

    로젤리아는 낡은 가방을 그레이스에게 건넸다.

    “공작저 지하 감옥에 수감된 톰 버킨이라는 기자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입니다. 내용물을 자세히 보지는 않았으나 마도 폭탄 같은 물건이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고맙네?”

    그레이스는 로젤리아가 건네는 가방을 받으며 왜 이걸 벤자민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인가 궁금했다.

    “아닙니다. 마님께서 내린 명이니, 당연히 마님께 보고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

    로젤리아는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결례임을 알지만 먼저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떠났다.

    그레이스는 멍하니 로젤리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히 머, 멋있구나, 반트린 경은.”

    “그렇죠? 멋있죠?”

    샐리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그레이스의 말에 긍정했다.

    “제국에 별로 없는 여기사 중에서도 반트린 경은 손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분이시죠.”

    “그래 보여.”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냥 말하는 태도나 모습 자체에서 허점이 없어 보였다. 그레이스는 조금 전까지 마주했던 로젤리아를 떠올리며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사람에게 이런 일을 맡겨도 되는 거였을까?”

    “영광이라고 생각했을걸요?”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야 부기사단장이나 되는 사람인걸.’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던 일이었다. 혹시 성별로 인한 차별 같은 게 알게 모르게 적용되어서 구박을 받은 게 아닐까.

    그레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또 부정적인 생각에 빠졌다.

    “……이런 쓸데없는 일을 맡았다고 말이야.”

    “마님의 일인데 어떻게 쓸데없는 일인가요! 마님의 안전에 직결된 일이잖아요. 그리고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어떻게 주인의 명령을 귀찮다고 생각하겠어요? 그것이야말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에요.”

    샐리는 제 가슴께를 주먹으로 탕탕 두드렸다.

    “마님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이 공작가에 없어요. 걱정 마세요.”

    “……그래.”

    그레이스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대체 귓속에서 메아리치는 이 불안은 무엇일까.

    <인사치레로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되지.>

    <너는 운이 좋아서 공작 부인이 된 거잖아.>

    <너 말고 더 능력이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가치 있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벌써 몇 번째 민폐야?>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저 강인해 보이는 기사가 멋있어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어떤 소리를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여서.

    ⋆★⋆

    톰 버킨은 한때 꽤 총명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정의감이 있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난했다.

    그리고 정의감이 있는 것에 비해 유약하고,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올곧은 길만 걸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는 그러질 못한 사람이었다.

    인생도 연극이나 책처럼 가장 큰 고난을 해결하고 나면 행복하게 끝나면 좋았으련만, 어떤 비극적인 일이든 즐거운 일이 지나가도 삶은 이어졌다.

    그리고 치열하고, 질척거리고, 진부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가 쓴 기사는 늘 돈이 되지 않았다.

    톰이 아무리 비열한 세상에 대해 고발해도 묻히기 일쑤였다. 그는 문젯거리였으며, 한 번은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도 있었다.

    차라리 본인의 목숨을 위협받았더라면 악에 받쳐 더욱 매달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가 협박받은 것은 자신의 목이 아니라 가족의 것이었다.

    어린 동생들의 목숨. 이 세상이 그렇게 썩은 줄 모르는 어린 것들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됐다.

    아니, 그들이 어떤 아이들이라고 해도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니었다.

    톰의 영혼과 눈은 그 후로 빛을 잃었다.

    “…….”

    아마 이 또한 전부 변명일 것이다.

    그와 비슷한 삶을 산 누군가는 톰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테니까.

    톰은 차가운 감옥 바닥에 나앉은 채 자신의 최후를 가늠하고 있었다.

    보통 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정석적이고 깔끔한 최후가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선처는 바라지도 않았다. 죽을 거면 차라리 조롱도 받지 않고 한 번에 죽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건수를 잡아 크게 한탕 하려고 했던 것이 자신이다.

    펠튼 공작이 얼마나 공작 부인과 사이좋은지는 몰라도, 유일한 가족이니 유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톰이 자신의 최후에 대해 한 20가지 정도 예상하고 있을 때쯤, 멀리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분의 걸음 소리?’

    톰은 그 소리가 기사나 하녀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챘다. 드레스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들어 보아 여성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올 사람이 누가 있지?’

    작은 빛이 멀리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림자의 실루엣이 길게 늘어져 누군지 가늠하기 어렵다.

    애초에 펠튼 공작저에는 톰이 아는 사람이 딱히 없었기에 유추할 수도 없었다.

    “……!”

    이윽고, 제 앞에 선 자를 본 톰은 눈을 크게 떴다. 촛대를 든 그레이스는 감옥에 홀로 앉아 있는 톰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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