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7)화 (37/131)
  • 37화

    “베니.”

    벤자민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아이들의 ‘나무 기지’ 계획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작게 벤자민을 부르자,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바라보았다.

    “부인, 저를 구해 주러 오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어딘가에 붙잡혀 있던 거 같잖아요.”

    아이들이 악독한 무리도 아니고. 그레이스가 덧붙이자 벤자민이 그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이들을 악한 이로 만들 뻔했군요. 제 잘못입니다.”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지금 제가 수습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이건 저 혼자서는 위험할 거 같아서요.”

    그레이스는 혼자 행동했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지 알고 있었기에 일단 벤자민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어차피 무슨 일이 터지면 벤자민의 귀에 들어가는 건 정해져 있었으니, 처음부터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게 나았다.

    “수습 말입니까?”

    벤자민은 되물었다가 ‘아’ 하며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끄덕였다.

    “일단 아이들이 들을 대화는 아닌 거 같으니, 돌아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요.”

    “다른 곳도 오늘 둘러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아닙니다. 부인께서 오늘 몸 상태도 안 좋지 않습니까. 오늘 사람이 많은 곳을 갔다가 쓰러질까 걱정입니다.”

    벤자민이 말끔한 낯으로 그레이스에게 걱정을 말했다.

    “이 정도로는…….”

    이 정도로는 안 쓰러진다고 말하려고 했던 그레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저번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쓰러져 버린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할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께서 쓰러질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니까요.”

    그레이스가 조심하겠다는 말에 벤자민이 웃었다.

    ⋆★⋆

    오늘은 차나 커피 대신 허브티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입가심용으로 수분감 있는 과일 몇 조각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커피가 마시고 싶었으나 벤자민은 그녀의 취향을 알면서도 허브티를 내오라고 단호하게 명했다.

    “일단은, 저는 확실히 고아원의 일에서 손을 떼야겠어요.”

    그레이스가 마음속으로 정한 가장 중요한 결론을 벤자민에게 말했다. 벤자민은 깜짝 놀라 물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걸 즐거워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 범인을 잡는다 해서 똑같은 일이 없을 거라곤 못 하겠어서요. 그리고 저흰 지금 이혼 유예 기간이잖아요.”

    “……그랬죠.”

    벤자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저 베일에 싸인 공작 부인에 대해 알아보려는 무리일지라도, 만약 벤자민과 그레이스가 이혼을 고려 중인 관계라는 게 알려지면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질 낮은 기사가 나올 수 있었다.

    “누군가 낌새를 맡고 정보를 모으는 중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을 이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약하고 만만한 쪽이었다.

    ‘모든 기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레이스는 찻잔을 손톱으로 갉작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기자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아니, 잡을 방법은 이미 대강 머릿속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부인께서는 기자가 고아원 내부에 잠입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네.”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벤자민은 영 탐탁지 않아 했다.

    “당신의 말도 맞습니다만…… 그러면 기자 외에도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겠군요.”

    “다른 사람 한 명 더요?”

    “작업실 내부는 잠겨 있지 않습니까. 고아원 내부는 여성과 아이들뿐입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만큼 보안을 철저히 하는 이들이라, 문을 여러 번 잠그더군요. 한두 개쯤이야 열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차라리 부수고 들어가는 게 효율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크게 털어갈 예정이었다면요. 벤자민이 덧붙였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아직 티백 사업이 그리 번창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몇 군데의 식당에서 거래를 트기 시작했지, 유행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 그렇죠?”

    벤자민의 타당한 말에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의 북부령 쪽 군사 물품 지원으로 인해 곧 큰 흑자가 날 예정이지만, 아직 대중들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계속 궁금했는데,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벤자민이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원 원장 말입니다.”

    “……아!”

    그레이스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원장’이라는 단어에 돈을 들고 도망쳤다는 원장이라는 작자가 떠올랐다.

    “아마 기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부인의 행선지를 알아내었고 고아원에 접근할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입니다. 고아원 내부의 사람들을 꼬드길 방법은 없으니, 외부에 있는 원장을 떠올린 거겠죠.”

    “그 사람이라면 고아원의 원본 열쇠도 갖고 있었을 법하기는 하네요…….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건 신기하지만요. 하지만 도난당한 돈은 없지 않았나요?”

    “클레타 던이 말하기를, 그녀는 돈을 침실에 있는 옷장 서랍에 보관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는 건 원래는 그 장소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죠.”

    돈이 도난당하지 않은 이유는 클레타가 기존 고아원 원장이 사용하던 금고나 그 당시 사용하던 집무실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자의 경우, 원장에게 접근해 해당 고아원이 ‘어느 높은 분’의 눈에 들어 큰돈을 벌게 되었다며 도우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범인은 잡고 나서 물어보는 게 확실하지만 말입니다.”

    경비대에 순찰을 요청한 상태니 기자는 한동안 고아원 근처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근시일 내에 내부를 또 둘러볼 예정이었다면 작업실 내부를 그렇게 어지럽혀 놓고 나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대놓고 좀도둑인 척 시늉한 것인데, 이는 더 이상 고아원 내부를 조사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치안대까지 불러 보안을 강화했으니 한동안 몸을 사리겠죠?”

    “예. 기자들은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빠르니, 괜히 지금 기사들을 풀어 잡게 해 봤자 달아날 겁니다. 애초에 우리는 그 기자의 얼굴을 모르니까요.”

    “일단 아저씨라고 했는데…….”

    그레이스가 작게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제 입가를 매만지며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던 그레이스가 말했다.

    “제가 밤에 혼자 나가는 건요?”

    “안 됩니다.”

    벤자민은 무슨 끔찍하고 말도 안 되며 극악무도한 소리를 들은 사람의 표정으로 즉답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또 강조했다.

    “아니…….”

    “부인께서는 쓰러지신 지 한 달도 되지 않으셨는데 벌써 또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 쓰러지신 적이 없어도 그런 일은 하면 안 됩니다.”

    벤자민은 매우 단호한 어조로 그레이스가 말을 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그레이스의 말을 끊은 적은 없었던지라 그레이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제, 제가 하는 말을 들으면 납득하실 거예요!”

    “부인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건 무슨 이유를 들어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제가 위험해지는 게 아니니까요.”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는 말에 한쪽 눈썹을 씰룩 올리며 물었다.

    “부인께서 위험해지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 순식간에 표정이 온순해지며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그레이스의 말을 들을 준비를 했다.

    순식간에 단호함이 사라지고 한 마리의 의젓한 강아지처럼 순해진 벤자민을 보며 그레이스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미, 믿어 주시는 건가요?”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부인이 위험하지 않은 계획이라고 했는데, 듣지도 않고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감사합니다……?”

    “물론 판단은 듣고 난 뒤에 하겠습니다. 오판으로 인해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요.”

    벤자민이 앞에 놓인 다 식은 허브티를 들이켰다.

    ⋆★⋆

    야심한 밤.

    순간 기록 마도구를 품에 낀 사내는 두통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허탕인가.”

    그레이스 펠튼.

    그러니까, 펠튼 공작 부인은 특이한 존재였다.

    존재감이 없는 듯하면서도 은근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존재였다. 대외 활동이 없어 신문에는 거의 실리지 않지만, 알음알음 도는 소문은 도통 좋은 이야기가 없었다.

    ‘실린다고 해도 귀족들은 거의 접할 일 없는 삼류 잡지에나 언급되고는 하지.’

    그리고 그 잡지를 귀족가의 하녀들이 사 가고는 했다.

    이는 귀족들이 아닌 척하면서 몰래 사 읽는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제국에 있는 여러 신문사는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해 대놓고 취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한 명의 기자, 톰 버킨은 생각이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정이 달랐다.

    ‘……그 사람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나는 돈이 필요해.’

    떠도는 소문에 비해 확실하게 알려진 게 지나치게 없었다. 심지어 얼굴조차. 린덴 자작이 운영하는 영지에 대해 조사해 봤지만 거기서도 그녀에 대한 특징은 별로 없었다.

    유년 시절이 조금 불우했다는 정도뿐이었다.

    그래서 톰은 프리랜서 기자로 뛰면서 긁어모은 돈으로 비싼 고급 망원경과 그보다 더 비싼 소형 순간 기록 마도구도 구매했다.

    저 멀리서 매일 공작가의 출입구를 관찰하며 며칠째 허탕 치던 톰 버킨은 어느 날 ‘황실 마차’가 방문한 것을 목격하고 공작저의 이변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동안 공작저를 들락날락한 이들의 외적 특징을 분석한 그는 그중 ‘한 명’의 위화감을 분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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