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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6)화 (36/131)
  • 36화

    “……?”

    “아무튼, 부인께서는 밖에서 바람이라도 쐬시며 앉아 계십시오. 제가 따로 가볍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벤자민이 활짝 웃으며, 그레이스를 바깥쪽으로 안내했다.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거의 내쫓기다시피 고아원의 정원 쪽으로 나가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그레이스를 반겼다.

    작은 아이들에게 금방 둘러싸인 그레이스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벤자민은 고개를 돌려 클레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클레타 던이라고 하셨죠.”

    “아, 네. 저도 린덴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일단 저도 내부를 둘러보겠습니다. 혹시 금고는 확인하셨습니까?”

    “그게 이상해요. 만약 돈이 목적이라면 금고를 털어갔을 텐데, 돈을 건든 흔적은 없어요. 금고를 찾지 못한 걸까요……?”

    “금고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저는 침실 옷장 맨 아래 서랍을 쓰고 있어요.”

    “그러시군요. 저에게 말했으니, 만약을 위해 다음번에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벤자민은 클레타에게 대충 조언한 뒤, 다른 이들이 정리한 품목을 살폈다.

    ‘개수에 큰 차이는 없어 보이고.’

    만약 품목의 수에 차이가 있었다면 이미 이 내부에 있는 이들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벤자민에게 설명하는 클레타도, 내부의 소란을 정리하는 이들도 혼란은 다소 남았어도 ‘도난’에 대한 동요는 없었다.

    ‘망가진 품목은 있어도 직접적으로 도난당한 게 없다는 건데…….’

    벤자민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입가를 매만졌다.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큰일이 터지면 부인께서는 또 자책하고, 잘못하면 별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시겠지.’

    그것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그레이스가 별관을 나서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냥 사병을 들여 한동안 고아원 주변을 지키게 하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임을 벤자민은 알고 있었음에도 부러 쓰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레이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벤자민은 더 이상 ‘기회’를 잡을 자신이 없었다.

    “……젠장.”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평소보다 거친 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지금보다 젊을 적에 하던 입버릇이었다.

    “아.”

    벤자민은 깜짝 놀라며 입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는 힐끔 옆에 있던 클레타를 보았다. 클레타는 동그란 눈으로 벤자민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들었나?’

    그레이스는 클레타와 친구가 아니라고 했지만, 방금 소란 속에서 그레이스를 반기는 클레타의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친구처럼 보였다.

    벤자민은 그녀를 의식해 다시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클레타에게 말했다.

    “최대한,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넵.”

    역시 들었나. 벤자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끙, 앓는 소리를 내고는 클레타에게 물었다.

    “작업장도 밤에는 잠급니까?”

    “네. 도둑이 들 위험도 있고, 재봉틀이 있으니 아이들에게 위험하니까요.”

    “그러면…….”

    벤자민은 딱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사실, 이런 짓을 할 만한 이는 딱 정해져 있었다.

    ‘이제까지 들은 말로만 미루어 봐도 그 사람 외에는 없지.’

    하지만 그가 생각한 범인치고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벽에 붙어 있는 진행 사항 표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은 치안대에 제가 따로 일러두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하는 것보다는 더 단단히 보호해 줄 것입니다.”

    일단은 그레이스에게 가 안심하라고 말하는 게 벤자민의 우선순위였다.

    ⋆★⋆

    “아줌마, 요즘 왜 자주 안 와요?”

    “응? 자주 오면 좋겠니?”

    “응. 자주 왔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그레이스의 손을 죽죽 잡아당겼다.

    자기들끼리 한데 모여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좋은 자리라며 그레이스에게 풀이 무성히 자란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레이스는 아이들이 양보해 준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요즘은 이러고 성 쌓고 놀고 있었니?”

    “응? 으응.”

    그레이스가 다정하게 묻자, 아이들의 대답에서 껄끄러움이 묻어나왔다. 그레이스는 그를 알아채고 되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니…….”

    아이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공유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누가 봐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지만, 채근한다 해서 말할 거 같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한 명한테만 몰래 물어보는 게 나은데.’

    하지만 지금 당장 그레이스가 한 명을 대놓고 데려가면 그 아이가 따돌림을 당할 수 있었다.

    ‘모두가 눈치를 본다는 건, 모두가 같은 일을 겪고 일종의 약속 같은 걸 했다는 건데…….’

    그레이스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아이들의 소꿉놀이에 열심히 장단 맞춰 주었다.

    그레이스의 손과 망토가 흙투성이가 되었을 즘, 조사를 끝낸 벤자민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부인, 저 왔습니다.”

    “빨리 오셨네요.”

    “예. 크게 도난당한 게 없어서 말입니다. 일단은 치안대에 연락하여, 주변의 정찰을 강화하라 연락하겠습니다.”

    벤자민이 오자 그레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스의 망토에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것을 본 벤자민이 자연스럽게 흙을 탁탁 털어냈다.

    벤자민이 그레이스의 옆에 와 멀뚱멀뚱 서자 아이들은 금세 그레이스가 아니라 벤자민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지난번에 상대해 준 적이 있건만, 그가 착용한 마도구 탓에 그임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그레이스를 붙잡고 놀아 달라 했던 아이들은 우르르 벤자민에게 달라붙었다.

    “아저씨! 린덴 아줌마랑 무슨 사이에요? 둘이 사귀어요?”

    “사…….”

    벤자민은 둘이 사귀냐는 질문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부부란다. 결혼한 거야.”

    “우와. 그럼 아이는요? 부부면 아이도 있어요?”

    “……아이는 없지.”

    “에이.”

    그러다가도 아이들은 우리는 아빠가 없으니 그럴 수 있다며 까르르 웃었다. 그레이스는 순수함의 두려움을 목도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벤자민에게 매달린 아이들은 높이 들어 달라거나, 나무에 올려 달라고 떼를 썼다. 지난번에 왔던 아저씨는 위험하다며 나무에 올려 주지 않았다며 이르는 것은 덤이었다.

    그 아저씨와 동일 인물인 벤자민이 난처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레이스도 신이 난 아이들을 말릴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요.”

    그레이스가 조금만 아이들을 상대해 달라며 벤자민에게 부탁했다. 그레이스의 부탁에 벤자민은 결국 고개를 돌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고아원에 있는 가장 높은 나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아줌마.”

    그때, 한 아이가 그레이스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축제 뒤풀이 때 그레이스의 주근깨를 보고 예쁘다고 한 아이였다.

    “응? 너는 안 따라가니?”

    아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레이스의 망토를 죽 잡아당겨 고아원 안쪽으로 끌고 갔다. 그레이스를 데리고 간 곳은 아이들 침실 구석이었다.

    침대 옆 구석 자리까지 가 쪼그려 앉은 아이가 그레이스에게 속삭였다.

    “있잖아요. 이건 진짜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애들이 고아원 어른들한테 말하지 말랬거든요. 알았죠?”

    그레이스는 아이가 연신 신신당부하는 걸 듣다 물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말해도 되는 거니?”

    “……아줌마는 고아원 어른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말했다는 거 말할 거예요?”

    “아니.”

    “내가 말하면, 막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음, 아니?”

    “응. 그러니까 말하는 거예요. 아줌마는 내 엄마는 못 찾아줬지만, 내 친구들의 엄마는 데려와 준 좋은 사람이니까요…….”

    아이가 양손을 깍지 껴 꼼지락거리며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이상한 아저씨가 와서, 아줌마에 대해 물어봤어요.”

    “……응?”

    그레이스는 눈을 깜빡, 하며 아이의 말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나에 대해?’

    “그래서 일단 우리는 전부 모른다고 했어요. 가끔 오기는 하는데 아줌마에 대해서는 모른다고요. 근데 그 아저씨가 다른 언니 오빠들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자기에 대해서 고아원에 있는 어른들에게 말하면, 우리 전부 뿔뿔이 헤어지게 할 거라고 했어요.”

    ‘내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내 뒤를 캐고 있는 거야.’

    그레이스의 뒤를 캐려는 기자가 있다는 건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벤자민이 그레이스의 외관적 특징을 인식할 수 없는 마도구를 그녀에게 선물해 주었다.

    “……아.”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깨달았다.

    ‘그렇게 알아낸 거구나.’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레이스의 외관 특징을 인식하지 못해도, 특정할 수 있는 방법이.

    그레이스는 일단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감사를 표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말하기를 잘한 거예요?”

    “그럼.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는걸.”

    그레이스가 새끼손가락을 아이에게 내밀어 보였다.

    “약속할게. 절대로 네가 말했다는 걸 알리지 않을게. 네가 용기를 내주었으니까, 아줌마도 너를 지켜 줄게.”

    “……응.”

    그레이스가 쭈그린 몸을 일으켰다. 잔뜩 굽어 있던 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 아프다.’

    온몸이 미약한 근육통을 호소하는데, 거기에 조금 전의 신경성 복통까지 합세하니 죽을 맛이었다.

    ‘지금도 근처에 잠복하고 있으려나.’

    그레이스는 제 복부를 매만지며 ‘범인’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했다.

    일단 다시 밖으로 나가 벤자민이 있을 곳으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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