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5)화 (35/131)

35화

“조, 사요?”

“조사…… 인가?”

데이트라고 하기에는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이제까지 보고받은 장소들을 같이 가 보고 싶다.’라고만 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이제까지 가 본 곳을 떠올렸다.

고아원, 공방, 시장, 게이트 관리국.

‘게이트 관리국은 가지 않는다 치고.’

나머지 세 곳은 데이트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각하께서 내가 이제까지 가 본 곳을 확인차 가 보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조사가 아닐까…….”

그레이스의 대답에 샐리의 낯이 미묘하게 침침해졌다.

그레이스는 ‘조사’라고 말했으나, 별관의 사용인들은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부인, 오셨습니까?”

“또 기다리고 계셨어요?”

“예, 오늘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그레이스와의 외출을 위해 오늘치의 일까지 새벽에 몰아 전부 끝내 놓고, 혹시 오늘 약속이 취소될라 10분 먼저 도착해 별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벤자민을 보고 있노라면…….

‘데이트네…….’

‘완전 데이트지…….’

‘이혼은 무슨…….’

이건 영락없는 데이트였다.

“일이 별로 없었나요?”

그레이스는 시간을 봤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벤자민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유능한 부관을 두어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의 보좌관인 아벨이 들으면 비명을 지를 소리였다.

벤자민은 그 특유의 다정하고 선량한 미소로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별관의 사용인 모두 벤자민의 미소를 보며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스만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하긴 소설 속에서도 아리아의 곁에 자주 나타났으니까.’

속아 넘어간 사유는 소설에서 등장한 벤자민의 빈도 때문이었지, 그의 선량하고 다정한 미소 때문은 아니었다.

벤자민의 가슴팍에는 낡은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것이 벤자민이 저번에 말한 마도구라는 것을 깨닫고 금방 관심을 거두었다.

그레이스가 망토를 제대로 두른 것을 확인한 벤자민은 먼저 밖으로 나섰다. 거리를 거닐 때쯤, 벤자민은 가슴팍에 있는 브로치를 계속 매만졌다.

그의 옆에 나란히 걷던 그레이스가 그의 반복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 좀 오래된 거라서 말입니다. 핀이 말썽입니다.”

벤자민은 이것 보라며 브로치를 손바닥에 올려 그레이스에게 보여 주었다. 핀의 이음새가 헐거워 보였다.

“꽤 오래된 건가 봐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양해를 구하고 브로치를 가져가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망토에 달린 것에 비해 오래되어 보였다.

“으음…….”

그레이스는 고민하다가 머리에 묶여 있던 장식 리본을 풀어 브로치를 벤자민의 타이에 장식인 양 묶어 주었다.

“이러면 될까요? 좀 더 단단하게 묶는 게 좋을까요?”

그레이스가 리본을 묶는 동안 빳빳하게 긴장했던 벤자민은 그녀가 떨어지자 브로치와 타이를 잇고 있는 리본 매듭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처럼 매만졌다.

“절대로 풀지 않겠습니다…….”

“아뇨, 집에서 환복하실 때는 벗으셔야죠…….”

“매듭을 풀지 않고 벗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이런 발언에는 대체 무어라고 대꾸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입만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마,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면.”

“하하.”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약간 새초롬한 대답도 좋은지 실실 웃으며 그녀의 걸음을 쫓았다. 그레이스는 벤자민보다 한참 작아, 그녀의 걸음을 따라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상해.’

그레이스는 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벤자민을 고아원 쪽으로 안내했다.

“여기는 아시죠?”

“축제 때 왔었죠. 기억합니다. 여기서는 여전히 린덴으로 불립니까?”

“린덴은 제도에선 딱히 유명하지 않으니까요.”

벤자민도 그레이스의 말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린덴 자작가는 유서 깊기는 했으나, 유명하지 않았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어라, 그런 가문이 있었어? 어라? 생각보다 역사가 깊은 가문이잖아?’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펠튼이라고 하면 바로 다들 눈도 못 마주칠걸요.”

어쩌면 예전에 말 나온 대로 ‘그 무능한?’이라며 은근슬쩍 흘겨볼지도 모르고.

그레이스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고아원에 있는 이들이 자신을 그리 보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다른 곳에서 떠돌 자신에 대한 안 좋은 평을 떠올리니 마음속에 또 우울함이 피어올랐다.

“부인, 부인, 저쪽에 건물이 보입니다. 선물을 사 갈 필요는 없을까요?”

벤자민의 목소리가 그레이스의 우울을 끊어냈다.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들떠 보였다.

“선물이요?”

“예, 부인의 친우분을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요. 좋은 인상을 주고 싶습니다.”

‘친우?’

다른 말로 친구라고도 했다.

그레이스는 생소하다면 생소할 그 단어에 멍하니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분들은 제 친구가 아니라서요.”

그레이스가 고아원을 가는 걸 좋아했던 건 그저 그 장소가 별관이나 공작저에 비해 숨쉬기 편안하고, 지내기 좋아서였다.

그리고 클레타도 다른 이들도 좋았지만, 그들이 그레이스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친구는 아니고…… 그냥 지인? 정도인 거 같아요.”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단호하다면 단호하다고 할 수 있는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지만, 별다른 말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부인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네.”

“하지만 선물은 사 가야겠습니다. 지인에게도 잘 보여서 나쁜 건 없으니까요.”

결국 벤자민은 고아원에 가기 전 근처에 있는 꽃가게에서 큼지막한 꽃다발을 사고 나서야 만족한 눈치였다.

그레이스는 그가 꽃다발을 든 모습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그에게 또 뾰족한 말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몸에 근육통이 남아 있었기에 부정적인 생각까지 더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최대한 좋은 생각, 그리고 약에 대해 어떻게 조사할지 생각이나 하자.’

그래도 외출 허가를 받았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레이스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고아원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는 도무지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리, 린덴 씨!”

“……던? 이게, 무슨 일이에요?”

“도, 도둑이 든 거 같아요.”

막무가내로 어질러진 작업실 내부는 당장 일을 시작하기 어려워 보였다.

재료인 모슬린은 전부 헤집어졌고 홍차 잎을 담아 둔 자루가 죄 터져 있었다. 다들 당장 쓸 수 있는 물건과 쓸 수 없는 물건을 분류하느라 바빴다.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사건에 그레이스는 배가 아파졌다.

그레이스는 아파 오는 배를 붙잡고 엉망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돈을 훔치려고……?’

그레이스는 고아원의 외관을 떠올렸다. 아주 낡디낡은 모습이었다.

단순히 돈이 목적이라면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벤자민이 군용물품으로 티백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직 계약에 대한 이야기도 시작하지 않았어. 큰돈이 오갔다는 소문은 돌지 않았을 텐데?’

“음, 혹시 최근, 이 주변에 이상한 이가 없었습니까?”

그레이스가 어두워진 낯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벤자민이 클레타에게 물었다.

“……이상한 사람이요?”

“네. 아, 저는 벤자민 린덴이라고 합니다. 그레이스 린덴의 남편이요. 가면 축제 때 뵈었었지요.”

벤자민은 남편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클레타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그다음, 아수라장이 된 작업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정도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억지로 들어온 흔적이 없잖습니까. 필시 들어오는 방법을 알거나, 조사한 자이겠죠.”

벤자민은 작업장에 있는 창 몇 개를 열어 보았다. 전부 완벽하게 잠겨 있어 덜컹거리기만 했다.

“이상한 사람은 딱히 없었던 거 같은데……. 혹시 다른 분들은 없었나요?”

벤자민의 질문에 클레타가 다른 동료들에게 물었으나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애초에 저희는 최근 작업량이 많아서 거래처에 드나드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고아원 밖을 나가지 않아요.”

“그럼 우리가 누군가를 봤는데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작업장에서 티백 제조 작업을 주로 하는 이들과 외부에서 물류 조달과 거래를 담당하는 이들이 마찰했다.

아무래도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한 순간, 갑작스럽게 사건이 터져 민감해진 탓이었다.

“지, 진정해요.”

그레이스는 다급하게 그들의 다툼을 말렸다. 클레타도 그레이스를 도왔다.

둘을 진정시키고 난 뒤, 그레이스가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벤자민에게 다가갔다.

“베니, 무언가 의심되는 거라도 있나요?”

“글쎄요. 의심이라기엔 저는 이 고아원에 있는 분들의 인간관계를 부인보다 더 알지 못하니, 추측할 수 있는 폭이 좁습니다만…….”

벤자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숙여 그레이스에게 속삭였다.

“일단 부인께서는 조금 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네?”

“상태가 조금 안 좋으신 듯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알았지?’

벤자민의 말에 그레이스가 시선을 돌려 창에 비친 잔상을 보았다. 흐릿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창백한 거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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