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지난밤 주제를 꺼내오는 것이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레이스가 발언을 철회할까 걱정되었던 탓이다.
“지금 당장 가능하다고는 못하겠어요. 아무래도, 신전 같은 밀폐된 데다가 사람이 많은 곳은 별로라서요.”
“역시 그렇겠죠…….”
벤자민은 예상했다는 듯 딱히 실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요. 8개월이 있잖아요. 유예 기간이 있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때 이혼하는 거니까요.”
“…….”
그레이스는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그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게이트 관리국에서 쓰러진 이후 꼬박 하룻밤을 앓았기에 더더욱 자신 없었다. 기억 속의 그레이스 또한 사람을 마주하는 걸 두려워했다.
특히 사람의 눈을 보는 걸 두려워했다.
“물, 론…… 순식간에 되지는 않겠지만, 요?”
머뭇거리는 그레이스를 바라보던 벤자민이 활짝 웃었다.
“그래도 기쁩니다.”
“기쁜가요?”
“네, 예전의 부인께서는 밖을 나오지도 않으셨으니까요. 그러니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서요.”
벤자민의 웃음에는 그늘 하나 져 있지 않아, 거짓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허가하신 건가요?”
“네, 이번 일은 위험했지만요.”
그레이스는 그제야 모두가 자신의 외출을 달가워 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레이스에게 있어 외출이란 그저 놀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과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일이 있었으니, 이제는 못 나가겠죠.”
그렇지만 저번 외출, 그레이스는 게이트 관리국에 갔다가 쓰러졌다. 만약 호위가 없었더라면 큰일 날 상황이었다.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시종을 바로 옆에 붙이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 약속을 해 주시겠습니까?”
“약속이요?”
“네.”
벤자민은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어리둥절한 그레이스의 앞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첫째로,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 주십시오. 마차에 호위와 동승하지 않으니 멀리 가시다가 길이 꼬이면 큰일 날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레이스는 멀리 나갈 생각조차 없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로, 이번에 부인께서 쓰러지고 나서 이제까지 어디를 다녀왔는지 전부 보고받았습니다. 저도 가 보고 싶습니다. 저와 다음에 같이 가 보면 안 됩니까?”
“각하께서요?”
어차피 고아원이었다. 벤자민도 가 본 적 있는 장소이지 않나? 하고 그레이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부인께서 고아원에 자주 간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한 번 더 가 보려는 것뿐이죠. 혹, 제 정체가 들킬까 걱정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조잡하고 낡기는 했지만 정체를 숨겨 주는 마도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벤자민은 세 번째를 말하려다가 멈추고 망설였다. 그레이스는 그가 왜 망설이나 싶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약속하기 전에 물어봐야겠습니다.”
“뭔데요?”
“……약, 말입니다.”
지난밤 그레이스가 열에 들떠 채 닫지 않은 서랍에는 먹지 않은 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부인께서는 왜 그 약을 드시지 않는 건가요?”
“……아.”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질문에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이상하게 둘러댈 수도 없고, 그 약이 ‘자신을 죽일 거 같았다.’라고 솔직히 대답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이스는 애매하게 솔직한 답을 내놓았다.
“그, 그게 무서워서요.”
“약이 무섭습니까?”
“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데요?”
벤자민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는 그레이스가 약을 먹었으면 싶었지만 강요했다가 도리어 반발심을 낳아 더 안 먹을까 걱정했다.
그레이스는 뭘 말해야 벤자민이 납득할까 고민했다.
“……아, 알이 커서?”
“…….”
그리고 다소 납득되지 않을 것 같은 사유를 말해 버렸다.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아, 망했다.’
하지만 벤자민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 납득했어?’
“알약이 목에 막히는 감각은 별로 좋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 그렇죠?”
“그러니 다음부터는 쪼개어서 내오게 시키겠습니다.”
“…….”
“그게 외출의 세 번째 조건입니다.”
그레이스는 또 다른 다짐을 했다.
최대한 빨리, 그 약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
그레이스가 약에 대해 몰래 조사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로, 그레이스는 혼자 외출하는 것 같지만 항상 주변에 호위들이 숨어 있다.
둘째로, 어디에 조사를 맡길지가 문제다.
그레이스는 오랜만에 서재에 틀어박혀 손안에 있는 깃펜을 굴렸다.
‘소설 속에는 딱히 정보상이 없었단 말이지.’
보통 소설에 정보상 하나둘쯤 나오지 않던가. 애석하게도 그레이스가 읽은 ‘성녀의 소원’에 정보상은 없었다.
용병 길드는 있던 거 같은데, 정보 관련은 맡길 수 없었다.
‘거짓 정보를 줄 수도 있고, 전문 지식이라 용병 길드에서는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약이니까 신전에 가서 조사를 맡기는 게 나은데, 문제는 벤자민이 신도라는 점이었다. 그레이스가 가서 맡겼다가는 벤자민이 알 수 있었다.
그레이스가 이 약에 대해 조사한다는 게 밝혀지면 벤자민은 ‘왜 그레이스가 약에 대해 조사하는가?’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럼 내가 뭔가를 의심한다고 생각하겠지.’
예를 들면 벤자민, 그 자체에 대해서라든가.
샐리한테 약에 관해 물어봤을 때, 샐리도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별관의 사람들이 아무리 나에게 호의적이라 해도 결국은 벤자민의 사람이야.’
샐리가 그레이스에게 대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는 건, 벤자민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즉, 벤자민에게 물어본다 해도 그레이스가 원하는 진짜 대답을 얻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어제 헤어지기 전,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슬쩍 약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그레이스에게 ‘영양보충제’라고 답을 했으며, 그건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었다.
벤자민이 거짓말을 하니 그레이스도 약을 진짜 먹을 이유가 없었다. 먹는 척하며, 일부만 빼돌리고 나머지는 전부 수조 아래로 흘려보냈다.
“그래서, 진짜 답을 어디서 얻느냐가 문제인데…….”
정보를 얻는 데에 쓸 돈은 걱정 없었다. 그레이스의 사재는 아직 남아돌았다.
‘던한테 부탁해 볼까?’
그레이스는 클레타를 생각했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클레타에게 이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가, 만약 정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벤자민의 다정은 믿지만 그래도 그 약은 영 께름칙했다. 괜히 그들을 여기에 엮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엮여도 되는 사람이 있나?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정보에 눈이 밝고, 엮여도 되는 사람? 그레이스는 눈을 찡그린 채 끄적끄적 적어 내리던 것을 북 찢어 차곡차곡 접은 다음, 옷 사이에 끼워 넣었다.
“으음…….”
그레이스는 생각에 잠긴 채 옆에 크게 뚫린 창을 보았다. 본관의 건물이 보였다.
본관을 보자마자 벤자민이 생각났고, 그를 생각하니 당연하게도 우울해졌다.
그레이스는 제 뺨을 챱 하고 내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래도 전보다 우울한 생각이 덜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계속 세뇌하다 보면 진짜로 우울한 생각이 싹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그레이스는 자신을 위로했다.
‘일단은 곧 약속 시간이니까 나가자.’
그레이스가 벤자민과 외출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직 그레이스의 몸 상태가 완전히 좋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외출을 할 수 있을 때 서두르고 싶었다.
오늘은 가면 축제 때처럼 그를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서재 소파에 걸쳐 둔 레흐턴의 망토를 챙겼다.
그녀가 서재 문을 나서자 샐리가 반겼다.
“마님, 새벽에 혹시 시끄럽진 않으셨나요?”
“응? 딱히?”
그레이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다행이라며 웃었다.
“저번에 조약돌 있잖아요. 하얀색으로 전부 갈아 버리려고 새벽에 전부 치우기 시작했거든요. 일단 별관 쪽만 치웠는데, 혹시 시끄러워서 마님께서 잠을 설치셨을까 해서요.”
“아냐, 괜찮아. 그리고 새벽부터 일했다니 힘들었겠네.”
“그게 일인걸요. 수당도 나오니 괜찮아요. 게다가 혹시 거기 또 터지는 게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죠!”
“돈을 받는다고 안 힘든 건 아니잖아. 괜히 미안하네…….”
샐리는 다른 이유를 말했지만, 그레이스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새벽에 작업한 이유는 그레이스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원을 사용하고 싶어 할까 봐, 였다.
지금 샐리가 그레이스에게 시끄럽진 않았냐고 물었지만, 그레이스가 소란을 느끼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작업을 진행했으리란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레이스의 눈썹이 축 늘어지며 미안한 표정이 만연해지자 샐리는 그레이스가 더 미안함을 느끼지 않게끔 ‘정말 괜찮음’을 어필하기 위해 노력했다.
“괜찮으니 마님께서는 오늘 각하와 데이트하고 오세요!”
“……데이트 아닌데…….”
그레이스가 울적하게 샐리의 말에 대답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네? 각하와 외출하시는데 데이트가 아니면 무엇인데요?”
샐리는 아주 친근한 태도로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어쩌면 사용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태도였으나 그레이스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며 대답했다.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