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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3)화 (33/131)

33화

“……그보다 이런 질문은 신전에서나 엄청 할 거 같아요.”

“하하. 나중에 부인이랑 신전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도 제 소망입니다.”

신전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예배당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황족 귀족 평민 모두 오갔기에 사람이 득시글했다.

그러기에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그런 장소에 절대로 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저 쓰게 웃었다.

열과 잠에 취한 그레이스가 작게 대답했다.

“……그래요.”

“네?!!”

벤자민은 화들짝 놀라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거의 잠에 들려는 그레이스를 깨우지 않기 위해 쓰러지려는 의자를 가까스로 잡은 그는 더 없이 놀라 보였다.

“지, 진짜입니까, 부인?! 진짜로요?!”

벤자민은 아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거리며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으음. 노력, 할게요.”

“네, 고마워요.”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자신과 무언가를 약속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며 웃었다.

“……자면 안 되는데…….”

“괜찮습니다. 주무십시오.”

그레이스는 아직 잘 생각이 없었다. 기껏 용기를 다잡아 놓고 잠들어 버리면, 이 용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거 같았다.

“내일이 있고, 그다음 날이 있잖습니까. 아직 8개월의 시간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벤자민이 그레이스의 이불을 더 꼼꼼하게 덮어 주며 등불을 껐다.

그레이스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계속 속삭이던 모든 불온한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일어나니 열은 거의 내려 있었다. 미열은 남아 있었으나, 어제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레이스는 자신 때문에 신경 썼을 사용인들 모두에게 미안했다.

땀에 전 몸을 씻기 위해 준비하던 그레이스에게 하녀가 물었다.

“마님, 오늘도 목욕 시중은 필요 없으실까요?!”

“음, 아냐, 오늘은…….”

때마침 몸도 안 좋았고, 그레이스는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바뀌기로 한 참이었다. 이런 거로 바뀐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목욕 시중을 자처하는 하녀에게 부탁하려고 입을 열려던 그레이스는 입을 딱 닫았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미안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래도 큰일 날 거 같으면 부를게.”

“……네.”

그레이스는 텅 빈 욕실에서 말없이 제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

‘날씨 좋다.’

아무래도 그런 사달이 났으니, 한동안 외출은 글렀다.

그리 생각한 그레이스는 다리를 쭉 편 채 공작저 정원에 있는 예쁜 옥색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레이스는 멍하니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밖을 나온 건 날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유독 별관 안이 그레이스의 숨을 갑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계속 소리가 들려서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겠어.’

여기 있는다고 자신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덜한 게 어디인가. 그레이스는 숨을 퓨, 하고 내쉬었다.

‘발 아파…….’

발만 아픈 게 아니라 다리도 아팠다.

아니, 사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다리 말고 허리도 아팠고, 그냥 온몸이 아팠다. 그레이스의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래도 예전보다 체력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레이스는 대략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칩거 생활을 했고, 활동 반경이 좁았다. 그녀가 처음 그레이스의 몸에 빙의했을 적에는 저택의 정원을 빙글빙글 도는 것만으로도 지칠 정도였다.

몸도 마음도 넝마 짝이 되어 제대로 된 게 없으니 사람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레이스는 남은 유예 기간 동안 무엇을 알아내야 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운동도 계속하자.’

식이요법도 쭉 이어서 하고. 급하지 않게 천천히 하자. 그레이스가 생각에 잠겨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을 즘, 그녀의 시야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부인, 그늘에 있지 않고 왜 여기에 계십니까?!”

“각하.”

그레이스는 자신을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벤자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심장이 불편하게 뛴 탓이다.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바쁘지 않으시다면요.”

“네, 그러면 앉겠습니다.”

둘은 나란히 앉았으나, 한참 동안 침묵이 돌았다. 둘 다 먼저 말문을 열어도 되나 눈치를 살핀 탓이었다.

결국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벤자민이었다.

“어제보다 상태가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저 때문에 다들 엄청나게 놀랐더라고요.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아픈 걸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아픈 건 그저 아픈 거니까요.”

‘그러라고 해도 말이지…….’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지만,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눈치를 보지 말라거나,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는 건 너무 어려웠다.

그녀는 또 자신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는 듯한 별관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외관의 건물이지만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험악해 보였다.

‘나만 그런 거 같아.’

아무래도 그레이스에게 좋지 않은 공간이라 그런가? 다른 이들에게는 별다르지 않은 저택일 텐데.

그레이스 혼자 별관을 끔찍한 장소로 느끼니, 그녀는 이것 또한 제 잘못이 아닐까 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그레이스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려 보니 그녀의 이유 모를 자기혐오를 빼면, 오히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다들 그레이스를 배려하는 것도 같았는데.’

혹시 기억에 왜곡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레이스는 그리 판단했다.

그야, 그레이스에게 저 별관은 종종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고…….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저 안에서는 유독 ‘이상한 소리’가 더 빈번히 들렸다.

“……부인?”

“……아.”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레이스는 시선을 돌리며 멀쩡한 대화 주제를 찾기 위해 머릿속을 열심히 뒤적였다.

“그, 그러고 보니까 말이에요. 그날 황태자 전하께서는 잘 돌아가셨나요?”

“……잘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주제 선정을 잘못한 것인지 벤자민의 반응은 영 떨떠름해 보였다.

“혹시 제가 물어보면 안 될 것을 물어본 건가요?”

“아뇨!”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시원찮은 반응에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벤자민이 즉시 다급하게 답했다.

“부인께서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은 없습니다!”

“그, 그러면요?”

“그냥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에는 조금 성가셔서 그렇습니다.”

벤자민은 황태자를 가리켜 ‘성가시다.’라고 표현했다.

그레이스는 그 표현을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황족 모독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역시 서브남주답다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의 고민이 어찌 되었든 간에 벤자민은 불만을 토로하듯, 약간 토라진 얼굴로 그레이스에게만 들리게 꿍얼거렸다.

“그분께서 당신과 저에 관해 물어보잖습니까.”

“전하께서요?”

“예. 황실 법무부에 계셨나 봅니다. 이혼은 왜 하냐, 무슨 일이냐, 당신께서는 약혼자도 없으시면서 남의 부부생활에 관심이 많다 하니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 물어본다고 하시더군요.”

“…….”

그레이스는 실베스터와 벤자민의 사담은 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심히 궁금했다.

멍하니 실베스터에 관한 험담 아닌 험담을 줄줄 늘어놓던 벤자민이 정신 차리고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대낮의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그레이스에게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이건…….”

“어디에도 안 말할게요.”

“…….”

“다른 데에 말하면 황실 모독죄일 테니까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만…….”

벤자민은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레이스가 물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요……?”

“……부인께서 저를 고작 이런 거나 이르고 다니는 유치한 사람으로 오해할까 봐 걱정입니다.”

“……그러면 잊을까요?”

그레이스가 묻자 벤자민은 그저 침묵했다. 그레이스는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끄덕이곤 시야를 정원 쪽으로 돌렸다.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기 위한 배려였다.

겸사겸사 벤자민이 진정할 때까지 그레이스 또한 앞으로 무엇을 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전에 노력은 하고 싶어.’

원작의 내용은 대강 안다. 그 원작에 펠튼 공작 부인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하지만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 그레이스가 지금은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금은 실재하는 인물이니까,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아니야.’

또 머릿속에서 울리는 부정적인 소리가 어차피 못할 거니까 포기하라고 말했다. 그레이스는 눈썹에 힘을 주며 생각을 부정하려고 했다.

당연했다.

그건 절대로 그레이스의 생각, 그녀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노력하지도 않고 단정 짓는 건 정말로 그레이스가 원하던 것이 아니다.

계속 머릿속에서 당연하게 맴도는 비하와 비관은 그레이스의 숨과도 같았기에, 그레이스는 그 모든 비관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날 때부터 비관적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몸이 살아온 시간과 기억 때문이었다.

그 기억이 자꾸만 그레이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떠올리는 걸 방해한다.

현재의 그레이스와 원래의 그레이스가 원하던 것 전부를 잊게 만들고, 괴롭혔다.

원래라면 아무렇지 않아야 할 것들마저 미워하고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

정원을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등을 벤치에 기대며 말했다.

“……어제 노력, 하겠다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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