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더 현명하고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사고에 대해 떠올리자 마음이 급했다.
언제 게이트 참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고 최대한 빨리 모든 게이트를 검사하게 해야 한다.
그레이스는 옆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머릿속이 띵하니 울리고, 몸이 쑤셔 잠이 오지는 않았다. 원래 아플 때 한번 깨면 잠이 잘 오지 않는 법이었다.
그레이스는 멍하니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옥색의 장식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부정적인 소리들을 속삭이며 그녀에게 자학과 비관을 종용했다.
<멍청해.>
<멍청해 빠졌으니 그걸 이제야 떠올리지.>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거야. 네가 무언가를 해낼 리가 없잖아.>
<그만두자. 어차피 아무도 반기지 않을 거야.>
<그도 그럴 게 너는 못났는걸.>
그레이스는 침대에 누운 채 그 목소리에 푹 잠기며, 서서히 늪에 빠져들었다.
‘역시 별관은 싫어.’
가만히만 있어도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프니까 배로 잘 들렸다. 잘 들리고, 공감이 되었다.
‘본관으로 잠깐 가서 지낼까?’
본관은 좀 나을까? 그레이스는 그건 아닌 거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본관을 가면 벤자민을 자주 볼 텐데, 벤자민을 볼 때마다 그레이스의 몸뚱이에서 심장이라는 부분이 반응했다.
그러면 또 자신, 정확히는 그레이스가 심란해졌다.
이 유예 기간을 잘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돌은 터지고, 멀미는 심하게 나고…….’
지금은 너무 아파서 잠도 안 오고.
남들이 대체 자신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안주인이라고 생각할지, 그레이스는 면목 없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 기사에게도 미안했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는 일부러 인파 많은데 안 갈래. 그레이스는 중얼거리다가 둥글게 이불 속에 몸을 말았다.
‘가면 축제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 취객을 만나 힘들기는 했지만, 마지막에 벤자민의 표정이 엄청 무섭기는 했지만 즐거웠다. 인파가 두렵기는 했지만, 게이트 관리국에서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실내라서 그런 걸까?’
그레이스는 솜이불 속에서 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꺼냈다. 곱슬곱슬한 당근색 머리가 잔뜩 뒤엉켰다.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 몰골이 엉망이었다.
‘어쩌면 약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
그레이스는 이제까지 먹지 않고 약을 모아 둔 서랍을 열었다. 수북한 약 봉투가 나왔다. 그레이스는 약 봉투를 하나 꺼내 만지작거렸다.
바스락거리는 약 봉투의 소리가 들렸다.
“…….”
항상 이 약도, 벤자민도 의심스러웠는데 갑자기 이제는 또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너무 의심이 많은 게 아닐지. 그레이스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왜 이렇게 생각이 계속 뒤죽박죽이지?’
탕탕탕-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아.”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창을 치는 소리였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누구를 기대했는지 알아 입꼬리를 엉성하게 올려 버렸다.
창밖은 새까맣고,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지 잎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머릿속이 열기로 홧홧했다.
“……더워.”
그레이스는 눈앞의 새까만 창을 바라보았다. 커튼을 드리우지도 않았는데 밤의 색으로 칠해 둔 창은 무엇보다 견고해 보였다.
한 손으로 여전히 약 봉투를 바스락거리며, 그레이스는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창을 향해 다가갔다.
걸쇠가 딱딱하고 차가웠다.
‘저번에는 이렇게 단단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레이스는 열감이 올라 모든 것이 민감해진 상태였다. 덜덜거리는 손끝으로 겨우 걸쇠를 풀어 창문을 열자 바로 찬 바람이 그녀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헝클였다.
방금 전까지는 더웠는데, 찬 바람을 맞자마자 식은땀이 순식간에 식어 추위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추위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을 여니까 공기가 맑기도 하고, 아까 전보다 덜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레이스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새까매서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시원하고, 조용하고, 또…….’
높은 게…….
그레이스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눈을 살며시 감았을 때, 밑에서 다급한 벤자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
벤자민의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나 서서 잠든 거야?’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렇게나 피곤했던 건가, 당황해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 벤자민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바깥에 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인지 그는 여전히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인사부터 해야 할지, 바쁜 거냐고 물어봐야 할지, 잘 자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녀의 입은 그레이스의 느릿한 고민과 달리 착실하게 움직였다.
“……민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
“그렇게 쓰러질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다.
그냥 조금 메슥거림을 토로할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크게 앓을 줄 알았더라면 그레이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말 그러지 않았을까?’
만약 방법이 이거밖에 없는데도 그레이스는 정말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스스로를 의심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벤자민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올려다보았다.
“민폐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잖아요. 다들 제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대해 주는 거 알아요. 솔직히 제가 외출하고 싶다고 하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집안 살림은 하지도 않고…….”
시종도 없이 돌아다니고, 호위는 멀리에서 지켜봐도 된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쓰러지기나 하고.
만약 인파 사이에서 쓰러졌으면?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레이스는 여러 최악의 가정을 떠올리며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다.
벤자민은 창틀을 꽉 쥔 채 기대서 있는 그레이스를 가만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부인께서 만든 티백 말입니다.”
“네?”
“고아원분들을 위해 만든 것이요. 그것을 주기적으로 구매하여 북부에 지원 물품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네?”
그레이스는 갑작스러운 벤자민의 보고에 약간 어리둥절한 낯이 되었다.
“이제는 마수를 상대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하나, 늘 위험이 도사린 곳입니다.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 사치품을 여럿 보내었으나 차의 경우에는 즐기기 어려웠으니까요. 부인 덕에 그들의 인생에 즐거움이 늘어난 것이지요.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건 아주 간단한 거예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거였어요.”
“하지만 부인이 처음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따지고 보면 간단한 원리인 게 많잖습니까.”
“…….”
“부인께서 밖에서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어느 누가 막겠습니까. 물론 오늘 같은 일은 없어야겠지만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부러 자신을 띄우기 위해 칭찬하는 것을 알았다.
그레이스는 북부에 독점적으로 물자를 보낸다면, 상당하다 못해 어마어마한 수익일 테니 고아원의 삶이 풍요로워질 거라 생각했다.
‘그건 다행이다.’
그 사실이 기뻐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어디선가 작게 숨소리를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그제야 탁했던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각하께서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방금 막 게이트 관리국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하고는, 아차 하고 바로 덧붙였다.
“절대 부인 때문에 일이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저번부터 게이트 증축을 해야 한다고 말이 나와, 게이트 정비사나 마도구사들이 검사하러 많이 오갔었습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이해할 수 없는 게이트에 관한 용어를 이리저리 설명하다가 결국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목덜미를 쓸었다.
어쩐지 그의 귀가 붉은 듯했다.
“……그래서 오늘 혹시 싶어 전부 검사에 들어갔습니다. 예전부터 마력이 많거나, 많이 접한 이들이 마력 수식 가까이 있으면 어그러지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레이스가 생각한 대로 게이트 관리국이 게이트 검사에 들어간 듯했다.
제 목덜미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벤자민이 손을 내리고 머뭇거리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부인께서 말하기 싫은 주제인 걸 압니다만……성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녀님이요?”
“예, 만약 부인께서 허락하시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벤자민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그레이스에게 허가를 구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미간을 꾹 눌렀다.
“……그냥, 친구 사이시겠죠.”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친구는 아닙니다. 아직은요.”
‘아직?’
“친구란 건 아무렇지 않게 집에도 초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입장 상관없이요. 그러니까…….”
벤자민이 이리저리 설명하다가 그레이스의 상태를 살폈다.
그레이스의 얼굴이 여전히 열 탓에 붉고, 눈의 빛이 탁한 게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아프실 텐데 그냥 다음에 다 나으시고 나서 마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들을게요.”
“바람이 찹니다. 계속 바람을 맞다가는 더 앓아누우실 겁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걱정해서 한 말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레이스가 보기에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