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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0)화 (30/131)

30화

마부는 그레이스가 거절할세라 급하게 덧대었다.

“기본 값만 받겠습니다! 어휴, 도와주십시오. 요즘 손님이 없어 그렇습니다.”

“……그, 그러면…….”

그레이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보이지 않아도 그녀를 지켜 주는 이들이 주변에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며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게이트 관리국은 어쩐 일로 가십니까? 여행이라도 가시나요?”

그는 그레이스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여행을 간다기에는 그레이스는 들고 있는 짐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이 그곳과 관련된 일을 해서…….”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대화는 버거웠다.

그레이스는 마차 안에 자리 잡고 앉아, 도착할 때까지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벤자민은 이 일로 비난을 받아.’

사실 게이트의 발명이나 연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였다. 그저 돈을 투자하고, 게이트에 고품질의 마석을 제공할 뿐이지만, 게이트와 관련된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건 벤자민 펠튼이었다.

평민과 약소 귀족에게 지지를 받고, 청렴하기로 유명한 펠튼 공작. 기자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벤자민을 비난했다.

‘그래서 괴로워하는 걸 아리아에게 들키고, 그녀에게 위로받지.’

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전부터 아리아에게 호감이 있기는 했지만.

‘만약 이걸 고치면 벤자민은 아리아를 깊게 사랑하지 않게 될까?’

게이트가 망가져 일어난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은 벤자민과 아리아 그리고 실베스터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후 서부 이야기로 이어진다.

‘내가 이걸 잊고 있던 게 이상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어.’

하지만 벤자민은 아리아에게 위로를 받지 않더라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이미 아리아에게 호감이 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다면서 또 그가 아리아에게 웃으며 선물상자를 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

짝!

그레이스는 세게 양 뺨을 제 손으로 내리쳤다.

‘정신 차리자.’

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람. 사람이 계속 미련 둔탱이가 되려고 한다. 벤자민은 원래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다정할 뿐이었다.

‘그걸 잊으면 안 돼.’

그레이스가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 마차는 금방 게이트 관리국 앞에 도착했다.

마부에게 삯을 내고 내렸다. 입구 쪽에 사람이 붐비는 게 보였다.

“……읏.”

붐비는 사람을 보니, 또 숨이 막혔다.

‘또야.’

그레이스는 사람이 많은 곳을 정말로 싫어했다. 그것은 전생의 그녀와 그레이스의 무수히 많은 공통점 중 하나였다.

숨이 막혀 오는 것을 참으며 게이트 관리국 안으로 발을 들였다. 웅성거리는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마도구나 게이트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원래 사고가 나기 전에는 주변에서부터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마련이었다.

‘갑자기 일어나는 사고는 사고가 아니라 테러에 가까우니까.’

아니면 원인이라도 직접적으로 명시가 되어 있다든가.

정체불명의 사고. 이런 건 범인이 있지만 잡히지 않아서 사고로 처리된 류가 대다수였다.

그레이스의 독단적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직 사건이 터지기 전인 게 다행이지.’

어차피 그레이스는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그녀가 지금 해야 하는 건 딱 하나.

벤자민에게 게이트의 상태를 전부 조사하게 하여 ‘게이트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끔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구석으로 가 기둥에 기대었다.

‘마력 멀미.’

마력 멀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선천적으로 특정 마력 수식을 쓴 마도구와 맞지 않아 일어나는 울렁증과, 마력 수식이 어그러져 흘러나오는 마력으로 인하여 울렁증을 느끼는 경우.

정확히는 세 종류지만 일반 제국민에게는 두 종류로만 알려졌다.

‘게이트 참사가 정말 마력 수식이 어그러져서인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수식을 확인하려면 마도구 전체를 확인해야 하니까, 결국 원인을 잡아 낼 수 있겠지.’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간단했다.

그냥 이대로 인파 사이를 느린 걸음으로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 바로 토기가 올라올 테고 그 모습을 숨어서 호위하던 기사가 볼 테니까.

그레이스의 모든 행동반경은 기록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벤자민에게 보고된 적은 없었다.

그에게 보고가 올라가는 조건은 그레이스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

린덴 자작령은 아주 작지만 대신 멋진 전설을 지닌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그만큼 아름다운 딸과 듬직한 아들…….

그리고 평범한 딸이 한 명 있었다.

그레이스 린덴.

린덴 자작의 친우들이 자작가를 방문하여 그의 자녀를 볼 때면, 그레이스만은 한 번 더 눈에 담고는 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의 머리색과 주근깨는 외할머니한테 물려받았다. 그 말은 즉, 현 린덴 자작가의 지붕 아래, 당근색의 머리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언니는 어머니를 닮아 꿀 같은 금발을 지니고 있었고, 오빠는 아버지를 닮아 짙고 푸른 남청색의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만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레이스의 언니는 그레이스의 머리칼 색을 아주 좋아했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는 다정한 색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러한들 그레이스에게 있어 당근색은 가족과는 다른 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린덴 자작이 운영하는 영지는 아주 작았기에, 모두 다 같이 어울려 자랐다.

그리고 이건 모든 아이들이 그레이스의 머리 색을 보았으며, 그레이스가 다른 린덴가의 아이들과 달리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였다.

그레이스가 언니와 떨어져 혼자 책을 들고 읽을 만한 곳을 찾아다닐 때면, 꼭 무리 지어 괴롭히려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시시다! 시시!”

동네 아이들은 어린 날의 그레이스를 ‘시시’라고 부르며 업신여겼다.

“……시, 시시라고 부르지 마.”

그레이스는 품에 책을 꼭 끌어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제 뜻을 최대한 펼쳤다. 하지만 척 보아도 겁을 먹은 아이의 감정 표현은 우스울 뿐이었다.

“넌 코에 뭘 이렇게 묻히고 다니냐? 뺨에도 묻혀! 더러워!”

“네 다른 형제들은 다 얼굴이 깨끗한데 너만 더러워.”

그레이스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유순했다. 다른 말로 유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저 멀리서 그레이스의 오빠인 길버트가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레이스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들에게 못난 취급을 받는 여동생을 도와주었다가 자신도 놀림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오빠……”

그레이스가 울면서 길버트를 불렀으나, 길버트는 고개를 홱 돌리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다들 길버트가 멀리 가 버리는 것을 보고 그레이스를 비웃었다.

그레이스는 언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깜빡. 한참 동안 열에 잠겨 있던 그레이스는 그제야 악몽에서 깨어났다.

‘더워…….’

열 때문인지, 악몽 때문인지.

그레이스의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꿈…….’

아니, 내 꿈이 아니라 그레이스의 꿈이지. 그레이스는 제 생각을 정정했다.

그레이스는 어릴 때, 유독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어른들은 아이들끼리 자라며 있는 일이라며 내버려 두었고, 결국 그레이스는 도움을 요청하다가 그만두었다.

매번 도와 달라고 하다가 그들의 귀찮음이 담긴 시선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무력함을 떠올리던 그레이스는 목 안이 바짝 마른 걸 느끼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

어지러웠다. 게이트 관리국에서 사람들 사이만 지나갔을 뿐인데 이렇게 심하게 쓰러질 줄은 몰랐다.

관리국에서 쓰러진 후,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만나기 전까지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물론 저택으로 돌아간다고 바로 벤자민을 만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행인 건지 그녀가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벤자민을 만날 수 있었다.

당혹한 낯으로 저를 바라보던 벤자민을 향해, 그레이스가 말했다.

“……게이, 트 근처를 가니까 이상하게 속이 안 좋고 어지러워요. 아까, 까지는 괘, 괜찮았는데…….”

말하는 내내 속이 뒤집어지고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계였는지, 시야가 그대로 훅 꺼지며 그레이스는 정신을 잃었다.

‘열이 난 덕분에 마력 멀미로 진찰된 거 같지만…….’

그래도 그레이스의 몸이 이렇게까지 사람에 취약했던가? 그녀는 축제 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은 좀 불편하기는 했어도 견딜 만했다.

‘이 정도로 심하게 쓰러지면 앞으로 밖을 나가는 건 글렀을지도 몰라.’

이제까지는 큰 사고가 없었기에 비밀 호위가 주변에 숨어서 따라다니기만 하면 외출을 해도 된다고 허가했다. 다른 사용인을 대동할 필요가 없던 이유도 호위 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용인을 대동해야 한다거나 아예 외출을 금지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레이스는 자신이 속단했고, 성급했다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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