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9)화 (29/131)

29화

“그런가요?”

원작에서는 나온 적 없던 부분이었다. 그레이스는 처음 듣는 사실이 꽤 신기해 그의 말에 집중했다. 벤자민은 변명하듯 그의 설명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레이스는 원작에서 왜 종종 실베스터와 벤자민이 같은 장소에서 출몰했는지에 대해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쉬이 친해질 수는 없지만, 나쁜 분은 아닙니다. 물론 부인께서 억지로 친해지고자 노력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군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는 것을 느끼며 그저 ‘그렇군요, 그런가요’만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에게 있어 실베스터는 꽤 신경 쓰이는 동생쯤의 위치인 듯했다.

“각하께서 저에 대한 이야기를 황태자 전하께 많이 하셨다면서요?”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뭐 나에 대해 무슨 대단한 이야기가 있다고.’

“진짜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네.”

“…….”

그레이스는 그걸 왜 또 강조하냐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뒷문 쪽으로 나갈 때쯤, 그레이스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아까 전보다 기분이 홀가분해진 거 같은데.’

왜지?

“부인?”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쪽까지만 배웅해도 괜찮겠습니까?”

벤자민은 뒷문 밖, 길목을 가리키며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레이스는 의문을 안은 채 망토의 후드를 꾹 눌러쓰며 벤자민을 따라나섰다.

⋆★⋆

“린덴 씨!”

수북하게 쌓인 티백을 뒤로한 채 클레타가 그레이스를 반겼다. 그레이스는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반기는 여성들을 보며 안심했다.

‘휴.’

아무리 그래도 밖이 훨씬 편했다. 그레이스가 숨을 몰아 내쉬었다.

‘아까는 착각이었나 봐.’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타의 인사를 반겼다.

“린덴 씨가 없어서 허전했어요.”

“제가 없어도 잘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요?”

그레이스는 이제까지 모두가 하고 있던 일을 살펴보았다. 그레이스가 미리 준비해 준 대로 차곡차곡 준비해 나가 식당과 장기 계약을 맺어 계약금을 벌고, 조금씩 개인을 대상으로 한 상품화를 진행해 가고 있는 듯했다.

릴리가 정리해 둔 상황 보고용 표는 보기 쉽게 벽에 붙여 놓았다. 그레이스는 그 표를 보며 현재 일의 진척과 수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대로만 나아가면 망하지는 않겠다.’

물맛이 변한 게 가장 큰 계기였던 것 같다. 그레이스는 평소에도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부류의 향을 지닌 찻잎도 클레타에게 추천해 주었고, 클레타는 그걸 바로 받아들여 티백을 만들었다.

분명 그 덕에 잘 진행되고 있었으나, 클레타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했다.

“잘하긴요. 아직 차밭은 직접 가 보지도 못했어요. 기차를 타고 갈까 하는데 그럼 꽤 걸리니까요. 게이트가 있지만 티백으로 번 수익을 거기에 쓸 수는 없잖아요.”

수익이라 해도 아직은 완벽한 흑자가 아니었다.

클레타는 그레이스가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대충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오면 주려고 계약금에서 생활비를 제하고 남은 금액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다들 그래도 그레이스라면 클레타가 게이트를 쓰는 것에 찬성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성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길을 오른다는 건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음, 확실히 게이트는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자신들과의 예상과는 다른 그레이스의 대답에 다른 이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죠?”

“……아. 그, 그러니까. 당신에게 그 돈을 쓰는 게 아까워서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그레이스가 난처한 얼굴로 클레타를 바라보았다.

“제가 공수해 온 홍차 잎도 사실 게이트가 아니라, 그냥 마차로 공수해 왔어요. 지금 게이트의 동력이 불안정하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그래요?”

“음…… 모든 지역은 아니지만요.”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네요.”

“남편이 그쪽에 관련된 일을 해서요.”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진짜였다. 아무튼, 벤자민은 게이트와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

그레이스는 그제야 다른 심각한 문제를 깨달았다.

“린덴 씨?”

“……아.”

‘게이트 참사.’

얼마 뒤, 제도에 위치해 있는 서부로 향하는 게이트 하나가 망가진다. 그냥 망가지면 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려 불편하고 경제가 조금 흔들리는 데에서 그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 사용 중일 때 게이트가 오작동한 데 있었다.

‘게이트는 순간이동 같은 게 아니라 다른 차원을 열어 통로를 연결하는 개념이야.’

게이트가 망가지면 통로가 닫혀 버린다. 다시 연결하는 데에는 시간이 한참 걸리며 그동안 사람들은 다른 차원에 갇힌다.

다행스럽게도 전원 생존하여 구조되지만 다른 차원에 갇혀 있던 탓에 모두가 미쳐 버린다.

‘그것 때문에 아리아가 서부 오염 때 게이트를 쓰지 않고 이동하게 되어 내가 산 차밭이 있는 지역을 들르게 되는 거지만.’

그레이스는 제 입가를 매만졌다.

‘왜 그 참사를 떠올리지 못했지?’

그레이스는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좋지 않은 의미로 감탄했다.

다른 것들은 잘 떠올리다가 이런 끔찍한 사건은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하지만 만약 지금 당장 게이트를 검사하게 해서 사건을 사전 차단한다면 그레이스가 차밭을 산 건 큰 적자를 보게 된다.

애초에 아리아의 축복을 상정하고 산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내년에 높은 품질의 찻잎을 마련할 수 없다면, 내년부터 다른 차 브랜드와 상품성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돈을 사람 위에 둘 수는 없어.’

만약 그레이스 혼자만의 사업이라면 망해도 상관없었다. 속은 쓰리겠지만 사업이 망한다 해서 삶이 막막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이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금수저의 삶을 시작한다거나 자신의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클레타와 고아원의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

그레이스는 고민했다.

차라리 계속 기억나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여기까지 생각했던 그녀는 퍼뜩 정신 차렸다.

‘아냐.’

이런 생각은 절대 하면 안 되지. 알았기에 고칠 수 있고 알았기에 막을 수 있다.

‘둘 다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애초에 왜 갑자기 게이트가 망가졌는가.

이건 아무리 ‘성녀의 소원’의 애독자였어도 알 수 없는 정보였다. 작가가 아무리 설정을 좋아해도 게이트에 관한 설정만 주구장창 쓰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설정집이었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읽은 건 소설이었다.

그런고로 게이트가 왜 망가졌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꽤 큰 사건인데 왜 안 쓰여 있지?’

아리아와 실베스터의 사랑에는 별 상관이 없어서 그런가? 그저 아리아와 실베스터가 몇 날 며칠 동안 기차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 필요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스는 납득했다.

그사이에 실베스터는 많은 마을을 보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시기라도 적어 주지.’

그레이스는 다시 망토의 후드를 쓰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저는 다시 가 볼게요. 혹시 근처에 이상한 사람은 없었죠?”

“네, 다행히도요.”

“그래도 나중에 조금 넉넉해지면 호위를 고용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여성과 어린아이밖에 없으니까요.”

그레이스의 조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일단 게이트 관리국에 가 보자.’

간다고 뭘 알 것 같지도 않지만, 아예 안 가 보는 것보다야 낫겠거니 했다.

어차피 오늘은 저녁을 넘겨 들어가도 괜찮은 눈치였다. 다들 실베스터와 그레이스가 마주치지 않기를 은근슬쩍 바라기도 했다.

그럴 법했다. 실베스터와 원래 그레이스의 성격은 상극이었다.

‘실베스터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대우 차이가 심한 편이지.’

그리고 그레이스는 실베스터의 ‘자기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사람의 아내이기에 그래도 호의적인 편이었지만, 실베스터는 워낙에 직설적이었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불편하기는 하니까.’

어차피 아리아에 의하여 뜯어고쳐지겠지만 그전에 만나는 건 그레이스도 사양이었다.

“마님, 어디 가세요? 마차 타고 가실래요?”

한 마부가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그레이스를 불러 세웠다.

“…….”

그레이스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거는 게 불편하고 무서웠기에 경계했다.

“……거, 걸어갈 수 있어…… 요.”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건 탓일까, 그레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영 자연스럽지 못했다.

본인 또한 제 목에서 나오는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낯설었지만, 그보다도 갑자기 수면으로 드러나는 경계와 옅게 깔린 두려움이 이상했다.

‘아.’

그리고 그녀는 마부의 생김새를 보고 이러한 감정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 낯선 마부는 축제 날 본 남자와 풍채가 비슷했다.

“어디 가시는데요?”

“……게이트 관리국이요.”

그레이스의 대답에 마부가 화들짝 놀라며 과장된 몸과 어투로 말했다.“어휴, 그리 멀지는 않지만 마님의 연약한 몸으로는 가시다가 큰일 납니다! 기본 값만 받을 테니 타시죠!”

그레이스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호객하는 마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레이스가 도움을 청하면 주변에 숨어 있는 호위들이 나타나 그를 저지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마부를 보며 그레이스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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