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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7)화 (27/131)
  • 27화

    집사는 그녀의 생각을 바로 읽고 대답했다.

    “어디 감히 펠튼 공작 부인을 오라 가라 하겠습니까.”

    “으음.”

    그래도 나는 하는 게 별로 없는데 말이지. 주로 하는 일이란 살 빼는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차마 이런 이야기를 집사에게 할 수는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가 건네는 편지와 레터 나이프를 집었다.

    ‘8개월.’

    최소가 한 달, 최대가 1년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8개월이 나왔다.

    ‘긴 건가…….’

    3분의 2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편지를 읽어 보았다. 황실법무부의 인장이 꽝! 하고 찍혀 있었다.

    ‘벤자민이 줄여 달라고 부탁한 게 이 정도라면 원래는 1년 꽉 채우려고 했던 걸까.’

    하기야 황실에서 이어 준 혼인이니 최대한 이혼하지 않기를 바라겠지. 그레이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는 역시 그레이스를 최대한 존중하기는 했다.

    ‘사랑하지는 않겠지만.’

    유부남이라는 고삐가 풀리고 난 뒤부터는 눈이 뒤집히고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 같지만.

    그레이스는 이어지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의 전남편이 될 사람의 미래 행적을 생각해 봤자 속만 쓰려졌다.

    “이혼 유예 기간 동안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지…….”

    부부끼리 활동을 하라고 해도, 그게 정확히 무슨 활동일지 그레이스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레이스의 기억 속을 뒤져 보아도 벤자민과 그레이스 두 사람은 동침을 하기는커녕 입맞춤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도 입맞춤하는 시늉만 했어.’

    최대 스킨십이 손잡는 거였다.

    둘이 부부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은 그레이스가 펠튼 공작 부인이라고 불릴 때나, 펠튼 공작가의 기사나 사용인에게 마님이라고 불리는 때뿐이었다.

    “마님.”

    집사가 끙끙 앓으며 ‘부부란 무엇을 하는가?’를 고민하는 그레이스를 불렀다. 그레이스가 다시 얌전한 낯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왜 불러? 혹시 다른 편지라도 있나?”

    “아뇨, 그것이 아니라 혹 괜찮으시다면 각하와 저녁 식사를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저녁?”

    그레이스가 솔깃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벤자민과 무언가를 같이 먹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레이스는 공작저에서는 어지간하면 별관 혹은 정원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겠다. 그런데 저녁 식사도 유예 기간 동안의 부부 활동에 포함될까?”

    “예, 나중에 황실법무부에서 사용인들에게 질문하러 올 것입니다.”

    “그런 것도 하는구나…….”

    그레이스는 제국의 황실 공무원은 별일을 다 하는구나 싶었다. 대귀족이 아니면 겪어 보지 못할 일이었기에 알 수 없는 지식이었다.

    “그러면 본관에 가서 지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것은 상관없지요. 원래 그랬으니까요.”

    “그건 다행이네.”

    그레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툭, 하고 말해 버렸다. 아차 싶어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 그러니까 나는 이제 여기가 정이 들어서 말이야. 본관에 가면 계속 잠을 설칠 거 같아서 그런 거지.”

    벤자민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이미 이혼하기로 했고, 자신이 이혼을 신청해 놨으면서 그레이스는 괜히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집사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대충 다시 원래 관계로 복구하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실패했다, 라는 걸 어필하면 되는 거구나.’

    그레이스와 벤자민은 애초부터 별거 상태였다.

    그러니 굳이 이번 유예 기간 동안 그레이스가 본관에 들어가 살 필요가 없었다.

    ‘거의 처음부터 별거했으니, 이건 관계 복구 대상이 아니라는 거구나.’

    곰곰 생각하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어 집사를 바라보았다.

    “……외출은 해도 되는 걸까? 저녁까지 돌아온다며.”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가능하지요. 다만 기사는 언제나 마님 근처에 있을 것입니다.”

    “괜찮아. 각하께는 보고 안 했지?”

    “마님이 외출하는 것은 보고가 되었지만, 무엇을 어디에서 하는지는 기록만 할 뿐 보고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집사의 솔직한 보고에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레이스가 잘못되면 필요한 정보들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아원에 또 들러도 되는 걸까?’

    벤자민 때문에 기분이 우울해져 클레타에게 급하게 모든 일을 맡긴 참이었다.

    원래라면 차근차근 맡겼을 텐데,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다들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핑계라도 있어야 어디 나갈 이유라도 있지 않겠는가. 그레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나갈 궁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망토.”

    그럼 잠깐만 들러서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저번에 주문했다고 한 재봉틀은 잘 작동되는지라거나 아이들은 얼마큼 컸는지 등만 확인하고 와야지.

    그레이스는 중얼거리며 망토를 찾아 종종 복도를 거닐었다.

    “……아, 맞다.”

    망토를 걸치던 중, 그레이스는 저번에 새로 압화해 둔 꽃을 떠올렸다. 너무 오래 눌러 두면 종이에 붙었기에 나가기 전에 떼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갔다.

    “창을 열어 뒀네.”

    아무래도 그레이스가 나가자 청소하기 위해 환기하는 중으로 보였다. 그레이스는 청소 담당 하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금방 끝내야겠다며 끄덕였다.

    압판을 묶고 있는 끈을 풀고 펼쳐 보니 꽃이 예쁘게 눌려 건조되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보관 종이에 차곡차곡 압화를 보관했다.

    “앗.”

    그때 바람이 불자, 그레이스는 들고 있던 압화를 놓쳐 버렸다. 그사이 압화는 저 멀리 날아갔다.

    “……이런.”

    그레이스는 멍하니 날아간 꽃을 바라보다가 줍기 위하여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자리를 비키자 당연하게도, 그레이스라는 벽이 사라져 창문을 통해 그대로 들이닥친 바람이 모든 꽃을 휘이잉 하고 날려 버렸다.

    “…….”

    바람결에 날아간 압화가 그레이스의 몸 위에 덕지덕지 붙었다. 그레이스는 분명 청소 담당 하녀가 오기 전에 빨리 떠나려고 했는데, 그녀의 일만 늘려 버린 듯했다.

    ‘누구지? 미안해서 어떡해.’

    얼굴 볼 면목도 없었다. 지금 그 아이가 들어오면 민망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몸에 붙은 꽃은 떼지도 못하고 일단 바닥에 흩어진 것부터 주섬주섬 주워 손에 모았다.

    ‘이번 건 정말 잘 말렸는데.’

    별거 아닌데 또 속이 상해서 눈물이 핑글 돌았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계속 기분이 안 좋았다 좋았다 또 안 좋았다. 오락가락하는 것이 심했다.

    결국 손에 모은 예쁘게 말린 압화를 양손으로 으스러트렸다. 그러다가 으스러진 압화를 발견하고, 그렇게 망가트린 게 자신이라는 게 또 속이 상했다.

    ‘아 또 왜 이래.’

    자신은 이제 원래의 그레이스의 감정을 잘 분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갑자기 또 자기혐오가 들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는데 여전히 거울조차 보기 싫었다.

    분명, 그레이스는 몸만 제대로 움직이고 건강하기만 하면 만족할 수 있었는데.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람이 다시 불며, 미처 줍지 못한 꽃이 휘날렸다.

    “……일단 창을 닫자.”

    닫고 마저 주운 다음, 다시 열고 가자.

    그레이스는 겨우 눈물을 흘리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으스러진 꽃은 압판 사이에 다시 끼운 채, 창을 닫기 위해 손을 올렸다.

    “…….”

    그때, 그레이스의 시야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응?’

    별관 앞 낮은 화단 근처에 죽 늘어선 이상하고 작은…….

    ‘뭐야, 저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레이스가 본 건 아니었다. 그냥 무언가가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있었다. 기분 나쁜 무언가가.

    그레이스는 창을 닫으려다가 말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청소 담당 하녀가 그레이스를 마주치고 깜짝 놀랐지만, 안을 조금 어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바로 밖으로 향했다.

    바로 확인해야 속이 시원할 거 같았다.

    정원으로 나가니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분명 여기 어디쯤…….”

    화단 근처에는 조형을 위해 장식용 돌을 늘어놓았다. 그레이스는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였는데.”

    그레이스가 한참을 살펴보고 나서야 찾을 수 있었다. 그만큼 아주 작고 미세했다.

    그레이스는 불온한 느낌을 뿜어내는 새까만 조약돌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지?’

    왜 이런 게 있지. 그레이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엄지와 검지로 조약돌을 집은 채 허공에서 뒤집어 보며 살폈다.

    “……?”

    그 순간, 그녀의 손 너머로 마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벤자민이 타고 다니는 마차와는 달라 보였다.

    ‘엄청 화려한 마차다. 손님인가?’

    본관을 담당하는 집사장이 맞이하는 게 보였다. 그 안에서는 아주 젊은 남성이 내렸는데, 처음 보는 사내였음에도 그레이스는 그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채고 화들짝 놀랐다.

    ‘남자 주인공!’

    원작의 남자 주인공인 황태자 실베스터 바이먼이었다.

    ‘왜 온 거지?’

    실베스터와 벤자민의 사이가 좋았던가? 그레이스는 원작에서의 두 사람 사이를 떠올렸다.

    “마님? 거기서 뭐 하세요? 아까 아만다가 마님을 집무실에서 봤다고…….”

    “샐리.”

    샐리가 그레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레이스는 실베스터보다는 일단, 이 조약돌에 관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이 돌은 어디서 산 거야? 이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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