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냥 거기 말고, 다른 곳이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조용히 살려고요.”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빈손으로 내쫓을 리는 없었다. 아무리 무능했어도 그의 아내였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겉으로나마 배려해 주는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아주 큰돈은 바랄 수 없으니, 위자료로만 살려면 인프라가 조금 낙후된 곳이 좋지.’
벤자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알아보겠습니다.”
“네?”
“부인의 다음 집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로 거길 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정 신경 쓰인다면 황실에서 문서를 받아 오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무슨 접근금지령을 황실에서까지 받아 오는가. 그렇게 되면 황실에서 그레이스한테 쓸데없는 관심을 가질 것 같았다.
이미 이번 이혼으로 호기심이 생길 게 뻔했다. 대체 저 여자는 뭐가 아쉬워서 이런 완벽한 남자와 이혼하려고 하는가? 하면서 말이다.
“그런가요…….”
“네.”
“그렇군요. 하지만 저희가 이혼하면 저는 부인께 공작가의 기사단을 붙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명목이 없으니까요.”
벤자민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누가 저를 노리겠어요.”
“…….”
훌쩍.
벤자민은 계속 훌쩍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라고 했습니다만 사실 하나 더 있습니다. 두 가지였네요. 저는 방금 부인에게 거짓말을…….”
“네, 각하. 진정하고 말씀하세요.”
그레이스가 양손을 들어 벤자민을 진정시켰다. 벤자민은 또 훌쩍, 하며 말을 이었다.
“유예 기간 동안 저희는 자주 만나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어쩌면 공식 행사에 부부 동반으로 나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레이스는 이 사실을 처음 들었기에 쩌적 얼어붙었다. 벤자민은 그녀가 당황하는 것을 매우 잘 이해했다. 그녀는 귀족 사교계를 정말로 싫어했다.
“공식 행사를 나가는 건 정말 최악의 경우뿐입니다.”
“각하도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벤자민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공식 행사에는 신전도 참가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 그가 싫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유예 기간 동안은 부부로서 다시금 대화해 보고,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이혼하라는 뜻으로 있는 겁니다. 물론…….”
“물론?”
“그사이에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간청을 드려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재산 일부분을 황실에 넘겨야 하지만 부인께서 원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아뇨,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렇군요. 그건 다행입니다.”
그레이스가 아무리 목숨 부지를 위하여, 그리고 벤자민과 떨어지고 싶다고 해도 그의 재산을 더 축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저 사람도 나 때문에 돈을 더 쓰고 싶지는 않을 테고.’
그레이스는 우느라 눈과 코가 새빨개진 벤자민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럼 들어가서 쉴게요. 차는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부인께서 커피를 더 좋아하시는데 준비하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벤자민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조금 놀랐다.
‘알고 있었네?’
마실 때는 그렇게 티를 내지 않았던 거 같았는데.
그레이스는 입술을 말아 깨물고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슬금슬금 별관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벤자민이 눈가를 문질렀다.
“아벨 번턴.”
“네.”
이 모든 상황을 숨어서 지켜보던 벤자민의 보좌관, 아벨이 나타났다. 그의 안색은 파리했으나, 동요를 나타내지 않았다.
“최근 부인께 접근하는 수상한 자는 없다고 했지?”
“네.”
“그래.”
샐리가 요즘 그레이스의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작업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벤자민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물론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믿었지만, 세상을 마냥 믿지 못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했다.
그렇다고 모두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벨이 벤자민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각하, 아뢰옵기 송구하나 혹시 정말 마님과 이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혼?”
아벨의 질문에 벤자민이 두 글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목소리는 감미로웠으나 감정은 무미건조했다.
그의 시선은 별관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유예 기간이 지날 때까지, 부인께서 이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변치 않으면 해 드려야지. 내가 어쩌겠어. 싫다는 부인을 억지로 붙잡고 있을 수도 없고 말이야.”
“…….”
벤자민이 웃었다.
“그러니 나는 최선을 다해서 부인께서 스스로 머물도록 해야지. 안 그런가.”
평소의 공작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오히려 그 모습이 두려웠다.
벤자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제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
황실 법무실.
황실 공무원은 일이 많았다. 정말 더럽게 많았다. 제국은 살기 좋고 평화로웠으며, 그건 전부 황실 공무원이 갈린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날이 갈수록 제국이 발전하며 살기 좋아져, 일 처리가 쉬워졌다. 귀족을 상대하는 일이 엿 같다는 것도 상당히 옛말이었다.
황실 공무원에게 무례를 가하면 그에 맞는 처벌이 따랐으니, 아무리 다른 곳에서 진상으로 소문난 귀족이라 해도 그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들은 끝없이 쌓인 서류 사이에서 할 짓 없이 노닥거리는 한 사람을 보았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아니라 길을 잃은 귀족이네만.”
“그 누구도 속지 않을 거짓말입니다.”
“황족의 말을 부정하는 건가?”
“지금 본인께서 황족이라고 하셨습니다.”
“흠.”
그의 외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새까만 흑발, 제비꽃 같은 빛의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날카롭고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자.
그것보다 가장 유명한 점은 근 몇 년간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사고뭉치란 점이었다.
‘그나마 성녀 아리아 님께서 나타나신 후로 점점 조용해지시는 것 같지만.’
눈치 빠른 이들은 황태자인 실베스터가 아리아와 미묘한 기류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다짜고짜 ‘그분을 만나러 가지는 않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는 황태자였고, 상대 여성은 제국의 하나뿐인 아름다운 성녀였다.
그때, 쿵쿵쿵 다급하고 빠른 뜀박질 소리가 복도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예법에서 한창 어긋난 소리였다.
실베스터를 상대하던 이가 눈을 찌푸렸다.
“브, 브루노 님!”
“다니카, 황실 공무원은 황실의 이미지이니 예절을 지키라고 누누이…….”
“이혼 신청서입니다!”
“응?”
솔직히, 브루노는 그게 뭐 어쩌라고? 였다.
그야, 황실 법무실까지 올 정도의 이혼 신청서라면 고위 귀족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고위 귀족이 이혼한다고 해 봤자, 솔직히 브루노는 알 바 아니었다. 적당한 유예 기간을 측정해 주고 ‘그 기간 동안 잘 생각해 보세요~’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다니카가 말한 가문의 이름에 브루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펠튼 공작가에서 왔습니다.”
“……!!”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건데.
2년 동안의 부부 생활 동안,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은 별의별 게 다 나왔지만, 이혼한다는 소문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벤자민은 절대로 제 아내를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다들 황제가 주선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면서도 어찌 되었건 이혼은 절대 하지 않겠거니 했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뭐 곧 중요한 일이 있다거나 뭐가 있는 건 아니었다. 있다고 해도 공작 부인이 참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법무실에서 단 한 번도 좋지 않은 이슈로 이름을 올린 적 없는 공작의 이름이 나오자 일하던 모두의 동작이 얼어붙었다.
이 소란의 한가운데서 실베스터가 중얼거렸다.
“베…… 펠튼 공작이 이혼한다고?”
⋆★⋆
이혼 신청서를 제출하고 2주일이 지났지만, 제도는 조용했다. 몇 번의 신문이 발행되고 나서도 별말은 돌지 않았다.
‘소문이 나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레이스는 중얼거렸다.
이혼장을 작성하고, 그래도 공작 부부의 이혼이니 소란이 일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도 돌지 않았다.
나중에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보좌관인 아벨에게 물어보니, 대귀족일수록 정정 기간 동안은 이혼 신청 사실을 가급적 비밀에 부친다고 한다.
‘하기야 진짜 이혼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정세에 영향이 미치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레이스는 그럼 그동안은 티백 사업을 더 도와줘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작 부인인 것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좀 태평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조금 쉽게 생각하고, 이기적인 것일 수도 있었으나 별관은 갑갑했다.
“숨쉬기 힘들어.”
혹시 소문이라도 날까 봐 별관에서 틀어박혀 지낸 그레이스였다. 그동안 취미 생활도 하고, 차도 마시고 책도 읽는 등 여러 가지를 했으나 기분이 괜찮아지지 않았다.
‘장소가 문제인가?’
그레이스가 눈을 찡그린 채 원인을 떠올리던 중, 별관의 집사가 은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마님, 황실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유예 기간이 정해졌다고 합니다.”
“그래?”
직접 가서 보고 받는 게 아니라? 둘 다 제도에 있는 게 뻔한데도 편지로 올 줄은 몰랐기에, 그레이스가 토끼 눈을 뜨고 집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