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5)화 (25/131)
  • 25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침묵만 돌았다. 결국 벤자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날이 좋습니다.”

    “네, 날이 좋군요.”

    그레이스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새하얀 테이블보가 덮인 티 테이블 위에는 아름다운 티포트와 찻잔, 그리고 적은 종류의 다과가 놓여 있었다.

    그레이스는 제 허벅다리 위에 올라가 있는 통통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

    ‘아니, 뚱뚱하다는 말이 맞나?’

    분명 살을 또 한참 빼도 여주인공인 아리아처럼은 되지 못한다. 애초에 기본적인 외모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몸을 올곧게 폈다.

    자신의 기분이 얼마나 진창에 구르는 것 같다 한들, 외관에서부터 주눅이 들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당당해 보이기 위해 애썼다.

    원래의 그레이스라면 자신의 큰 몸집에 주눅 들어 늘 어깨를 굽히고 옷으로 꽁꽁 싸맸을 것이다.

    옷은 조금이라도 날씬해 보이기 위해 어두운색만 골랐을 테고 괜히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옷은 입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또 좋아는 해서, 옷장 속에 고이 모셔 뒀지.’

    미련한 여자.

    지금의 그레이스는, 원래의 그레이스를 향해 속으로 비난했다.

    사실 자신을 향한 비난이기도 했다.

    “최근, 부인께서 외출을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날에 관하여…….”

    벤자민은 말하려는 것을 주저했다.

    그레이스는 시선을 위로 올려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연한 갈색 머리칼이 미세한 바람에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햇빛에 비치는 녹빛의 눈동자는 그 어떤 나뭇잎보다도 싱그러울 터였다.

    수많은 여인이 그를 사모한다고 했다.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남자를 노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야, 그레이스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단 한 번도 부부 관계는커녕 손도 제대로 잡은 적 없으니까.

    ‘아니, 저번에 잡긴 했지.’

    그레이스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달콤한 향과 달리 쌉쌀한 맛이 나는 차였다.

    “각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부인.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그레이스가 말하자, 찻잔을 든 채로 그가 미소 지었다. 그레이스는 그의 미소가 가증스러웠다.

    그 어떤 다정한 표정을 지어도 그레이스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성녀의 소원’이라는 소설 속에 나오는 ‘서브남주’이다.

    황실에 의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갈발다정남 속성인 척 여주의 주변을 알짱거리다가 나중에 새까만 속내를 드러내는 서브남주, 그것이 그레이스의 남편…….

    벤자민 펠튼 공작이었다.

    ‘애초에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있는 게 무슨 다정남이야.’

    소설로 읽을 때는 벤자민을 좋아했다. 그레이스는 다정한 남자를 좋아했다. 그만큼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벤자민의 행적에 경악했다.

    아니, 그리고 사실 지금도 벤자민을 좋아했다. 그는 실제로 다정했다. 하지만 결국 아리아를 좋아하지 않는가.

    소설이 그러했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짝사랑하다가 그 상대에게 그 답으로서 죽음을 선물받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여상히 웃는 벤자민을 보다가 말했다.

    “우리 이혼해요.”

    그레이스가 이혼하자는 말을 뱉자, 벤자민은 찻잔을 든 채 얼어붙었다.

    벤자민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용인 모두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이혼하자는 말을 뱉은 그레이스만이 초연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

    “각하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가문을 위해서 저와 결혼한 것도 알고 있고요.”

    달칵, 그레이스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맑은 찻물에 비친 제 모습은 아름다운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이혼해요. 나중에 절대로 딴소리도 하지 않고, 각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겠습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기뻐하며 바로 이혼 합의서를 작성하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상당히 예상외의 것이다.

    “……부인.”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자 본 것은…….

    “부인,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한 벤자민이었다.

    “각하?”

    “제,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부인을 모시는 데 있어 실수라도 한 걸까요?”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부인, 부인께서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것이고 제 얼굴이 보기 싫으시다면 평생 가면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애원했다.

    “그러니까 제발 제 곁을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

    그레이스는 당황스러운 낯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제가 부족함이 많은 건 압니다. 잘못, 잘못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늘 다정하신 부인께서 이혼하자고 하시는 것이겠죠. 갑자기가 아닐 것입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으며 계속 말했다.

    “부인은 늘 생각이 깊은 사람이셨으니, 분명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 신호를 제가 알아채지 못한 탓입니다.”

    벤자민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가문의 가주이자, 이 나라의 대단한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작 못나기로 소문난 그의 부인을 붙잡기 위해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각하, 일어나세요.”

    그레이스가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벤자민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재고해 주실 건가요?”

    “…….”

    벤자민도 억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거로 이혼을 재고해 줄 거였다면 애초에 그레이스가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중얼거렸다.

    “만약, 그러면 부인께서 좀 편해지실까요? ……그러면,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예,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 부인께서 그리 선택하신 거겠지요.”

    “…….”

    그냥 살려고 하는 이혼인데.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눈가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못?’

    잘못이 있나? 그레이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를 아내로 둔 채 아리아를 남몰래 사랑하는 것은 나쁜 짓이었다. 하지만, 벤자민도 원치 않는 결혼이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그레이스에게 최대한의 다정을 베풀기는 했다.

    사랑하지 않음에도 다정한 남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했으며,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안주인으로서의 일을 거의 하지 않는 그레이스에게 친절했다.

    그래서 사실, 순간 마음이 흔들린 것도 맞았다. 벤자민에게 미련이 남아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벤자민이 머뭇거리며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대귀족의 경우에는 이혼을 황실 법정에서 관할합니다. 저의 행동 하나하나가 제국에 영향이 가기 때문이죠.”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말에 일리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더 알아보고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아뇨, 부인께서 이런 사정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죠.”

    “저는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 공작 부인이에요. 알아야 하는 게 맞죠.”

    “…….”

    그레이스의 또박또박한 대답에 벤자민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제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어요…… 집안일은 하지 않고, 바깥일에나 신경 쓰다니 애초에 각하께서 저에게 이혼하자고 하는 게 바르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부인께 절대로 이혼하자고 할 수 없습니다만.”

    벤자민의 목소리가 울컥, 하고 낮게 들끓었다.

    그레이스가 흠칫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긴 황실에서 이어 준 결혼인데, 벤자민이 먼저 헤어지자고 할 수는 없지. 해도 내가 먼저 제안해야 했을 테니까.’

    그런데 왜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울면서 매달리는 걸까. 이러면 마치 그레이스를 좋아하는 거 같잖아.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리아를 직접 본 그레이스는 차마 ‘벤자민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 원작과 다를 수도 있잖아.’ 하는 기대 따위 할 수 없었다.

    아리아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을 자주 보는 그가 그레이스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그, 그랬군요.”

    “……네.”

    사용인들은 둘이 우두커니 서서 대화를 나누는 걸 엿듣기만 했다. 숨을 쉬었다가 기침이라도 뱉을까 봐 두려웠다.

    그 어떤 소음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 둘은 꼭 사이가 좋아질라치면 갑자기 거리감이 생겼다. 사용인들은 작은 주인님을 보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제발 저 둘이 좀 쭉 사이가 좋았으면, 하고 바랐다.

    “아무튼, 저희가 이혼을 하려면 절차가 복잡한데, 유예 기간이 있습니다.”

    “유예…… 기간이요.”

    “귀족에 따라 배당되는 기간은 다르겠지만 최소가 한 달, 최대가 1년입니다. 부인께서는 이 저택을 최대한 빨리 나가고 싶어 하실 테니 제가 황제 폐하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벤자민은 미묘하게 눅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

    “이혼, 장…… 작성을 해서 제출해야 합니다.”

    “그렇겠죠…….”

    어쩐지 둘 다 떨떠름해졌다.

    “부인께서는 이혼하고 어디에서 사실 겁니까? 고향으로 돌아가시나요?”

    린덴가로 돌아갈 거냐는 물음에 그레이스는 고향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기는 하지만 풍경이 아름답고 좋은 곳이었다.

    “…….”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쩐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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