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4)화 (24/131)
  • 24화

    ⋆★⋆

    릴리는 그레이스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건 배려였다. 그레이스도 그들에게 어쩌다가 미혼모가 되었는지 절대 묻지 않았다.

    각자에게는 사정이 있었다. 모든 걸 다 알아야만 하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그녀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고아원에 갔을 때, 릴리는 벤자민과 만났을 때 있던 일과 그레이스가 그를 ‘각하’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서도 티를 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레이스가 이 고아원에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저 호의로 모두를 불러 모아 새로이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레이스가 처음 만들었던 티백을 베이스로 패턴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소리가 들렸다.

    샘플을 만들고, 그림 솜씨가 좋은 이들은 티백의 태그를 만들었다. 절대 잔 속에 빠지지 않게끔 태그 사이에 딱딱하고 얇은 것을 끼워, 무게감을 더했다.

    그레이스는 그들과의 대화에 참여하면서도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

    기분이 좋다가도 벤자민과 얽히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정말, 그레이스의 기분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 원하지 않는 고양감을 선사하기도 했고, 순식간에 처박아 넣기도 했다.

    호의적인가? 싶다가도 갑자기 거리감을 두었다.

    ‘왜?’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당연하지, 그레이스는 어차피 벤자민과 이혼할 것이며, 굳이 이혼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진실을 듣기 겁났다.

    ‘서둘러야겠어.’

    처음에는 식당과의 거래가 성공하고 나서, 식당 외 가정집에서도 팔리기 시작할 때쯤 슬슬 손을 뗄 준비를 하려고 했다.

    당연했다. 그전에는 그레이스가 사업에 들인 사재를 절대로 메울 수 없었다. 상당히 큰돈이 들어갔다.

    웃겼다. 애초에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했는데 그레이스는 또 그 사재를 갚으려고 했다. 그레이스는 계속 그 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고 어디에도 내가 있어도 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식당에서 대량으로 주문을 시작했다고 했을 때쯤이면 손을 떼도 나쁘지 않겠어.’

    그리고 다달이 그냥 수익 몇 퍼센트만 떼어 달라고 부탁해야지.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물론 수익금을 받으러 제도에 올라와야겠지만, 그 정도 수고는 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너무 당연하게 이혼하고 저 멀리 있는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식당에 가서 홍보하는 건 여러분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레이스의 질문에 모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린덴 씨는 이미 엄청 많은 일을 해 주셨잖아요.”

    “린덴 부인, 고마워요. 돌아가서 쉬어요.”

    모두 그레이스를 배웅했다.

    그레이스는 한참을 걷다 힘없는 걸음으로 공작저 뒷문 쪽으로 향했다. 뒷문에 가까워질수록 등 뒤로 기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늘 수고가 많다고 말했겠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그냥 말하지 말까 고민하다가 기분에 휩쓸려 남에게 화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늘 수고가 많아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매일 이어지는 똑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기사의 대답에 힘이 없었다.

    그레이스는 그저 웃었다. 그가 왜 오늘따라 다른 뉘앙스로 대답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해도, 그걸 직접 목격하는 건 다를 테니까.’

    그리고 그걸 아무리 무능하다 해도, 가문의 안주인이 남편의 외도를 목도한 상황을 지켜보는 일은 기사로서 괴로웠을 게 뻔했다.

    그레이스는 별말 하지 않고 별관으로 향했다.

    다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밝았던 그레이스가 어두워지니, 사용인들의 눈썹도 덩달아 처졌다.

    최근 그레이스가 많이 밝아진 만큼 우울해지면 그 대비가 극심했다.

    그녀의 감정 기복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때마다 드는 걱정이 덜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함부로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사용인인 샐리 또한 바로 무슨 일이냐 묻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도 그레이스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자 그제야 물어보았다.

    “방에 혼자 있고 싶어. 오늘은 밥 안 먹어도 될 거야. 밖에서 먹고 왔거든.”

    사실 입맛이 없어 뭘 딱히 먹지 않았다. 먹으면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서라도 게워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알 턱도 없었거니와, 안다고 해도 별수는 없었다. 그레이스는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가 침대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래, 그레이스는 인정했다.

    감정을 완벽하게 분리하지 못했다.

    결국, 일기장을 찾아 기억을 얻은 대가로 그녀는 ‘그레이스 펠튼’이 되었다.

    ⋆★⋆

    ‘식당 열 곳에 넣어 봤고, 그중 세 곳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지.’

    그 후로 그레이스는 벤자민과의 접촉을 피했다. 이제 그냥 실내에서 스트레칭이나 하고 별관 내를 걸어 다니고, 고아원에서 하는 활동을 다른 가벼운 운동들로 대체했다.

    그레이스는 원래부터 활동량이 적었기에, 가벼운 운동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살이 많이 빠지지는 않았지만, 거울을 보면 만족이 될 정도였다.

    1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좋은 결과였다.

    그레이스는 클레타에게 이제 자신은 티백 사업에 자주 관여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클레타는 화들짝 놀랐으나, 그간 차근차근 준비한 계획서를 클레타에게 넘겨주었다.

    클레타는 아직 어리고 유약한 성정이었으나, 자신의 사람을 지킬 줄 아는 뚝심 있는 아이였으니 그레이스는 걱정이 적었다.

    ‘그리고 어차피 아주 가끔 들르기는 할 테니까.’

    돈은 받으러 와야지. 그렇게 큰돈은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레이스는 저번에 보았던 펠튼 공작 부인의 장부를 떠올렸다. 그것은 액수가 거의 일치하는, 그러니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은 약간의 구멍 있는 장부였다.

    ‘그걸로 책잡히면 거의 한 푼 없이 끝날지도. 음, 그래도 사람 자체가 겉으로는 나쁘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돈은 주려나?’

    그레이스는 이미 빨리 이혼 얘기를 꺼내기로 다짐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제국 법전을 더 살펴보고 유리한 방안을 생각해 봤겠지만, 지쳤다.

    슬슬 괜찮아질 거 같다고 기뻐하다가 진창에 처박히는 것에 질렸다.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는 것 따위 싫다고.’

    그것도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말려서…….

    그레이스는 어차피 아리아를 선택할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을 죽일 사람이니까 이혼하겠다는 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날 죽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여자를 택할 건 확실하니까, 그 확실한 미래를 목도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황실에서 강제로 한 결혼이더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 그레이스는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했다.

    고작 사람 하나가 자신의 기분을 이렇게 쥐락펴락하는 것도 싫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정정했다. 그래, 고작 한 사람이 그 벤자민 펠튼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왜 벤자민을 좋아하게 되었더라. 그런 기억이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그냥 이 짝사랑이 불쾌했다.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범인이 누가 되건 결국 죽게 되는 결말.

    아무리 자신에게 의문스러운 다정을 보인다 해도 죽을 것이다.

    저택의 모두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고 편의를 보인다 해도, 결국 그레이스는 ‘의문의 병사’를 하게 된다. 벤자민이 정말 원래의 그레이스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를 사랑해서 떠나지 못하다가 마음의 병으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벤자민이 진짜 죽였을지도 모르고.’

    그레이스는 웃었다.

    ‘소설 내에서 벤자민 펠튼은 그레이스에 대해 아리아에게 종종 이야기하고는 했지.’

    하지만 그가 그레이스의 병환에 대해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리아는 성녀였다. 무슨 병이든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 성녀로서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지?

    거짓말이니까. 그레이스에게 병이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레이스는 눈앞의 다정보다 활자에 적힌 미래를 믿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를 ‘의문의 병사’시킬 수 있는 사람은 벤자민뿐이었다.

    미소 지었던 그레이스의 표정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설렁줄을 당겼다.

    고용인이 들어왔다.

    “각하는 바쁘실까?”

    “……주인님께서는 본관에 계실 것입니다.”

    “그래? 만약 바쁘지 않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성급하면 뭐 어떤가. 애초에 기억이 돌아왔을 때부터 사재만 챙기고 이혼하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아리아를 실제로 만나고, 나와 비교한 다음 결국 이렇게 원래대로 돌아가기 전에 말이다.

    원래부터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던 것보다 한번 괜찮아 진 뒤 다시 우울에 사로잡히는 게 더 죽을 맛이었다.

    그레이스는 헤엄치는 법을 까먹은 상어가 된 기분이 들었다.

    ⋆★⋆

    정원은 늘 꽃이 아름다웠다.

    그레이스가 벤자민을 만나자고 청하자, 바로 정원에서 차를 마시자는 답장이 왔고 티타임은 금방 준비되었다.

    꽃이 늘 아름답게 피어 있는 정원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법이다.

    아름다운 장소와 아름다운 사람,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다면 없던 마음도 생기고 잔잔하던 가슴도 쿵쿵 뛰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오히려 제 앞에 있는 이를 보니 마음속이 침전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