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내용을 보는 것쯤이야.’
어차피 무슨 사업이고, 자신에게 얼마나 좋은 이득이 될지에 관한 이야기겠지, 하며 캐서린이 편지를 펼쳤다.
하지만 편지의 첫 줄을 읽고, 캐서린은 마지막까지 찬찬히 읽어 내릴 수밖에 없었으며, 다 읽는 순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편지에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첫 줄은 날씨에 관해 적혀 있었다. 구름이 조금 껴 있는 날이라, 누군가는 흐리다고 하겠지만 아이들이 아무리 뛰어놀아도 새빨갛게 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고아원의 방이 몇 개가 어떻고, 어디는 낡았는데 청소해 보니까 좋더라.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캐서린에게 물어보며, 그러면 좋겠다고 안부를 물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는데 캐서린은 그게 너무 슬펐다. 그녀에게 다정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었다.
“이 사람 진짜 이상하네…….”
자신을 고용하겠다고 했으면서, 왜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쓰지 않는지.
캐서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얇은 벽 너머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아, 이사 가야겠다.’
이렇게 벽이 얇은 방이면 소리 내서 울지 못하잖아.
마침 계약 기간이 다음 달이면 끝이었다.
캐서린은 작게 웃었다.
⋆★⋆
그레이스가 몇 번 더 편지를 보낸 끝에, 모두가 승낙했다. 그중 한 명은 한 달 더 다른 근무를 마저 끝낸 뒤 합류하겠다고 했지만 쾌거였다.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레이스는 빨리 생산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레이스는 역시나 고아원으로 향했다. 일이 진척될수록 그녀는 고아원에 머무는 날이 길어졌다. 공작저보다 고아원이 좋았다.
아이들의 생모와 만나 보니, 그들은 다 성격이 제각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레이스는 완벽하게 정리된 그들의 침실을 둘러보며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직물 공방과 거래를 해야겠어요.”
“직물 공방과요? 저희처럼 제대로 되지도 않은 곳과 거래를 하려고 할까요? 게다가 어차피 많이 필요하지도 않을 텐데…….”
클레타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레이스를 제외하면 다들 허름한 차림이었다. 물론 그레이스가 공작가의 힘을 쓰면 어떤 규모의 직물 공방이든 거래에 응하겠지만, 그건 그레이스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직물 공방 쪽을 알아봤는데, 유명한 곳 말고도 작은 곳이 몇 군데 있더라고요. 그곳이라면 잘 이야기해 보면 거래에 응할 거예요.”
“으음…….”
“보통 거대한 공방이 드레스 숍과의 거래를 독식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소일거리나 작은 거래는 하고 있겠지만, 아쉬운 점은 있을 거예요. 작은 거래라도 놓치고 싶지 않겠죠.”
그레이스는 나름대로 준비해 온 말을 꺼내며 클레타를 설득했다.
“연습품이나 하자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갈까 해요. 저희가 만들 건 옷 같은 게 아니니까요.”
초기에는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주기적인 손님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도 팔기 애매한 상품을 사는 고객.
이것은 수익이 별로 없는 작은 가게에서는 꽤 반길 만한 것이라고 그레이스는 추측했다.
“게다가 티백은 작지만 저는 소량만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소량만 만들 거면 직원은 클레타 한 명이면 충분한걸요.”
그건 그레이스가 제안한 월급과도 맞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높은 월급을 제안했지만, 동정만으로 측정한 금액이 아니었다. 그에 합당한 노동도 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반응이 안 좋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지만 반응이 좋았을 때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도 문제죠.”
굳이 작은 공방을 찾아가는 것 또한, 대비였다.
거대한 직물 공방을 방문하여, 그들의 도제 체제를 이용해 연습용으로 제작한 애매한 질의 모슬린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원작의 내용을 꽤 잘 기억하고 있다는 ‘빙의자’라는 장점이었다.
‘큰 공방은 위험해.’
게다가 어차피 집사가 공인한 ‘마음대로 써도 되는 사재’였다.
사재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집사가 말했으니, 그레이스가 해당 돈을 어떻게 쓰든 이혼 과정에서 흠 잡힐 사유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안살림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겠지.’
가문에 기여한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벤자민이 일부러 합방 날마다 저택을 비운다는 것을 거론하면 상당한 동정의 시선이 그레이스에게 꽂힐 것이다.
꽤 불쾌한 동정의 시선일 테지만 말이다.
그레이스는 그럼, ‘마음의 상처를 깊게 입어 아내의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바, 이게 말이 되냐?는 반응이 조금 나오겠지만 몇몇은 그래도 이해가 된다며 끄덕일 만도 했다.
‘그런 것치고는 다정하지만…….’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다정하게 웃는 벤자민의 얼굴이 스쳤다. 그녀는 또 숨 쉬듯 자연스럽게 벤자민에 대해 떠올린 것을 깨닫고 스스로의 이마를 세게 쳤다.
“리, 린덴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설명할게요.”
그레이스는 숨을 골랐다. 여긴 별관도 아닌데 왜 벤자민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는지.
“처음 만든 티백은 일단 제도의 식당 몇 군데에 공짜로 돌릴 예정이에요.”
그레이스는 제도 식당 몇 군데라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식당의 수는 아주 많았다. 그 많은 곳에 공짜로 물건을 돌리면 이는 시작부터 적자였다.
“저희가 판매할 종류는 애초에 말린 과일을 넣은 블랜딩 계열이죠. 식당에서 파는 것과 종류가 달라요. 게다가 직접 우리는 게 아니니까, 익숙한 것이 아니라서 대뜸 사 가라고 하면 안 살 가능성이 커요.”
모든 사람이 낯선 물건을 환영하지는 않는다.
압화 비누가 한 번에 다 팔릴 수 있던 이유도 축제의 들뜸 속, 그렇게 특이하지는 않지만 예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액체 비누를 통에 넣어 팔았거나, 대뜸 종이비누를 팔았으면 안 팔렸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도 그렇게 샘플을 돌리고 나면 적어도 한 군데는 반응이 올 거라고 확신했다.
“티백은 간편하잖아요. 찻잎의 품질만 유지하면 맛의 균일성을 지키는 것도 편해요.”
늘 바쁜 식당에 비해 티백은 간단하고 편했다.
식당의 회전율을 높이고 예산을 아끼게 만드는 데에 좋은 상품이 앞에 있는데 식당의 체면이고 뭐고가 무슨 상관인가.
식당은 사업의 장이다. 땅 파서 운영하는 게 아니고, 그들은 돈을 따랐다.
찻잎의 떨어지는 품질은 말린 과일이나 꽃잎을 섞어 무마했으며, 그레이스가 노리는 식당은 귀족가에서 운영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평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들에만 샘플을 돌릴 예정이었다. 그들은 평생 최고급 찻잎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테니, 품질 차이에 대해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식당에 나눠 줄 티백은 한 식당당 약 7개 정도면 되려나요. 직원 중 몇 명은 나눠 마실 수 있을 정도로요.”
바깥에서 짐마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청한 비품이 도착하는 소리였다.
생각보다 거대한 짐마차의 크기에 클레타와 다른 여자들이 놀랐다.
“이게 전부도 아니에요. 식당 중 몇 군데만 거래하기 시작해도 금방 바빠질 거예요.”
순식간에 매일 많은 양을 납품해야 하며, 그 식당에 티백 상품도 홍보할 예정이었다.
낯설더라도 계속 보다 보면 한 번쯤은 사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냥 한번 차를 사 마시면서 아이를 도울 수도 있다? 이건 완전 이득이었다.
‘그리고 제도의 물은 지금 그냥 마시기 힘들거든.’
론델 운하의 정화 작업을 끝냈음에도 물에서 미묘하게 이상한 맛이 났다. 서부 땅의 오염이 원인인 걸 알게 된 아리아가 떠나게 되는 것이 원작의 후반부 에피소드였다.
“……그럼, 이제 공방 쪽으로 가 볼까요? 혼자 가기는 그러니까, 한 분이라도 같이 가 주시겠어요?”
그레이스는 혹시 모를 보험을 위해, 직물 공방과 고아원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둘 예정이었다.
그레이스의 제안에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읽고 있던 여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나 함께해도 괜찮은 건가요?”
“아무래도 공방 쪽이니,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건 마리안이 잘 알지 않나?”
그레이스는 마리안이라고 불린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신문이 들려 있었다.
“아, 괜찮아요. 중요한 걸 보고 있던 건 아니거든요.”
“……채터스 잡지인가요?”
“린덴 씨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레이스는 ‘채터스 잡지’를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뇨, 딱히.”
제국 내에서 가장 자극적인 이슈를 다루는 간행물을 꼽자면 단언컨대 채터스였다.
진실을 싣기도 했지만, 주로 자극적인 언어로 포장한 글을 세상에 공개했다.
“…….”
그레이스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펠튼 공작 부인’이 저 잡지에 종종 실리고는 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그랬으니까.’
“이번 채터스를 보셨나요? 오랜만에 ‘펠튼 공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더군요.”
“그런 추태를 부리다니, 펠튼 공작가의 유일한 오점이죠. 공작님도 안되셨어요.”
“아, 성녀님께서는 혹시 공작 부인을 실제로 뵌 적 있으실까요? 공작님과 종종 담소를 나누시던데.”
최근에 실린 적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레이스는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