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1)화 (21/131)

21화

그레이스의 독단적인 의견일 수도 있었지만, 클레타는 그레이스의 제안이 어떤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고용이라는 형태로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항상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뜻이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러면 티백을 만들기 위한 장소를 구할 자금이 들지 않으니까요.”

“그쵸?”

그레이스가 방긋 웃었다.

“홍차 잎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시간이 좀 걸리지만, 이번에 구…… 알고 있는 차밭에서 원래부터 만들어서 보관해 둔 홍차 잎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운이 좋네요.”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품질이 그리 좋지 않아 판매하지 못하던 것이라고 해요. 그 덕에 더 저렴한 값으로 거래할 수 있게 되었죠.”

제도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영지 꼬투리에 붙은 차밭이었다. 그래도 입지가 좋아 비싸지 않을까 싶었는데 싸게 거래할 수 있었다.

‘작년에 재배한 찻잎의 질이 낮아 심한 적자였어. 그래도 그 땅은 앞으로 잘될 거야. 아리아가 서부 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지나가다 들러서 축복해 줄 테니까.’

그레이스는 그 품질 낮은 찻잎을 모조리 측정가보다 조금 높은 가격으로 구매하는 대신, 차밭의 땅과 찻잎을 2년간 독점하기로 했다. 2년 뒤의 일은 그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질이 낮은 만큼 그대로 팔 생각도 없어.’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타에게 물었다.

“그분들에게 언제쯤 일을 옮길 수 있는지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

고아원의 아이는 총 13명.

그중 어머니가 있는 아이는 7명.

클레타와 그레이스의 제안을 승낙한 여성은 4명.

‘왜?’

클레타의 보고를 전해 들은 그레이스는 우울한 낯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니,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하지만…… 왜?’

티백이 성공하는 건 둘째 치고 아이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라도 모두 승낙할 거라 생각했다.

‘모두가 승낙하지 않으면 의미 없어.’

전부 같이해야 한다고.

지금은 규모가 작지만, 앞으로를 위해 미리 분업을 해 둬야 한다. 그레이스는 일이 자리 잡으면 그냥 이름만 사장으로 발 뺄 예정이었다.

티백 사업에 공작 부인의 이름이 얹어지면 안 되었다. 그레이스는 이혼할 예정이니까.

‘공작과 이혼하면 사업이 잘되다가도 망할 수 있어. 제국에서 이혼녀란 그런 거야.’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다.

사활이 걸린 사업이었다. 자신의 이미지 쇄신이라든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그냥 클레타라는 착한 사람 조금 도와주려다 생긴 복잡한 일이었다.

그냥 쉽고 빠르게 원장을 찾아 족친 다음 횡령액을 토해 내게 하고, 고아원의 땅을 사 클레타에게 땅문서를 주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그레이스 혼자서 은밀히 처리할 수 없고, 자신이 없으면 클레타는 더 이상 땅을 지킬 방법이 없다.

원장을 찾아 족치는 순간 벤자민한테 들킨다.

그러면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호오, 몰랐는데 부인은 상당히 과격하신가 봅니다?’ 하면서 다정한 가면을 벗고 그레이스를 쓱싹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벤자민이 정말 그럴 리는 만무했지만, 그레이스의 상상 속 벤자민은 그러했다.

‘아직까지 아리아가 황태자 실베스터랑 진전도 없고, 나는 무해하니까 놔두는 걸 거야.’

그레이스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벤자민이 다정해질 때마다 솔깃하다가 또 갑자기 거리를 두면 마음은 싸늘해지고 또 이 와중에 갑자기 벤자민 생각이 나서 심란했다.

베개를 끌어안고 뒹굴뒹굴하며 심란해하는 그레이스를 훔쳐보는 샐리 또한 마음이 심란했다.

“……샐리.”

“네.”

“만약 누가 엄청 엄청 좋은 제안을 해. 내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아는 사람 이야기야.”

“…….”

그레이스는 정말 진실만 이야기했다.

“지옥 같은 곳일지도 몰라. 물론 진짜 지옥이 아닐지도 모르고, 남들이 멋대로 지옥 같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거기보다 나은 대우를 해 주겠다고 하는데 거절을 하면 왜일까?”

“그, 글쎄요.”

“……너도 모르겠지.”

혹시 좋은 곳에서 일하고 있나?

그레이스는 아이들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혹시 다른 아이들이 열등감을 느낄까 부러 비슷하게 챙겨 주는 걸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클레타의 반응을 보니 모든 미혼모들의 상황은 비슷하게 고단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너무 힘들면 마음의 여유도 없고, 믿음이 잘 안 가지 않는가. 클레타의 경우도 축제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아이들로 인해 정신없는 틈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꼬드겼다.

만약 차분한 분위기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으면 실패했으리라.

‘내가 별관에 있을 때와 비슷한 걸지도.’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되었다. 별관에 오래 박혀 있을수록 우울한 기분에 잠식되었다.

그레이스는 베개를 꼬옥 끌어안고 벌떡 일어났다.

“좋아, 결심했어.”

그레이스가 결심했다고 말하면 뭔가 샐리가 알던 ‘마님’답지 않은 다짐이 튀어나왔다. 샐리는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뭐, 뭐를요?”

잔뜩 겁먹은 샐리가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만나 보러 가야겠어.”

“네?”

“엄청 비싼 티는 나지 않고 사람의 성의를 봐서 거절하기는 어려우며 받았을 때 기분 나빠지지 않는 선물이 뭐가 있을까.”

샐리는 그레이스의 진지한 고민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샐리의 머릿속에는 다른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샐리는 마음속으로 벤자민을 열심히 외쳤다. ‘주인님! 어디 계세요! 얼른 무릎 꿇고 사과든 뭐든 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님이 다른 마음을 먹을지도 몰라요! 물론 스스로를 해칠 생각은 없으시니 다행이지만! 그치만!’ 하고 외쳤다.

“역시 직접 만든 거지? 저번에 각하께서 주신 꽃으로 압화 편지지도 만들었거든.”

샐리는 울고 싶었다. 대체 누군지 모를 사람이지만 왜, 남편이 준 선물로 만든 물건을 주는가 하고.

하지만 그레이스를 말릴 수는 없었다. 샐리가 그레이스를 모신 지가 1년 약간 넘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동안 본 그레이스 중 가장 활기차 보였다.

이렇게까지 안색이 좋고 밝은 적이 없었다.

비록 몇 주 전의 그레이스는 심하게 혼란스러워 보였고, 말투도 오락가락했으며 감정 기복이 전보다 심각해 보였지만 말이다.

‘태풍이 온 뒤에는 날이 좋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날이 좋은 게, 다른 일 때문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샐리는 진짜 울고 싶었다.

울먹이는 샐리를 뒤로한 그레이스는 압화 편지지 중 예쁜 것을 고르고 골랐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책갈피도 두 개씩 주기로 했다. 하나는 아이랑 나눠 가지라는 선물용이었다.

‘나랑 대화하기도 싫을 수 있으니까.’

이미 거절했는데 찾아가서 오랜 대화를 나누는 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

돈을 동봉하는 것도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클레타한테 주기 위해 만들고 남은 티백도 찾아 챙기고 편지에는 ‘오늘 날씨가 어떻고’로 서문을 쓰기 시작했다.

⋆★⋆

캐서린의 하루는 고달프다.

한밤중에 퇴근해 겨우 씻고 잠들어, 다시 새벽에 일어나서 식당의 일을 하러 간다.

아침에는 식자재를 다듬고, 일이 시작되면 끊임없이 설거지한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기에 쉬는 중간에 만든 지 한참 지나 퍽퍽해진 샌드위치 하나 입에 욱여넣고 다시 일하러 떠난다.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옮기라고 시키고, 부당한 일을 맡겨도 불평할 수 없다. 그녀가 맡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일급의 일이었다.

‘어떻게 얻은 일자리인데.’

주방장은 캐서린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녀는 예쁘장했지만, 독했다. 애교 부릴 줄 몰랐고 무뚝뚝했다.

애초에 그는 캐서린을 고용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고된 일이었기에 금방 때려치울 것이라며, 체력이 더 좋은 남자를 고용하려고 했다.

그는 캐서린이 1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했으나 앞으로 한 달만 더 버티면 1년이었다. 그래서 캐서린은 이 악물고 버텼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인간들에게 비웃어 주고, 쉬는 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에게 선물을 사 찾아갈 것이다.

그날도 별다르지 않았다. 새까만 밤에 퇴근해 집으로 들어간다. 낡아빠진 건물의, 좁은 한 칸짜리 방이었다. 아이를 맡긴 고아원에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아 계단을 올라갈 때면 조심해야 했다.

캐서린이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가자 제 방문 앞 편지함에 편지와 작은 소포가 들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응?”

캐서린에게 오는 편지는 납부서뿐이었다. 아이의 친부에게 편지를 몇 번 보내 봤지만 그런 사람은 집에 없다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된 답장뿐이었다.

캐서린은 소포의 내용물을 보고, 저번에 고아원의 선생이 제안한 사업에 관련한 내용임을 알고 코웃음 쳤다.

“어디 부잣집 마나님인지, 귀족 마님인지.”

둘 중 하나겠지. 캐서린은 비웃었다. 클레타는 착했고, 사람을 잘 믿었다.

그런 클레타를 꼬드겨 자신의 취미 생활에 동참시키려는 거겠지. 캐서린은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질리면 때려치우려고? 자신은 그런 우발적인 감정에 휘둘릴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캐서린은 편지를 보지도 않고 찢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편지 틈 사이로 너무 좋은 향기가 났다.

단지 그 이유로 캐서린은 편지를 찢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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