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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0)화 (20/131)
  • 20화

    ⋆★⋆

    “그래서 제가 생각한 사업 아이템이에요.”

    짜잔-하고 그레이스가 클레타에게 보여 주었다. 삐걱-고아원 부엌의 바닥 널빤지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티백이에요.”

    “티백이요?”

    “네, 티백이에요.”

    클레타는 멀뚱멀뚱, 허브티가 소분되어 있는 천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모슬린으로 만들었어요. 아마 더 적합한 천이 있을 거 같기는 한데, 임시방편으로요.”

    “그, 그렇군요.”

    클레타는 척 보기에도 그레이스가 쓴 모슬린이 고가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클레타가 티백을 요리조리 살펴보는 것을 뒤로한 채, 그레이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제국은 게이트 덕에 이동뿐 아니라 운송이 발전되어 있죠. 제국뿐 아니라 타국에도 게이트를 수출했으니, 해외여행도 승인을 받으면 가능한 정도니까요.”

    그 승인을 받는 절차가 워낙 귀찮은 게 문제였지만. 그레이스는 쓸데없는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그래서 많은 식문화가 발전했고, 차의 종류도 많아졌지만, 이번 축제 때 남편이 사 온 주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레이스가 떠올리기를, 벤자민은 약간 씁쓸한 맛이 나는 홍차를 좋아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마시는 홍차를 베이스로 각설탕 두 개를 넣고 우유를 타 밀크티를 만들어 마시는 것을 선호했다.

    ‘나는 굳이 따지면 커피가 더 좋지만. 그중에서도 카페오레가…….’

    그런 그가 굳이 줄을 서 가며 과일 음료를 사 왔다. 벤자민은 알고 있다. 거리에서 파는 과일주스는 줄을 사면서까지 사 마실 가치가 없다는 것을.

    ‘나와 떨어져 있고 싶어서였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냥 차는 회전율이 떨어져요.”

    “회전율……?”

    “음, 이 말이 맞나.”

    그레이스는 아차, 하며 입을 합 닫았다.

    여기만 오면 그레이스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거 같았다. 말에 막힘이 없었고,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기분 좋은 마법 같은데, 좀 극단적이란 말이지.’

    샐리와 있는 것도 좋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편안했다.

    제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클레타를 마주 본 그레이스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차를 마시려면 당연하게 찻잎을 넣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당연히 많은 도구가 필요하잖아요? 설거지도 많이 해야 하고, 품이 많이 들어요.”

    “그렇죠. 그래서 저도 차는 잘 안 마셔요. 커피……? 인가? 그것도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워낙에 고가품이니까요.”

    “뭐 커피는 유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커피도 만드는 데에 꽤 공정이 필요하고요.”

    그레이스는 클레타의 말에 커피가 고가품이었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이 유행이라길래 ‘유행인가 보다~’ 했다.

    ‘하긴 공작이 유행이라고 하면 귀족 사회에서 유행인 거겠지.’

    여기까지 말한 그레이스는 갑자기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

    “아!”

    “……?!”

    “던, 그러면 제가 저번에 보내드린 쿠키는 어땠나요?”

    벤자민이 보내 준 쿠키를 여기로 보낸 일이 떠올랐다. 그레이스는 별 대수롭지 않게 보내 준 건데, 만약 그것 또한 아주 고가의 물품이었다면 클레타가 부담스러웠을 게 뻔했다.

    클레타는 그레이스의 질문에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스는 조금 안심했다.

    저 미소는 ‘값은 조금 나가지만 그래도 감사하다고 받을 수 있는 정도.’라는 뜻이었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다, 다행이네요.”

    그레이스가 속으로 휴, 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네, 요즘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엄청 인기였거든요. 저는 늘 사 주지 못했는데, 랜딘 씨의 친절을 계속 받기만 하네요.”

    벤자민이 선물해 준 쿠키가 운 좋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적당한 가격의 브랜드였다. 그레이스는 크게 안심하고 계속 설명을 이어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우려 마시면 간단해요. 뜨거운 물에 잠시 담가 놓았다가 빼면 되니까요.”

    간단하고 빨랐다.

    사실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나 싶었다.

    ‘차는 원래 우아하게 마셔야 한다는 인상이 있었지.’

    그레이스가 추측하기를, 이렇게 간단한 티백을 아직까지 아무도 떠올리지 않은 이유는 티타임 문화 자체가 처음에는 귀족 고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평민들은 그런 귀족들을 흉내 낸 것이고.

    평민들이 차를 즐긴다는 건 그냥 차의 맛을 즐기는 게 아니라, 귀족의 삶 한편을 따라 해 본다는 것과 같았다.

    지구에도 있지 않은가, 유명인이 갔다는 식당을 따라가 본다거나 유명인이 입은 옷을 사 보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이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보급화가 되지 않는다.

    차는 아직 그렇게까지 제국에 크게 퍼져 있지 않았다. 여전히 귀족의 문화에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시기 성가시니까.’

    ‘대신 설거지해 주는 사람’이 당연히 존재하는 이는 드물었다. 내가 먹은 건 당연히 내가 치워야 했고, 찻잎 찌꺼기를 버리는 것도 귀찮았다.

    티백은 그 모든 걸 해결해 줬다. 그레이스는 이 문구를 생각하며 잠깐 홈쇼핑 광고 문구 같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스는 클레타의 눈치를 살폈다. 썩 부정적이지는 않은 눈치였다.

    애초에 클레타는 그레이스를 거절할 수 없기도 했다. 비누를 팔 때 그녀와 한 약속이 있으니까.

    클레타가 질문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무엇이요?”

    “재료 조달이나 인력의 문제는 어쩌죠? 장소도 그렇고…….”

    “그건 이미 해결되었어요.”

    그레이스는 당연히 그것도 다 고민하고 클레타에게 제안했다.

    해결 방안 없는 동정이야말로 기분 나쁜 것임을 그레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별관의 사람들도 날 동정할 때면 적어도 친절을 베푸니까.’

    “홍차의 경우에는 제가 우연히 알고 있는 차밭이 있어요.”

    물론 ‘우연히’가 아니라, 저번에 운 좋게 저렴한 값으로 산 작은 차밭이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품질이 좋은 차로 티백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대충 우려 마시기용이라서 큰 차이는 안 나고.’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고 난 다음 브랜드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더 고민해 보면 될 문제였다.

    또한, 그건 흑자가 나면 따질 문제지 지금은 성공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왜 배도 완성되지 않았는데 샴페인을 터트리는지 모르겠다며 그레이스는 자기 생각을 갈무리했다.

    “게다가 장소는 이 고아원이면 되니까요. 판매도 여기서 시작할 거예요. 고아원에서 운영비를 모으기 위해 시작한 사업, 상품성이 어쨌든 간에 분명 사려는 사람은 있을 테니까요.”

    예를 들면, 자신의 친절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레이스는 절대로 티백이라는 상품이 한 번에 모두를 매료시킬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면 인력은요?”

    “아이들의 엄마요. 그들을 고용해서 여기로 출근시키도록 해요.”

    그레이스가 당연하게 말했다. 클레타가 그 말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여기 아이들 중, 엄마가 있는 아이들도 있죠? ……가령, 미혼모라 아이를 돌보기 힘들어 맡긴 경우라든가.”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냐고 하면…….”

    그레이스는 클레타의 질문에 창밖에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다들 비슷비슷했지만 몇몇 아이들의 옷은 다른 점이 있었다.

    “신경 쓴 티가 나잖아요.”

    비교적 새것 같다거나, 장신구를 하나라도 달고 있다거나, 신발의 밑창이 튼튼해 보인다거나.

    “아이들은 알고 있나요?”

    클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보고 싶어 하겠네요.”

    그레이스가 웃었다.

    “가족은 만나야죠. 사랑하는 가족이라면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음, 고마워요?”

    부엌에 올려 둔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클레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가 빠진 컵에 물을 따르고 그레이스가 만들어 온 티백을 넣었다.

    “애초에 당신 혼자서 고아원의 아이들을 돌볼 돈을 충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제 제안을 덥석 잡았다는 건 자금줄 자체가 막막할 만큼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클레타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아이들의 생모분들이 다른 곳에서 일한 돈을 보내고 있겠죠. 여기 아니면……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고아원이 없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고아원 비슷한 건 있었다. 신전에 연고 없는 고아들을 맡길 수 있었으나, 그곳에 맡기게 되면 다시는 아이를 만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아이를 버렸으면서 왜 보고 싶어 하냐고 하려나.’

    그레이스는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뭐 다들 대충 사정이 있었겠지, 정도였다. 게다가 제 아이들을 계속 보고 싶어 하며, 아이들도 어머니에 대한 존재를 알고 있다지 않은가?

    이건 진짜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거지.’

    “이건 고아원에 대한 이야기니까 물어볼게요. 총책임자인 원장은 어디 있나요? 아직도 외부에 나가 있나요?”

    “아뇨. 그 사람은 더 이상 여기에 제대로 된 후원금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떠났어요. 끌어모을 수 있는 돈은 다 끌아모아서요.”

    ‘좋아.’

    그럼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아이들의 생모들을 제가 다 고용할게요. 금액은 걱정하지 마세요. 엄청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합당한 금액이에요.”

    그레이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고아원은 아이들의 수도 많지 않은데, 건물은 꽤 크잖아요. 몇 곳은 아예 일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남은 다른 곳은 직원 숙소로 만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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