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9)화 (19/131)

19화

“내가 사재를 내 마음대로 써도 될까?”

“네?”

“그리고 한동안 외출을 좀 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

“네?”

“혹시 안 되면 말고, 이유를 자세히 말하면 괜찮나?”

그레이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님의 사재인걸요, 어떻게 쓰시든 마님의 자유입니다.”

“그, 그래?”

“예. 설령, 가주이신 공작 각하이시더라도 그 부분은 절대로 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스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외출은 자유이나 마님은 공작 부인이시니 적어도 어딜 가는지 말씀은 해 주십시오. 호위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해도 되는구나…….”

그레이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끄덕였다.

소설 속에서도 다들 그레이스를 무능한 공작 부인이라고 욕했으며, 이 저택 내에서 느껴지는 그레이스의 감정은 대체로 우울감뿐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호의적인 집사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용인들은 다들 친절했지.’

그레이스는 간질거리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저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한 이유는 동정 때문일 테며, 외출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레이스가 안살림을 맡지 않아 저택 내에 있든 말든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사고만 치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알았어.”

그레이스는 또 별관의 사용인들이 들으면 오열하며 쓰러질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

본디 귀족들은 밖으로 외출할 때면 호위나 수행인을 한두 명씩 대동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누군가가 제 옆에 가까이 서 있는 것을 꺼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하나 벤자민에게 보고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목적지가 고아원인 만큼 낯선 이가 계속 함께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 조심스럽게 제도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을 전제로 혼자 다닐 수 있게 요청했고, 이에 벤자민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호위를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먼 곳에서 따라다니게 하면 안 되겠냐 제안했다.

벤자민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그레이스는 오히려 그녀의 뜻을 존중해 주는 행동에 조금 놀라며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뒤, 후드를 뒤집어쓴 그레이스는 거리로 나갔다.

거리의 사람을 보니 심장이 쿵쿵 뛰었으나, 축제 때만큼 붐비지 않았기에 나름 견딜 만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 애를 쓴 것일지도 모른다.

‘취객은 없으니까 그때와 같은 소란은 없을 거야.’

그레이스는 뒤집어쓴 후드를 꾹 눌러썼다. 어쩐지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할 일이 많으니까 서두르자.’

클레타를 도와주고, 이혼한다.

완벽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클레타를 도와주는 건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유리했다.

현재 그레이스의 평판은 엉망이었고, 이는 이혼 과정에서 그녀에게 여러모로 불리하게 작용할 게 뻔했다.

‘세간의 인식도 안 좋겠지.’

저 여자가 뭐가 아쉽다고 이혼을 신청했는지 의심하며 분수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피해망상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레이스가 소설 속에서 본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한 평가는 이상하리만치 최악에 달해 있었기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혹시를 대비해 이런 식의 입지를 다져 두는 게 좋아.’

현재 고아원 사람들은 그레이스가 ‘그’ 공작 부인인 것을 모르지만,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게 아닌가?

이른바 자신의 편을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그레이스의 편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이혼 과정에서 무능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게 증명되어 위자료 조정에도 용이했다.

그레이스는 지금 무능한 뒷방 공작 부인이었다. 사교 활동도 전혀 하지 않고, 못생기기로 유명한 공작 부인!

예전보다 살은 빠졌으나, 빼나 마나였다. 더 이상 벤자민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커지기 전에 그와 이혼하는 게 좋았다.

별관의 사용인들이 그레이스에게 너무 잘해 줘서 정이 깊어져 버렸다.

‘원래는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주는 거였지만, 고아원을 도와준 사람이 알고 보니까 공작 부인이었다는 게 밝혀지면 주변에서 저 좋을 대로 수군거리겠지.’

그냥 부인도 아니고 무능하다고 소문난 못생긴 공작 부인이지 않은가.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자신에 대한 수식이 쓸데없이 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레이스는 클레타를 도와주는 것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대중에 흘릴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자신의 뒤를 밟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레이스만큼 수수께끼에 가려져 있는 귀족도 드물었고, 죄책감 없이 씹고 뜯고 맛볼 수 있는 이도 드물었다.

‘실제로 그레이스, 그러니까 펠튼 공작 부인을 몇몇 기자들이 몰래 추적하다가 들킨 적도 있었지.’

원작 소설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벤자민은 제 부인에게 계속 기자가 붙어 난처하다고 아리아에게 말했다.

아리아는 이에 현명한 기지를 발휘해 기자를 잡아냈고.

“……감사합니다. 매번 잡아도 다른 기자가 따라붙어 난처한 터였거든요.”

즉, 보이지 않더라도 기자가 그레이스를 찾고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황족 다음으로 고귀한 위치에 있지만 무능하다고 알려진 여인이 그레이스 펠튼이었다.

‘나에 대해 욕할 거리를 찾으면 그 기자는 돈을 왕창 벌 텐데, 당연히 잠복하고 있는 이가 있을 거야.’

그레이스가 이 사실을 확신하는 이유는 망토에 달린 연두색 브로치 때문이었다.

‘보기엔 평범한 액세서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도구지.’

소설 속, 본색을 드러낸 벤자민이 이 망토를 아리아에게 선물하며 ‘이 망토에는 그 누구도 당신을 당신으로서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아주 멋진 마법이 걸려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사용자의 존재와 외모는 그대로 인식하지만 그 사람과 기존 정보를 연결할 수는 없는 신기한 마법이었다.

‘그리고 보통 인식 저하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니까, 처음 만들어 낸 마도구사는 고생 좀 했겠지.’

그레이스는 결혼 초, 아주 조금의 사교 활동을 한 뒤로 줄곧 두문불출하는 공작 부인이었다.

이렇게 두고 보면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겠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황실에 걸려 있는 초상화.’

펠튼 공작가가 어떤 곳이었나, 태양을 받치는 나무가 상징이며 대대로 황실을 위해 북부를 수호하는 가문이었다.

비록 입장을 허가받은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펠튼 공작가의 초상화는 황족과 주요 가문의 초상화가 진열된 방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매 가주가 달라질 때마다 그러했고, 직계 가족이 생기면 새 초상화를 걸었다.

클레타가 그 방을 들어갔을 일은 없다만 그레이스가 고려하는 건 그 점이 아니었다.

혹시 모를, 그레이스를 추적하고 있는 이의 눈을 피하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벤자민이 축제를 위해 이 망토를 준 것도 그를 위해서였을 거야.’

벤자민은 이번에 원작 남주인공인 실베스터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며 고위 귀족인 것에 비해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편이기도 했다.

‘대외 활동이 많아서 그런가?’

‘펠튼 공작’을 아는 사람은 그의 옆에 있는 존재를 신경 쓰기 마련이었다.

펠튼 공작 부인을 폄하하고 흠을 잡기 위해 따라붙는 이들은 이상하리만치 끈질겼기에, 어쩌면 황실 초상화 방에 있는 그녀의 초상화도 구해 봤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벤자민은 이 마도구를 준비했다. 괜히 또 누군가가 그레이스에게 따라붙어 추문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기에.

‘……라고 생각하면 꽤 타당하지.’

보통 신분 높은 이들의 초상화는 자리의 격에 맞게 미화된다고들 했다.

그레이스야 ‘펠튼 공작 부인’의 초상화가 어찌 생겼는지 모르기에, 그 말이 진실인지 알 턱이 없었지만.

‘적어도 머리 색을 바꾸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제도에 있는 수많은 평민들은 그레이스의 얼굴을 모른다 할지라도 정보를 입수한 이들은 초상화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이가 공작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그레이스는 가면 축제 뒤 일어나는 ‘성녀의 소원’ 주요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서부 지역 땅의 오염.’

제도는 아주 평화로웠다. 어떤 귀족이 제도 내에서 설친다는 설명이 나온들, 그 귀족이 습격당했다는 말은 없었다.

그레이스가 주의해야 할 것은 누군가의 암살 같은 게 아니라 ‘펠튼 공작 부인의 추행’을 기대하고 있는 눈동자뿐이었다.

제도는 정말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벤자민 펠튼이 고삐 풀린 흑막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남편이지만 정말 미친 사람이야.’

아리아 하나 독차지하겠다고 제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제도에 있는 가장 거대한 신전을 터트리고 사제를 죄다 죽이고 난리를 치다니.

그레이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아원 쪽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아내를 차근차근 병으로 보내 버린 건 너무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했어.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원래의 그레이스를 떠올려 보면 이혼해 달라고 부탁하기만 해도, 곧장 이혼해 주고 지방 영지에 가서 조용히 살았을 텐데 말이다.

‘사실 벤자민이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공작저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그를 범인이라고 확정 짓기에는 섣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작에서의 그의 행동을 아는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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