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8)화 (18/131)

18화

‘장부부터 확인하자.’

그레이스는 별관의 집사를 불러 장부를 부탁했다. 집사는 그레이스의 부탁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장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레이스는 장부의 가장 첫 페이지부터 펼치기 시작했다.

“……잘 정리했네.”

봐도 잘 모르겠지만, 잘 정리한 것만큼은 알겠군.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만 보고 있으니까 그때 일은 잘 생각 안 나는 거 같아…… 그레이스가 중얼거리다가도 또 거리의 일이 떠올라서 미간을 꾹 눌렀다.

‘금붙이를 은근 자주 샀네?’

그레이스는 상세 내역을 확인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응?’

그레이스는 분명 그녀가 결혼한 지 1년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거의 2년이 되어 갔다.

장부에 기재된 날짜에 따르면 그러했다.

“……응?”

그레이스는 가면 축제 날 벤자민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랬나요? 결혼한 지 1년이나 되었는데.”

‘그 사람은 왜 그걸 정정 안 했지?’

빙의 후 기억이 거의 다 동화되어, 제대로 기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레이스는 자신이 크나큰 오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나 빙의자고 너의 사랑을 응원하니 이혼해 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미쳤다며 병원이나 수도원에 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그냥 잘못 말했다고 생각했나?’

아니면 ‘1’과 ‘2’는 은근 발음이 비슷하니 잘못 들었을 수도 있지. 그레이스는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했다.

당연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이 문제까지 더해지면 그레이스는 정말 헤어 나올 수 없는 우울의 늪에 빠질 것이다.

그레이스는 집사가 가져다준 예산서와 장부를 대조해 봤다. 거의 일치했다. 현금은 넉넉했다.

‘원래의 그레이스, 은근 금을 좋아했구나.’

사실 야망이 있었을지도 몰라. 인플레이션이 이 세계에서도 적용되나? 그녀는 태평하게 생각하다가 또 미간을 꾹 눌렀다.

거리의 일이 또 떠올랐던 탓이다.

‘……어쩌면, 원래의 그레이스도 떠날 준비를 했을지도 모르지.’

이것도 꽤 타당성이 있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위자료 자체를 생각하지 않고, 이혼할 때 장신구는 사유재산으로 인정되는 점을 이용해 돈으로 바꿀 때 가장 가치 있는 금붙이를 산 게 아닐까, 그레이스는 추측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또 괜히 우울해졌다.

그레이스는 산책이라도 하면 나을까 싶어 터덜터덜 집무실 밖을 나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죽고 싶다.”

어디선가 챙강챙강 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피곤하고 우울해서 환청까지 들리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 감정은 내 것이 아니지만 익숙한 류야.’

전생의 그녀는 뚱뚱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에게 못난 실패작 취급을 받고는 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잘난 점 하나 없고 멍청했으며, 마지막에는 병까지 심해져 병원에 입원해 삶을 마감했다.

그레이스는 될 수 있는 대로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전의 삶을 떠올렸다가 인상을 팍 구겼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음, 지도. 지도.’

그레이스는 이동하기 전에 서재에서 제국의 지도, 그중에서도 최신판을 챙겼다.

“그리고, 또…….”

그게 어디 있을 텐데. 별관의 사용인들이 그레이스를 위해 상시 구비해 둔 각종 카탈로그가 있었다.

그녀가 우울해 보일 때의 기분 전환용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아마 그건 티 룸에 있겠지.”

그레이스는 한 품에는 지도와 장부를 챙기고 티 룸으로 이동했다.

한동안 그녀가 티 룸에서 차를 즐기지 않았음에도 티 케이스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종류가 진짜 많네.’

1년 내내 마셔도 전부 마시지 못할 것 같았다. 분명 그전에 보존 기간이 지나 버려야 할 게 분명했다.

그레이스는 흐릿해지려던 시야를 다잡고 근처에 있는 카탈로그를 확인했다. 제도에 있는 찻잎 전문점에 적혀 있는 설명들이었다.

그레이스가 찾아본 것은 차의 재배지였다.

“으음, 가렛타령은…….”

지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게이트의 위치와 항만이 있는 곳 등 교통로가 잘되어 있는 곳은 땅값이 금값이었다.

‘너무 비싼 곳은 안 되니까.’

2년 동안 쌓인 그레이스의 사재는 생각보다 많았으나, 고아원을 위해 그렇게까지 큰돈을 쓸 생각은 없었다.

흑자로 전환되면 자신이 쓴 돈만큼만 메운 다음 다른 이에게 넘겨줄 사업이었고, 그러니 규모가 크지 않을수록 좋았다.

‘규모가 크면 관리하기가 어려우니까.’

기왕이면 직접 확인해야 하니 거리가 가까울수록 좋았다.

그레이스가 체크할수록 갈 수 있는 구역이 줄어들었고, 끙끙 앓는 소리가 티 룸에 흘렀다.

“……어렵네.”

그레이스는 분명 이 몸에 빙의하고 며칠 뒤 기억을 차츰차츰 되찾고, 소설 속임을 알게 된 다음 절망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원래의 그레이스의 감정이 툭하면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지금도 그랬다.

그레이스는 제 이마를 탁! 치며 다시 카탈로그를 읽었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나는 우울하지 않다. 이 말만 계속 되뇄다.

그녀가 기존의 우울감에 동화되지 않는 방법은, 원래의 그레이스가 하지 않았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경험하지 않았던 일을 하면 연상되는 기억이나 따라오는 감정이 없어.’

그레이스의 원래 기억도 뜨문뜨문했기에, 그녀가 고아원을 들르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별관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우울했던 감정이 피어올랐다. 감정을 분리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됐다.

“…….”

그레이스는 다시 제 이마를 세게 내리쳤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이건 나의 우울감이 아니고, 나의 짝사랑이 아니다. 그레이스가 흡, 하고 숨을 쉬며 카탈로그에 적힌 몇 가지 지역에 동그라미 쳤다.

“마님, 여기 계셨군요.”

“응?”

샐리가 적당히 저렴할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체크하는 중인 그레이스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각하께서 선물을 보내오셨어요. 빨리 확인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레이스가 카탈로그를 손에 든 채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벤자민이 싫다기보다는, 일전에 보았던 그의 혐오가 담긴 표정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표정이든 아니든, 그냥 그런 것은 보기 껄끄럽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레이스에게 속삭였다. 너를 향한 표정이 맞노라고. 그레이스는 그 소리를 억누르며 샐리에게 되물었다.

“……선물?”

“네.”

그레이스는 최대한 빨리 굳은 표정을 무마했으나, 샐리가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동요를 부러 모른 척했다. 그레이스가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엄청 예뻐요.”

저번에는 먹을 것을 한가득 보내왔던 벤자민이었다. 그레이스는 이번에도 그가 디저트를 보내올까 싶었다.

그런데 샐리의 ‘예쁘다’는 표현에 그레이스가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향했다.

별관의 현관 쪽에는 색색의 꽃이 한가득했다. 그 외에도 오일이나 허브 등, 사방이 향기로 가득함에도 독하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작은 꽃이 많네.”

보통 선물할 때는 크고 화려한 꽃을 선물하지 않던가. 벤자민이 보내 준 꽃은 전부 작은 꽃이었다. 이름 모를 꽃도 있었다. 공작가 정원에서는 절대 키우지 않을, 그런 꽃. 잎의 수가 적고 소박한 꽃들이었다.

‘하지만 색은 예쁘다.’

그레이스는 작은 꽃이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벤자민이 아리아에게 선물해 주는 꽃은 죄다 크고 화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압화 하기 좋겠다.’

마침 그레이스는 압화를 거의 다 쓴 참이었다. 다시 압화하여 채워 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취미 생활을 하다 보면 우울한 생각은 날아가기 마련이었다.

“마님, 이건 어쩌죠?”

벤자민은 이번에도 과자를 같이 보냈다. 사용인들이 쿠키 박스 몇 개를 들고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깜찍한 토끼 그림이 박혀 있는 알록달록한 쿠키 박스를 내려다보던 그레이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음.”

이번에도 사용인들에게 나눠 먹으라고 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아원이 있어. 거기에 주고 와 줄래?”

거기 아이들이 단것을 아주 좋아했으니, 쿠키도 필시 좋아할 것이다.

‘이 정도 양이면 싸우지 않고 다들 나눠 먹을 수 있을 거야.’

사용인들은 어쩌면 제 몫이 될 수도 있었을 쿠키였음에도, 딱히 아쉬워하지 않고 그레이스의 명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레이스가 허브티 케이스를 하나 집으며, 집사장을 불렀다.

“혹시 창고에 안 쓰는 모슬린 한 필이 있을까? 한 필이 아니라 책 한 권 정도의 너비여도 돼. 조금만 만들어 볼 거니까.”

“확인해 보겠습니다.”

모슬린 한 필이라는 말에 천 한 필? 하필…… 천? 천? 하면서 온갖 좋지 않은 생각을 하던 사용인들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그다음 이어진 그레이스의 말에 표정이 풀렸다.

“그리고 또…….”

그레이스가 한참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집사는 그레이스가 말을 할 때까지 동그란 눈을 뜬 채로 공손하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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