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 감정은 내 것이 아니야.’
내 것이 아니야. 내 것이 아니야. 내 것이 아니야.
그레이스는 속으로 또 중얼거렸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되뇌고 납득시키며 이해시키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었다.
또 이 끔찍한 감정에 먹혀들면 끔찍한 소리에 넘어가 늪 속에 파묻혀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내뱉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날 듯이 좋았는데, 다시 납덩이가 얹어진 듯 무거워졌다. 아까까지의 순간이 꿈이었던 것만 같다.
‘얼른 돌아가자.’
자고 일어나면 다시 이 감정과 나를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확신했다.
어두운 밤이 되니 길이 헷갈렸다. 낮과는 전혀 다른 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낮에서 밤이 되는 사이에 길이 스스로 움직여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스는 이건 좀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결론지었다.
사람이 더 많은 거 같았다. 아니, 확실하게 더 많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저택에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
낮에 손님을 대할 때는 괜찮았던 거 같은데, 오전에 벤자민과 있을 때는 괜찮았던 거 같은데.
‘왜 지금은?’
왜 지금은 울렁거리고…….
울렁거리고, 또 뭐지? 그레이스는 그다음 단어를 찾지 못했다. 울렁거리고 또 뭐가 있는데, 그 기분을 설명할 적합한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랬던가? 평소에, 내가 내 기분을 잘 설명하지 못했던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떠올리지 못했던가.
이것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이 감정이 낯설고 익숙했다. 모순적이었다.
천천히 위태롭게 걸어가던 걸음은 결국 굳어 버렸다. 마치 축제의 아름다운 빛이 자아낸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진득하게 붙잡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의 장애물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날카로운 소리는 그레이스를 더욱 위축하게 만들었다.
“아! 비키라고!”
뒤에서 술 냄새가 났다. 나이 든 남자가 거칠게 그레이스를 밀쳤다.
“읏……!”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몸이 기울어지며 후드가 벗겨져 그녀의 민낯이 드러났다.
곧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바로 일어나야 했는데, 온몸에 저릿하게 퍼지는 통증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뭐야?”
고주망태가 된 남자는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나는 무슨 동상이라도 쓰러진 줄 알았네!”
‘여자가 넘어지는데 무슨 소리가 이렇게 커!’라며 남자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꽂히는 비난에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몸집이 크니 피하지도 못하고 부딪히지!”
애초에 몸을 비틀거리며 걸은 것은 저 사내였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축제를 위해 차려입을 적, 옷에 품이 남아 느꼈던 뿌듯함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사내는 단단히 취했는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말의 부끄럼도 없이 모두가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줄 알겠어! 크하하!”
“…….”
그레이스의 속이 매스껍게 울렁거렸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었다.
‘숨 막혀.’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많은 이들이 난처한 듯 바라보았으나, 그녀를 위해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가, 가면.”
그제야 그레이스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보통이라면 후드를 뒤집어쓰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아 그저 몸을 숙였다.
온몸이 무겁고 땅속의 무언가가 그레이스를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레이스의 몸은 그리 육중한 편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살집이 있는 것은 맞았으나, 누구나 크게 넘어지면 땅이 울리기 마련이었다.
또한, 그녀의 외관이 어떠한들 그것은 비웃음을 살 이유가 될 순 없었다.
그녀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남들의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몸을 웅크리는 것이 다였다.
귓가에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에 취해 온갖 추악한 소리를 내뱉는 사내뿐 아니라, 종종 그레이스의 머리에서 울리던 것과 비슷한 종류였다.
아까까지 그레이스를 채우고 있던 충만함이 바닥나고 모든 것이 그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그녀가, 정확히는 원래의 그레이스가 겪었던 수많은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너는 어디서 주워 왔어? 왜 다른 형제들이랑 달라?”
“얼굴에 뭐 묻은 거 같아~ 지저분해!”
“그만 좀 먹어라. 그러니까 몸집이 그렇게 크지.”
“너는 안됐다. 언니가 있으면 뭐 해? 옷도 나눠 입을 수 없고.”
‘그, 그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레이스의 입은 뻐끔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고였다.
한참 달싹거리며, 그녀가 겨우 소리를 냈다.
“……누, 누가 도…….”
누가 도와줘요.
그레이스의 눈에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까 전까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훅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고작 주정뱅이의 비웃음일 텐데, 누군가는 박차고 일어나 화를 낼 법한 부당한 말이었음에도.
그 아무것도 아닌 소리가 그레이스를 이다지도 무력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사실 다시금 되새겨 보면 이렇게까지 반응할 만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그레이스에게 있어 사내가 한 말과 귀에 꽂히는 비웃음은 그 어떤 형벌보다 무거웠다.
그녀가 본디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든 소용없었다.
둘러싼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들은 본인의 생각을 의심하게 하고 재단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동안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녀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그것이 그레이스가 큰 목소리로 도움을 외치고,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커다란 바람 소리가, 그다음에는 거대한 물건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뚝 끊기고, 저벅거리는 구둣발 소리만이 들렸다.
“통행 방해다.”
그레이스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낯설었다. 왜냐하면 그레이스가 아는 그 사람은 절대로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그가 던진 작은 동상에 깔린 취객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그레이스에게 향했다.
“오늘 기분이 좋았는데, 순식간에 더러워졌잖아.”
그레이스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자신의 챙 넓은 모자를 푹 눌러씌워 주고 그녀의 고개를 조심조심 들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들지 않으려고 버텼다.
“부인.”
“…….”
“부인, 저 좀 보십시오.”
“…….”
“부인, 집으로 돌아가야지요. 걷기 힘드십니까? 제가 안아서 옮겨드려도 될까요?”
이제야, 그레이스가 아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레이스는 그가 자신을 죽일 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다정한 목소리에 안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그레이스는 그의 다정한 얼굴에서 감정을 읽고 숨이 멎을 뻔했다.
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형용할 수 없던 기분에 대한 적절한 단어를 떠올렸다.
‘……무서워.’
벤자민의 눈에는 분명히 혐오가 담겨 있었다.
⋆★⋆
별관은 다시 빨간불이 켜졌다.
그레이스가 다시금 우울해졌기 때문이다.
익숙한 일이기는 했다. 그레이스는 원래부터 평소에는 온화하고 다정했지만, 가끔 미친 듯이 우울을 탔다.
지금의 그레이스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분위기에서부터 완전히 우울한 시기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벤자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도, 그의 보좌관인 아벨 번턴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가면 축제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화하기로 소문난 벤자민이 조용하지만 깊게 분노했다.
그가 사용인에게 화풀이하지 않을 거란 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의 그레이스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그레이스는 깨달았다.
우울하면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일을 찾아서, 생각하지 않게 만들자.
‘그리고 혼자 있을수록 생각이 심해지는 거 같아.’
그레이스는 어느새 수북이 쌓인 약 봉투를 바라보았다.
‘이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까?’
그레이스는 약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이 약을 먹으면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었다. 일기장을 읽고 나름 분리된 줄 알았던 감정이, 저번 가면 축제 때 다시 심화되었다.
‘됐다.’
그레이스는 약 봉투를 그냥 치웠다.
그냥 한번 안 먹는 거 끝까지 안 먹고 치워 두기로 했다.
샐리도 무슨 약인지 모르는 듯했다. 어디서 받아 오는지도 모르는 약을 덥석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고아원이나 도와줄까.’
고아원에 가면, 딱히 우울한 생각도 들지 않고 말이야. 사실 그 이유가 제일 컸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로 가려면 그 길목을 지나야 한다는 점이다.
그 골목을 떠올리자마자 그레이스는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싫어.”
하지만 일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사실 그것 말고도 고아원에는 방문하고 싶었다. 일손이 부족해 보여서, 일손도 거들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