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6)화 (16/131)

16화

“예쁘다!”

“보석 같아!”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터져 버렸지만, 다시 불면 또 생겼다.

“이것 보렴.”

그다음, 그레이스는 반지에 비눗물을 진하게 묻히고 세게 불었다. 작고 무수히 많은 비눗방울이 두다다다 쏘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그게 또 재밌다고 크게 웃었다.

다른 구석에는 뜨거운 물을 담은 대야에 비누를 비비고 있었다.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며 좋은 비누의 향이 멀리 퍼졌다.

젊은 연인이 관심이 생겼는지, 다가와 구경했다.

“비누인가요?”

“예뻐라.”

하지만 그들이 평소에 쓰는 비누치고는 가격이 높아 머뭇거렸다.

클레타는 얼른 연인에게 다가갔다. 그레이스가 그녀에게 미리 귀띔해 준 이야기가 있었다.

‘클레타, 압화 비누를 사서 다 쓰면 반드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고향에서 내려온다고 해요.’

클레타는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레이스의 고향에 그런 전설이 있냐고. 그레이스는 답했다. 없지만 지나가던 손님이 그걸 알겠냐고.

클레타가 웃었다.

“저의 고향에서는 가면 축젯날 산 압화 비누를 다 쓰면, 간절한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어머~ 로맨틱해. 그치, 자기야.”

“응. 우리도 살까?”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젊은 연인이 비누를 사 가고, 뒤이어 여러 손님들이 계속 기웃거렸다.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진다고요?”

그때, 클레타에게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지도 않은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벤자민은 클레타가 그레이스의 조언에 힘입어 사기 치던 것을 들은 듯했다.

“……리, 린덴 씨셨군요. 아까까지 보이지 않으시더니…….”

“아, 잠시 지인을 만나야 해서 말입니다.”

아이를 상대하는 일이 끝나서 다행이었죠. 하지만 가판대 일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벤자민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다시금 비누 쪽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만든 걸 자세히 본 건 지금이 처음이군요. 소원을 이뤄 준다는 돌이나 보석 얘기는 들어 봤지만 비누는 또 처음입니다.”

벤자민은 웃는 낯으로 기웃거리다가 주홍빛의 압화가 장식된 비누를 골라 구매했다.

“……소원이 있으신가 봐요?”

“뭐, 누구나 소원은 있지요.”

벤자민이 방긋 웃으며, 다른 쪽에서 아이들과 비눗방울을 만들며 놀고 있는 그레이스를 훔쳐보았다.

아이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가 온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

그레이스는 저택에 있을 때와 달리 활짝 웃고 있었다.

끝없이 줄을 서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너도 나도 사겠다며 싸우는 기적도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비눗물을 풀어 향기로 이목을 끌고, 비눗방울로 눈을 사로잡았지만 결국 고작 비누였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기는 모였다.

클레타의 예상보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예측보다도 더 모였다.

“……허억.”

나중에는 비눗방울이나 불면서 아이들과 놀아 줄 겸 호객 행위를 할 시간 따위도 없었다. 대야 위의 거품이 꺼진 지도 오래였다.

잔돈을 계산하며 몰린 손님을 겨우 해치웠다.

원래 손님은 한번 몰릴 때 우르르 몰리고, 한산할 때는 더럽게 한산했다.

그레이스가 겨우 숨을 돌리며 정신 차렸다.

‘벤자민!’

남편.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이며,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만 어쨌든 법적 남편인 그 사람. 그리고 원래 오늘 축제에 같이 나온 사람!

그레이스는 원래 클레타가 비누를 파는 것까지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초반에 애들 좀 상대해 주고 주변 정리 도와주고, ‘힘내세요~ 밤쯤이나 다음에 또 올 테니까 다 팔렸으면 말해 줘요~’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클레타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레이스는 착한 사람이 힘들어 하는 걸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없었다.

“베, 베니?”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벤자민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시력이 좋다고 자부했다. 전생도 그러했고, 이 몸뚱이도 그러했다.

‘어딜 갔지?’

그레이스가 멍하니 빈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클레타는 그녀가 누굴 찾는지 알아채고 말했다.

“남편분께서는, 린덴 씨를 보고는 축제는 따로 즐기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하셨어요.”

“왜요?”

아니 진짜 왜?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독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금방 같이 끝내고 축제를 즐기자고 말한 건 벤자민이었다.

“뒤풀이도 하고 오라고…….”

돈을 주셨어요……. 클레타는 그리 말하며 그레이스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클레타의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정말 큰 금액이었는지라, 클레타가 저 액수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침침한 낯으로 벤자민이 이런 순간만큼은 공작이 맞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돈을 받아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금액은 과했다.

“그래도 남편의 성의를 봐서, 그의 돈으로 저녁은 함께하죠.”

“괜찮으시겠어요?”

“뭐가요?”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조금 부루퉁한 어조로 클레타에게 물었다.

“남편분과 축제를 기대한 게 아니었나요?”

“딱히 축제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가자고 한 거예요.”

“…….”

“참고로 이제까지 한 번도 축제나 모임을 같이 가자고 제안한 적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요?”

클레타는 벤자민의 다정한 행동을 떠올리며 의아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레이스도 그녀가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야 벤자민의 행동을 보면 이해가 안 되기는 하지.’

하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그레이스는 왜 갑자기 제 기분이 나빠진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끄응, 하고 눈을 찡그렸다가 정신 차렸다.

‘결국 원작대로 되는 건가?’

이번 축제는 자신과 함께해서, 아리아와 벤자민이 함께 축제를 돌아다닐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레이스가 클레타를 도와준다는 선택을 했기에 벤자민은 결국 축제를 혼자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럼 이제 아리아와 만나겠지.’

아리아와 만나서, 부인과 축제에 왔지만 결국 같이 즐기지는 못하게 되었다며 함께해 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클레타를 도와준 건 후회는 없어.’

원작을 비트는 데 도전하는 것보다, 클레타를 도와주는 게 더 뜻깊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남은 비누도 죄다 팔아치울 수 있었다.

‘그러면 내 사비로 클레타를 도와주자. 흑자가 나기 시작하면 갚게 하면 되니까.’

그레이스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사치를 거의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책을 사거나 하는 정도였다. 돈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흑자가 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 봐야지.’

실패한다면 그냥 뒷방 공작 부인에게 무능의 칭호가 강조될 뿐이었다.

이는 얼마 남지 않은 그레이스의 명예를 걸고 하는 도박이었다.

‘실패해도 무능을 증명하는 사례가 하나 늘어날 뿐이지.’

만약 클레타를 끌어들여 사업을 벌이다 실패한다 해도 오명은 그레이스만 쓸 터였다.

그레이스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한, 모든 주목은 그녀가 받을 터이니 말이다.

“역시 아이들은 고기를 좋아하겠죠?”

그레이스는 턱을 괴고 숨을 돌리며, 뒤풀이 메뉴나 고민했다.

⋆★⋆

비누는 전부 다 팔렸다.

그레이스가 가져온 재료의 가격은 모르지만 대충 흑자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별관에 있는 허브티나 에센셜 오일은 혼자 쓰기엔 넘치도록 많았기에 이렇게라도 쓰는 게 의미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즐거워하니까 됐지.’

그레이스는 어느새 가면을 벗은 뒤였다. 가면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도 안 났지만, 그래도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레이스는 마귀가 탐낼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어떤 아이가 도넛을 먹다가 그레이스의 얼굴에 있는 주근깨를 콕 찔렀다.

“왜요?”

“아줌마도 도넛 먹었어요?”

“응?”

“설탕이 묻었어.”

그레이스는 자신의 주근깨에 대고 설탕이 묻었다고 표현하는 이는 처음 봐서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설탕 같아요?”

“으음, 자세히 보니까 시나몬 가루 같기도 해요.”

“예쁜 말 해 줘서 고마워요, 아가씨.”

“진짠데.”

그레이스는 키득거리며 망토의 후드를 썼다. 클레타는 번 돈의 일부를 그레이스에게 건넸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걸로 애들 밥이나 사 줘요.”

“그래도…….”

“오늘 기분 좋은 일 했다고 죽을 때까지 자랑할 거라서 그래요.”

벤자민이 준 돈의 일부로 아이들을 위한 맛있는 먹을거리를 잔뜩 샀다. 그레이스 또한 배고팠으나 축제 초반에 먹은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참자.’

기껏 뺀 살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레이스가 웃으며 고아원 밖으로 나서자 어둑한 하늘이 그녀를 맞이했다. 종이 등을 날릴 준비를 하는 듯했다. 사람이 많았다.

아까 전까지 분명 기분이 아주 좋았는데, 순식간에 침전되었다.

“…….”

‘이상하다.’

아까 전까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엄청 기분 좋았는데.

왜 이제는 또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의 감정은 늘 이렇게 해가 지기 직전의 하늘빛처럼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레이스는 후드를 꾹 눌러썼다. 처음에는 왜 이런 클로크(Cloak)를 줬나 했는데, 갑자기 너무 고마워졌다.

자신의 몸뚱이를 가리는 이 옷이 고마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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