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4)화 (14/131)

14화

그레이스는 상인에게 깨끗하게 비운 병을 반납했다.

“게이트를 발명하고 나서 유통이 발전해 식문화가 발전했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에요.”

“그렇죠!”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큰 반응이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이렇게까지 흥분한 건 처음 봐 깜짝 놀라 빳빳하게 굳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놀란 걸 보고 침착해졌다.

“아, 아니. 죄송합니다.”

게이트 또한 펠튼 공작가에서 투자한 사업 중 하나였다. 마법적 장치로, 쉽게 말하자면 순간이동 장치였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제국 곳곳에 있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게이트의 발명 덕에 유통이 편해졌으며, 신선한 식자재를 쉽게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게이트를 여는 건 비싸서 한번 열 때 대량으로 옮겨야 하기는 하지만.’

그런 단점은 치워 두고서라도 그만큼 큰 이점이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게이트를 좋아할 법하다고 생각했다. 펠튼 공작가의 주 수입원이 마석이라면 두 번째 수입원이 게이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예전에는 게이트 설치사가 꿈이었습니다…….”

“…….”

“하지만 이루지 못했죠.”

그건 당연했다. 그는 지구로 따지자면 ㈜게이트의 대주주였다.

“게이트 설치사가 되어서 세상 어디에든 설치하고 싶었거든요. 물론 공작으로도 그 일을 도울 수 있으니 참 기쁩니다.”

벤자민은 그리 말하며 다른 것도 먹어 보라며 어디서 사 온 건지 모를 케이크 팝을 그레이스의 입에 쑥쑥 넣어 주었다.

평소에 뭘 줘도 먹지 않겠다 했던 그레이스가, 오늘은 뭐든 먹으니 기쁜 듯했다.

‘날 살찌워서 어디에 쓰려는 거야.’

정들지 않으려고 찌우려는 거야?

의심하려다가도, 입 안에 들어온 케이크 팝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그레이스는 열심히 씹어 삼켰다.

“베니는 안 먹나요?”

“부인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릅니다.”

벤자민의 말에 그레이스의 눈이 또 가늘어졌다. 그제야 벤자민도 봉투 안에 남은 케이크 팝을 입에 털어 넣었다.

“…….”

벤자민은 한참이나 입을 가린 채 우물거렸다. 다른 곳을 살펴보던 그가 말했다.

“부인, 잠시 혼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요?”

“마실 것 좀 사 오겠습니다.”

벤자민은 그리 말하며 다른 가판대를 가리켰다.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그레이스를 대동하는 건 힘들 듯했다.

“네.”

그레이스는 딱히 그와 계속 붙어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네.”

“정말 금방입니다.”

“네.”

“다른 곳을 구경하셔도 되지만, 모르는 사람은 조심하십시오.”

“……네.”

“겉만 번드르르하고 말 잘하는 속 빈 공갈빵 같은 놈들이 있습니다. 그런 놈들은…….”

“다녀오세요.”

“넵.”

벤자민은 얌전히 마실 것을 사러 떠났다. 그레이스는 서서히 멀어지는 벤자민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당신이 그 겉만 번드르르한 공갈빵’ 같은 포지션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다.

‘흠.’

그제야 홀로 남은 그레이스는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긴 어디지?’

다들 즐겁게 축제를 즐기는 와중, 인적이 유독 드문 낡은 건물이 보였다.

보통 낡은 장소는 다가가지 않는 게 상책이었으나 어쩐지 눈에 밟혔다.

“으음.”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향한 곳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뒤통수가 보였다.

‘다른 곳을 구경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벤자민이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그레이스는 결론을 내리고 총총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구경하지 않는 곳 근처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

그레이스는 어른은 없나 두리번거렸다. 아래에서 한 아이가 그레이스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살 거예요?”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코를 훌쩍이며 그레이스를 올려다보았다.

“뭘 파는 건데?”

“으응…… 비누.”

그레이스가 시선을 돌려 그들이 파는 ‘상품’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쁘지가 않네.’

그레이스는 가판대 앞에 쪼그려 앉아 비누를 들어 코 가까이 댔다.

‘향에도 특이성이 없고…….’

다른 향이라도 첨가되어 있다면 좋을 텐데, 평범하기 짝이 없는 향에 색도 없이 그냥 투명한 데다가 모양도 이상했다.

“…….”

그레이스는 잠시 턱을 괴고 가판대를 바라보았다.

‘이걸 사야 하나?’

동정으로?

그레이스는 상품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비누를 바라보다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너희 보호자는 어디 있니?”

“선생님이요?”

“선생님?”

“네.”

선생님이라는 말에 그레이스는 저 낡은 건물이 고아원이고, 이 아이들은 고아원에 소속된 고아들임을 확신했다.

‘선생이라는 자가 혹시 아이들을…….’

그레이스가 끔찍한 생각을 하며 안색이 파랗게 질렸을 때, 저 멀리서 젊은 여성이 커다란 봉투를 들고 다급하게 달려왔다.

아이들이 여성을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얘들아, 미안해. 원래 가던 가게가 오늘 사람이 많아서…….”

선생으로 보이는 여인은 봉투에서 하루가 지난 듯한 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그레이스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소, 손님이세요?”

“아마도 손님인가 봐요.”

“손님이에요!”

여전히 그레이스의 망토를 꽉 잡고 있는 아이가 손님이라고 바득바득 우겼다. 고아원의 선생은 상황을 파악하고 ‘아…….’ 하며 짧게 탄식했다.

“죄송해요.”

“아, 아뇨. 아니에요.”

그녀는 내놓은 비누가 팔 만한 물건이 아님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 고아원의 관리자인가요?”

“아, 아뇨. 관리자는 아니고요. 원래는 그냥 교사였어요.”

“……?”

그녀의 애매한 대답에 그레이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었다. 그녀도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그레이스는 낡은 건물을 힐끗 바라보았다.

‘고아원이라면 분명 후원금이 들어올 텐데.’

후원금이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아이들이 팔리지도 않을 비누를 내놓고 옹기종기 앉아 있을 필요는 없을 정도였다.

‘아하.’

그레이스는 여자의 부르튼 손끝까지 본 다음,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고아원의 관리자일 원장이 도망을 쳤는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일단 그자가 고아원의 돈을 횡령하고 있으며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있는 여자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없는 돈을 긁어모으고, 부업까지 하면서 돌보고 있는 듯했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이란.’

그레이스는 고민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비누를 다 사 버릴까.

아니면 공작 부인의 이름으로 고아원에 후원을 해 버릴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1차원적인 해결 방식이었다.

비누를 사 주는 건 결국 오늘 당장밖에 해결이 되지 않으며, 공작 부인의 이름으로 후원하는 것은 그레이스가 이혼하면 더 이상 해 주지 못할 일이었다.

‘후원금을 다시 받거나, 후원금을 받지 않더라도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이…….’

그레이스의 시선이 다시 비누 쪽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레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아, 아이들이 여기까지 데려왔나요? 정말 죄송해요.”

“이름이 뭔가요?”

“네?”

“아, 저는 그레이스…… 린덴이라고 해요. 제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게 예의니까요.”

그레이스는 스스로를 그레이스 펠튼이라고 소개하려다가 결혼 전 성인 린덴으로 정정했다.

“저, 저는 클레타 던이요.”

“그래요, 던.”

클레타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던, 솔직히 저는 집에 비누가 많아서 살 필요가 없어요.”

클레타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원래 축제는 쓸모없는 물건을 사기 딱 적합한 시기죠.”

“…….”

그레이스가 광장 쪽을 보았다. 아직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이건 그냥 지나가지 말고 도와주라는 누군가의 계시였다.

“부인, 여기 계셨군요.”

그레이스가 머릿속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올리고 있을 때, 벤자민이 코디얼을 탄 음료 두 잔을 들고 쫄래쫄래 다가왔다.

“……부인?”

“…….”

벤자민은 주변 상황을 쓱 보고, 그레이스의 진지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살폈다.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잠깐만…….”

“네?”

“잠깐만, 다른 것 좀 해도 괜찮을까요?”

“…….”

다른 것이라는 말에 벤자민이 멀뚱한 낯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러니까…… 저도 알아요. 그, 축제인 것도 알고 각, 베니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도…….”

클레타의 앞에서는 당당했던 그레이스였지만 어쩐지 벤자민의 앞에서는 한없이 작고 소심해졌다.

그레이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벤자민과 그레이스의 사이에 껴 눈치를 살피던 클레타가 그녀를 불렀다.

“린덴 씨?”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호칭이 ‘린덴’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썹 한쪽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린덴?”

“아, 이쪽은 제 남편이에요.”

그러나 그레이스가 클레타에게 벤자민을 남편이라고 소개하자 눈썹이 바로 온순하게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는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부인. 신경 쓰지 마세요.”

“……베니는 그냥 혼자 축제를 즐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혼자 즐기는 게 무어가 즐겁겠습니까? 제가 거들면 빨리 끝나겠죠. 무엇이든 시켜 주십시오. 빨리 끝내고 다시 축제를 즐기면 되잖습니까.”

물론 제가 도움이 된다면 말입니다. 벤자민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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