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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3)화 (13/131)
  • 13화

    ‘오늘 축제에 가서 선물로 줄 만한 게 있으면 사 주지 뭐. 벤자민의 돈이어도,, 축제 분위기 덕에 신경 쓰이지 않겠지.’

    “마님,, 옷은 어떤 게 좋을까요?!”

    샐리와 다른 하녀들이 까르륵 웃으며 그레이스에게 옷을 보여 주었다.

    평소의 그레이스가 고르던 옷들 사이사이에 옷장 틈에 처박혀 있던 화려하고 예쁜,, 그레이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아름다운 드레스가 끼워져 있었다.

    “세 번째로 할래.”

    그레이스는 덤덤한 얼굴로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골랐다.

    모두가 아주 잠깐 실망하려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른 드레스를 치웠다.

    “가면은 하얀색으로 준비하길 잘했네요. 가면의 색까지 어두우면 마님의 숨이 막힐 거예요. 분명.”

    샐리는 재잘재잘 떠들며 그레이스를 가볍게 치장해 주었다.

    “어머.”

    그레이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샐리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

    “마님, 옷의 품이 남네요.”

    샐리는 옷의 여유분을 손으로 집으며 그레이스에게 보여 주었다. 팔뚝과 허리 부분에 아주 많지는 않지만, 품이 남았다.

    “줄일까요?!”

    “그래, 오늘까지만 입고 줄이는 게 좋겠어. 지금 당장 줄일 시간은 없으니까.”

    그레이스는 거울을 보며 굽으려던 등을 쭉 펴곤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에 시계가 비쳤다. 곧 출발할 시간이었다.

    그레이스가 별관를 나가니 이미 벤자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망토까지 걸친 그레이스와 달리 벤자민은 꽤 가벼운 차림이었다.

    대신 그는 챙이 아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부인, 오셨습니까.”

    “제가 늦었나요?!”

    “아닙니다. 제가 먼저 나온 탓이지요. 부인은 절대 늦지 않았습니다.”

    ‘……음.’

    그레이스는 확실히, 이제 딱히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에 관한 기억이 떠오를수록 오히려 감정을 분리하기 쉬웠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원래였다면 저 말에도 설렜을 텐데 말이지.’

    그레이스는 원래 전개라면 가면 축제에서 벤자민과 아리아가 만났을 테고, 자신이 걸치고 있는 망토도 벤자민이 아리아에게 선물해 주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더욱 냉정해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알면 알수록 그를 사랑하는 건 손해였다.

    ‘감정에 좌지우지되어서 죽는 건 사양이야.’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각하, 마차로 나가면 눈에 띄니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뒷문으로 걸어서 나가나요?”

    “네. 그리고, 밖에서는 호칭을 다르게 하는 게 좋겠군요.”

    “예를 들면요?”

    그레이스가 눈을 깜빡, 하며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청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멈칫, 하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하얀 가면을 조심스레 똑바로 해 주었다.

    “……음, 적당히 여…….”

    “네?”

    “아닙니다.”

    벤자민은 자신이 쓴 모자의 챙을 아래로 꾸우욱 내렸다.

    “베, 베니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참…….

    ‘참 이상한 사람이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냥 ‘여보’라고 불러 달라고 하면 부를 수 있었다. 당연했다. 둘은 사랑하지 않아도 부부였다.

    그레이스가 그를 그런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기는 했다. 그녀의 얼룩진 기억을 뒤적여 보았는데, 확실히 없었다.

    ‘여보?’

    그레이스는 실제로 부르지는 않고 속으로만 발음해 봤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음에 형태가 있다면 거기에도 잔털이 다닥다닥 돋는 듯했다.

    “그래요, 베니.”

    그래서 그레이스는 그를 그냥 베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면 당신은 저를 뭐라고 부를 건가요? 그냥 부인이라고 부르나요?”

    벤자민은 여전히 모자를 꾹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레이스에게 먼저 뒷문 쪽으로 향하라며 손짓했다.

    그레이스가 먼저 걸음을 떼자 벤자민이 그제야 그녀를 따라갔다.

    모자에서 손을 떼자 가면을 썼음에도 벤자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용인들은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인께서는 제도에 올라와 축제는 처음이지요?”

    “그랬나요? 결혼한 지 1년이나 되었는데.”

    “……그랬죠.”

    그레이스의 대답에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실내파라서요.”

    그레이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거의 항상 제도에 있었네요. 왜…….”

    어차피 벤자민은 북부에서 마수를 토벌하는 것이 공작으로서의 본업이며, 그레이스는 제도의 사교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제도 공작저에 주로 머무냐고 물어보려던 그레이스는 입을 딱 다물었다.

    ‘아리아 때문인가 보다.’

    제국에서 제일 큰 신전은 제도에 위치했다. 아리아는 성녀이기에 당연히 제도에 머무르고.

    그리고 벤자민은 아리아를 남몰래 연모하고 있으니, 그가 무슨 이유를 대서든 제도에 있는 건 당연하다.

    그레이스는 또 빠른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건…….”

    “음, 대충 알 거 같아요. 그럴 수 있죠. 북부까지의 이동은 게이트를 이용하면 될 문제이고, 공작령은 실제로 지내기 좋지 않기도 하니까요.”

    그레이스는 이해한다며 벤자민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은 은근히 안심한 낯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가면 축제는 제도에서만 즐기나요? 제 고향과 인근 영지에서는 즐긴 적이 없거든요.”

    “예. 아마 부인의 영지와 그 부근에는 규모가 있는 신전이 없어서 그럴 겁니다.”

    “…….”

    “……절대 부인의 고향을 무시한 발언은 아닙니다.”

    둘은 저벅저벅 시내까지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가면 축제는 신전에서 주최하는 거였군요.”

    “예. 이 시기쯤 하죠. 딱, 낮에는 따뜻하지만 밤에는 적당히 시원한 날입니다. 가면을 쓰는 이유는 이렇게 좋은 날이면 심술궂고 나쁜 마귀가 놀러 나온 사람들 틈에 숨어, 마음에 드는 사람의 얼굴을 훔쳐 간다는 설화 때문이죠.”

    “아. 그 설화는 알아요. 동화책으로 읽은 적 있어요. 심술궂고 못생기고 나쁜 마귀였죠.”

    그레이스의 기억에도 있었다.

    “아버지가 벽난로 앞에서 저와 언니를 품에 안고 읽어 주셨었죠. 음…….”

    설화의 내용대로라면 자신은 가면을 쓸 필요가 없지 않나 싶기도 했다.

    ‘아리아나 벤자민, 황태자는 무조건 써야 할 거야.’

    그들은 마귀뿐 아니라 누구라도 탐을 낼 외모일 테니 말이다.

    “……부인은 자작과 사이가 좋은가 봅니다.”

    “그랬나요?”

    “예. 가족에 대한 이야긴 저한테 별로 안 했는데, 가끔 할 때면 좋은 이야기만 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레이스는 ‘그랬나?’ 하고 생각을 더듬어 보려고 했다. 그때, 벤자민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아.”

    “죄송합니다.”

    어느새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거리 앞이었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부인을 에스코트하는 게 옳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팔짱보다는 손이 낫겠습니까?”

    “음.”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다가 벤자민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그레이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각, 베니?”

    벤자민의 시선은 여전히 포개진 두 손을 향해 있었다. 그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뭔가 작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

    그레이스는 저 숨소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여 눈을 가늘게 떴다. 벤자민은 무의식중에 낸 듯했다.

    ‘어쩐지, 안심한 거 같기도 하고…….’

    그녀가 손을 빼려고 했으나 벤자민은 손을 꽉 잡으며 내렸다.

    “부인께서 최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지만, 식사를 조절하고 있기도 해요.”

    “그래도 오늘은 맛있는 걸 먹으면 안 될까요?”

    그레이스는 그의 제안에 난처해졌다. 역시 축제는 음식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축제에서 가장 이윤을 남기기 좋은 건 먹을거리와 작고 쓸모없는 기념품이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보이지 않으면 절제하기 쉬웠다. 하지만 여기는 유혹의 거리, 유혹의 향연이었다.

    “음. 으음…….”

    그레이스는 끙끙 앓았다.

    아무래도 그녀도 먹고 싶기는 했다. 맛있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벤자민은 낑낑거리는 강아지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가면에 가려져 있지만 눈에 훤히 보였다.

    “아, 안 될까요?”

    벤자민은 촉촉한 눈으로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안…….”

    독한 마음을 먹고 안 된다고 말하려던 순간, 갓 구운 빵과 농후한 버터 내음이 느껴졌다.

    “…….”

    그뿐 아니라 쌉쌀하고 달콤한 초콜릿 냄새, 지글지글한 기름, 갓 구운 고기 냄새와 약간 태운 설탕 냄새.

    온갖 유혹적인 향이 거리에 가득했다.

    그레이스가 무력하게 떨었다.

    “조, 조금만…….”

    졌다.

    “……맛있다.”

    누군가가 말한다. 설탕은 정말 백해무익이라고.

    하지만 설탕이 듬뿍 들어간 푸딩을 스푼으로 박박 긁어먹으며 그레이스는 감동했다.

    진짜 눈물겹도록 맛있었다.

    사람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데, 과연 백해무익일까. 한동안 설탕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던 그레이스는 감동받고 있었다.

    특히, 디저트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기에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는 찬송가가 울리고 있었다.

    입 안에서 ‘달아!’라고 외쳤지만 그 단맛이 뇌에 직격타를 가하며 달지만 행복하다고 비명을 질렀다.

    “부인의 입에 맞나요?”

    공작가에서 공수해 오는 디저트의 품질에 비하면 한없이 질이 낮았다. 그런데도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푸딩 그릇을 싹싹 긁어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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