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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2)화 (12/131)

12화

그레이스는 돈이 아니라 다른 걸 주기로 했다. 역시 돈 문제는 벤자민에게 떠넘기는 게 낫다.

샐리는 그레이스의 명에 쿠키 세트를 사러 떠났다.

그레이스는 망토를 대충 침대에 올려 두고,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첫 번째 서랍을 열자, 책갈피가 여전히 한가득했다.

“이거 다 직접 만든 거였지.”

그레이스는 꽃의 이름은 지지리도 모르면서도 좋아했다.

그래서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꽃은 압화하여 보관했는데, 그냥 보관하기보다는 책갈피를 만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독서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의 취미는 대체로 혼자 조용히 즐길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런 거치고는 꽃의 종류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거 같지만.’

보통 취미라는 건 관심이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종류나 이름을 잘 모른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다가도, 그냥 예뻐서 좋아하는 정도라면 그럴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좋아한다고 해서 전부를 알 수 있는 건 아니기도 하니까…….’

그레이스는 그녀가 전생의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전생의 나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지만.”

그레이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책갈피의 수를 헤아렸다. 수가 부족할 거 같지 않았고, 대충 성의를 표현하기도 좋아 보였다.

‘싫어하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공작 부인이 준 건데 대놓고 버리지는 않겠지.

⋆★⋆

오랜 원정을 끝낸 펠튼 공작가의 기사들이 낡은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동료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래도 돌아오는 길은 게이트를 썼다며?”

“주군께서 기사단을 향한 지원은 아끼지 않으시니까…….”

레흐턴은 2년 주기로 나타났다. 1년 한번 나타나면, 다음 1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펠튼 기사단은, 아니 펠튼 공작가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은 대체로 공작가의 대우에 만족도가 높았다.

타당한 임금과 좋은 복지, 보장된 휴일과 이해심을 가진 온화하며 유능한 주인.

만족도가 높지 않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펠튼 공작가에서 태어나 죽고 싶다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원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 올해는 레흐턴이 쉬는 휴식기였다. 진짜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보이지도 않아서 평소에는 제발 그만 좀 나오라고 빌었던 레흐턴을 향해 제발 좀 나타나라고 기도까지 올릴 정도였다.

“괜찮아. 이번 일도 마님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에 주군께서…….”

기사 중 한 명이 말하다 말고 거무죽죽한 눈가를 문지르며 훌쩍거렸다.

“마크, 너 우냐?”

“시끄러워. 나는 마님께 충성을 맹세했어.”

마크는 그날을 떠올렸다.

그레이스가 소공작 부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고향에 있던 그의 누나가 전염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후에 성녀가 나타나 해결했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성녀가 발견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모두가 마크의 누나가 사망할 것이라 했다. 조실부모했던 마크는 누나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냥 고통 없이 죽기를 바라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었다. 제국에서는 아예 그 마을을 버릴 낌새를 보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그레이스는 자신의 재산을 풀어 마을의 환자들을 돌보고자 했다.

그레이스의 일을 보고받은 벤자민 또한 전염병의 심각성과 그들이 고립되기 직전이라는 상황을 알고 직접 나서 그들을 보호하고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모두가 위험하다고 했음에도 그레이스는 한 번이면 된다며 전염병이 돈 마을을 직접 방문했으며 그 뒤, 혹시 몰라 자신을 격리했다.

아무튼, 그레이스의 착한 마음씨가 실제로 무슨 도움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뒤로 사망자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마크는 이 일을 두고 공작 부인의 기적이라고 일컬었다.

“나는 이게 제국 내에서 화제가 되지 않은 게 가장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음.”

마크의 말에 동료가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가 될 정도가 아니라 이건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이라고. 하지만 마님도…….”

마크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동료가 검집으로 그의 머리통을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그만 말해라. 기사가 말이 너무 많아.”

“윽.”

“그리고 네 누님 온다.”

동료가 고개를 까딱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마크가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한 하녀가 바구니를 들고 통통한 여인과 걸어오는 게 보였다.

“누님!”

그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샐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샐리의 옆에 서 있는 그레이스를 발견하고 굳었다.

“마, 마님?”

“……아, 안녕하신가?”

그레이스는 이 인사말이 맞나 고민했고, 마크는 그레이스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나 싶어 경직했다.

“마님께서 예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레이스가 왔다는 말에 기사단이 일동 열을 맞춰 서며 예우를 보였다.

“그대들이 나 때문에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내가 별거 아니지만 고마운 마음에 준비를 했어.”

기사단 모두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들고 있는 바구니를 그레이스에게 넘겼다. 그레이스는 바구니에서 주섬주섬 소분한 쿠키와 책갈피를 꺼내다가 멈췄다.

“……아.”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그들을 살폈다.

“레흐턴을 잡으러 다녀온 이들이 누구지?”

기사들은 그레이스의 표정과 행동에, 그녀가 따로 선물을 해 주려고 내려왔음을 눈치챘다.

몇 시간 동안 힘드네 뭐네 곡소리 하던 기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딱 열을 맞춰 서며 그레이스에게 자신이라며 어필했다.

그레이스는 어쩐지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데 정말 좋아하네.’

다들 그레이스가 나눠 주는 쿠키와 책갈피를 매우 좋아했다.

‘소설에서는 하도 공작 부인에 대한 폄하 발언이 많아서, 기사들도 나를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관 외에서의 자신에 대한 평가를 전혀 모르던 그레이스는 되려 자신의 선물을 기껍게 받는 기사들을 보며 신기하게 여겼다.

“……부인.”

“꺄악?!”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기사들에게 미소를 짓던 그레이스의 뒤에서 은밀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가 깜짝 놀라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자 벤자민이 보였다.

벤자민은 놀라게 할 생각이 없었는지 되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균형을 잃을 뻔한 그레이스를 붙잡았다.

“……아.”

그러나 그녀의 몸을 잡은 것도 잠시,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손을 놓았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손을 댔던 제 팔뚝을 문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 언제 오셨나요?”

“방금 왔습니다. 그보다…….”

벤자민은 방금 그레이스에게서 선물을 받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에게 무엇을 준 것인지요?”

“아, 저 때문에 레흐탄이라는 마수를 잡으러 다녀왔다고 해서요.”

정확히는 레흐턴이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마수의 이름을 틀린 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

다만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대답에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잡으러 갔습니다만.”

“네?”

벤자민이 불퉁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마지막에 합류해, 레흐턴의 굴을 찾아 잡았단 말입니다. 저들보다 제가 차라리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레이스는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는 심정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음.”

샐리가 기사단의 수에 맞춰 쿠키를 사 왔기에, 쿠키는 똑 떨어져 있었다.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구니에 남아 있는 책갈피라도 하나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

그제야 벤자민의 불퉁했던 표정이 풀렸으나, 기분이 좋다기엔 미묘한 미소였다.

“감, 사합니다…….”

그레이스가 그에게 건넨 책갈피에 압화된 꽃은 파란색 나팔꽃이었다.

‘생각해 봤는데 내가 너무하긴 했어.’

쿠키와 책갈피는 벤자민의 의미 모를 명령에 기사단이 휘말린 데 대한 미안함에 마련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벤자민에게도 감사의 선물을 주기는 해야 했다.

‘근데 내가 뭘 줘.’

뭘 사 준다고 해도 결국 그건 벤자민의 돈이었다.

만들어 준다고 해도, 그레이스는 요리를 못했다. 그리고 공작 부인이 갑자기 주방에 가서 과자를 굽는다, 요리를 한다, 해 봤자 주방장이 썩 기분 좋아할 거 같지 않았다.

한다면 새벽 중에 아무도 없을 때쯤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그때 사고를 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에이 괜찮겠지~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이 보통 서막이며, 플래그다.

‘보통 빙의하면 주방에 가서 요리하다가 막…….’

이런 음식은 처음이고 그래서 모두의 호감을 사고, 그래서 구박데기였다가 사랑받고 그러는데.

그레이스의 생각은 별관에 있는 사람들 쪽으로 이어졌다.

‘나에게 엄청나게 잘 대해 주는 거 같아.’

연민이든 뭐든 간에 잘 대해 준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동정을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나중에 떠날 텐데, 동정 섞인 호의도 알차게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별관 사용인들이 들으면 상처받고 오열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끝낸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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