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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화 (10/131)
  • 10화

    그레이스의 침실에 돌멩이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녀는 조심조심 창 쪽으로 다가가 열지는 않고 고개만 내밀었다.

    “……!”

    벤자민은 어두운데도 그녀를 어떻게 찾았는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쩌지.’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이미 눈이 마주쳤는데 창문을 열지 않는 것도 이상해, 일단 열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벤자민이 자신에게 제 존재를 알리는 걸 보니 할 이야기가 있겠거니 싶었다.

    그레이스가 창문의 걸쇠를 풀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자신과 대화를 할 의사가 있다는 걸 깨닫고 급하게 앞머리를 정돈했다.

    “부인, 안 주무셨군요.”

    “그럼 각하께서는 자는 사람의 창을 그리 두드리셨나요?”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뾰족하게 물었다. 벤자민과 그레이스 둘 다 아차 싶었다.

    “아, 아닙니다. 아주 작은 돌이라, 깨어 있다면 들을 정도였고 아니라면 못 듣고 계속 주무실 정도로…….”

    “…….”

    이래저래 변명하던 벤자민은 끄응, 앓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목덜미를 쓸었다.

    “아닙니다. 제 잘못이 맞습니다.”

    “그런가요?”

    “예, 최근 부인께서 산책을 나오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다급해졌습니다.”

    “……저도 조금 뾰족하게 대꾸한 거 같아요. 죄송해요.”

    그레이스가 사과하자 벤자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그의 얼굴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던 그레이스가 물었다.

    “그런데 그냥 아래에서 집사를 통해 저를 부르거나 별관으로 들어오지 그러셨어요.”

    “저는 별관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

    무슨 소리냐는 듯한 그레이스의 표정에 벤자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려다가, ‘아’ 하며 덧붙였다.

    “별관은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부인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저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했다. 애초에 공작저는 가주인 펠튼 공작…… 즉 벤자민 펠튼의 소유일 테니 외부인 취급이 가능한가? 하고. 그러다가 놓친 의문이 뒤따랐다.

    ‘응?’

    “제가 각하를 출입 금지한 적이 있다는 건가요?”

    “그런 거죠.”

    미쳤나 봐.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대답에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벤자민에게 실연당한 과거의 그레이스를 떠올리며 비련의 상처를 곱씹고 있었는데, 그를 짝사랑하던 그레이스는 무려 짝사랑 대상을 별관에 출입 금지시켰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출입 허가를 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레이스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이 흐릿한 기억 속의 그레이스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한참 어버버거리고 있자니 벤자민이 다급하게 그녀의 과거, 정확히는 빙의 전의 행동을 변호했다.

    “제가 부인께 잘못한 것이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냐고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정도 기억도 벅찼다.

    일단, 그래서 왜 지금 창문을 통해 자신을 불렀는지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각하께서 저를 이리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이 배시시 웃었다.

    “부인께서 저의 부름에 대답한 것이 기뻐 묻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

    “곧 가면 축제가 열립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다녀오지 않겠습니까?”

    ‘가면 축제.’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제안에 우뚝 섰다.

    “부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보라색이 되었다가, 파랗게 질렸다.

    벤자민은 어두운 밤이었으나 그레이스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주, 주치의……!!”

    “아뇨!!”

    그레이스가 다급하게 소리 질러 벤자민의 말을 뚝 끊었다.

    벤자민과 그레이스는 평소에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늦은 밤, 갑자기 벤자민과 그레이스의 큰 목소리가 들리자 사용인 숙소 쪽에 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밝혀졌다.

    그레이스는 조금만 더 있으면 소란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빨리 끝낼 필요성을 느꼈다.

    “가요!”

    “……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선뜻 가자고 할 줄은 몰랐기에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자신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가자고요! 축제!! 그러니까 그 가면 축제요!!”

    그러고는 후다닥 창문의 걸쇠를 잠그고 커튼을 촤악촤악 당겨 가렸다.

    벤자민은 더 이상 그레이스가 보이지 않았음에도 멍하니 그녀가 있던 쪽을 바라보다가 멍청이처럼 웃었다.

    “……각하?”

    그 모든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보좌관이 그제야 다가갔다.

    멍청이처럼 웃던 벤자민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사회적 위신을 챙겼다.

    “가지.”

    “…….”

    “부인께서 나에게 시간을 내주셨으니 24시간은 오롯이 부인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해.”

    “축제가 24시간 내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부인께서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쩌려고.”

    보좌관은 생각했다.

    펠튼 공작 부인이 새벽에 갑자기 벤자민을 부를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

    그레이스가 가면 축제라는 말에 안색이 질린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벤자민이 나한테 가자고 했다고?’

    원작에 ‘가면 축제’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 내용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 분명 벤자민은 그레이스와 함께하지 않았다. 부인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며 아리아에게 개수작을 부렸다.

    ‘소설에서도 막, 어? 강아지 같은 얼굴로 아리아를 꼬드겼다고 그랬어.’

    제 부인한테 선물로 주고 싶은데 여성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며 아리아한테 골라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는 고맙다고 아리아한테도 선물을 사 줬다.

    그러면서 아리아의 취향을 파악하고, 그 뒤에도 아리아의 선물을 주기적으로 사 줬다. 아리아가 부담스러워할라치면 그는 계속 우리는 친구라고 말했다.

    완벽한 서브남의 밑밥이었다.

    그레이스는 불륜을 저지르는 인간의 특징을 떠올렸다. 순진한 여성을 꼬드기는 불륜남의 특징 그 첫 번째, 자신이 얼마나 가정적인지 강조하며 상대방의 경계심을 무너트린다.

    그래, 그것은 쓰레기의 밑밥과도 같았다.

    ‘그 가면 축제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그레이스가 같이 가자고 대답했다.

    그러면 원작과 내용이 달라지나?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원작과 달라질 수 있는 걸까?’

    벤자민 때문에 속이 복잡해졌으면서도 그의 제안에 응한 이유도 이것이다.

    ‘그러면 원작 속에서도 그레이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나?’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벤자민이 아니라, 펠튼 공작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기로 했다.

    ‘펠튼 공작가.’

    상징은 태양을 받친 나무. 전대 공작 부인은 유서 깊은 크렘린 백작가의…….

    그레이스는 펠튼 공작가의 역사에 대해 줄줄 떠올리다가 생각을 멈췄다.

    ‘미친 이런 거 말고.’

    무슨 이 몸뚱이는 자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으면서 공작가에 대한 역사는 빼곡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실제 펠튼 공작의 역사가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던 ‘설정’을 떠올렸다.

    펠튼 공작의 상징이 태양을 받친 나무였다면 당연하게도 태양은 황실이었다.

    펠튼 공작가는 제국이 설립되고 나서부터 황실과 함께했고 그를 지탱하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성녀의 소원에서도 점차 배경 인물의 입을 통해서 태양을 지탱하는 게 아니라 삼킬 나무라고 하지.’

    그 이유는 대대로 펠튼 공작이 다스리는 펠튼 공작령 때문이다. 제국은 기후가 온후하였지만, 딱 한 영토가 척박했다. 당연하게도 북쪽이었다.

    ‘보통 북부 공작은 흑발 아냐?’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외관에 대하여 여기까지 생각하기로 했다. 이건 편견인 거 같긴 했다.

    판타지 전설 같은 제국 역사를 뒤로하고, 북쪽에는 마수가 들끓었고 제국의 수호를 위해 마수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검을 자처한 것이 최초의 펠튼 공작이었다.

    황제는 그에게 공작의 칭호를 내리며, 넓은 북쪽의 영토에 펠튼 공작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대가 지난 뒤, 제국은 자리를 잡다 못해 강대해져 펠튼 공작에게 온후한 기후의 영토를 두 개 더 하사했다.

    ‘당연했지. 북쪽 땅은 제일 살기가 어려운 곳이니까.’

    영지민도 거의 없고, 사실상 마수만 계속 나왔다.

    말만 공작이지 명예직에 가까웠다. 책에서도 강조하기를 당시 펠튼 공작들은 욕심이 원체 없었고 그의 부인들도 다 똑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다가 돌연, 펠튼 공작의 위상이 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마법의 재발견으로 마도구사라는 직업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마석’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마석은 여러 지역의 광물에서 발견되었지만, 가장 순도 높은 것은 마수의 심장과 뼈로 만든 것이다.

    ‘북쪽엔 마수가 득시글하니 말이야.’

    제국의 재산 어쩌구 하면서 땅을 빼앗거나 마석을 기부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대대로 펠튼 공작은 군사 비용을 자신의 사비로 채웠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여기까지 떠올렸음에 감탄했다.

    아무리 후반부에서는 흑화해서 적폐 다정남이 된다고 해도 그전까지는 최애였던 위상이 있었다.

    ‘종이책으로 보다가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핸드폰으로 다음 권을 찾아보는 게 아니었는데…… 책으로 끝낼걸.’

    아무튼, 최상급 마석의 판매를 시작으로 펠튼 공작가는 점점 힘이 강해졌으며 황실은 그들의 기를 죽일 필요가 있었다.

    ‘그 선택이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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