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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9)화 (9/131)
  • 9화

    덜커덩.

    그레이스가 책상을 내리치자, 책상 서랍 쪽의 이음새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응?”

    그레이스가 고개를 숙여 책상 서랍 사이를 확인했다.

    그사이에 책 한 권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와, 누가 봐도 일기장이네…….’

    그레이스 펠튼은 일기장을 정말 꼭꼭 숨겨 둔 듯했다.

    그녀는 일기장을 펼쳤다.

    내용은 결혼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부터였다.

    ‘음, 생각보다 꾸준하게 쓴 건 아닌가?’

    그레이스는 생각보다 부지런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날짜도 적혀 있지 않았다.

    메모장처럼 일기를 써 두기도 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아.’

    그레이스의 일기장을 읽고 있으니, 적혀 있는 정보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그레이스는 사실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런 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이 이야기를 언젠가 벤자민에게 했다가, 벤자민의 유쾌하지 않은 듯한 눈빛을 읽어 버리고 다시는 아이에 관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

    ‘진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레이스는 이게 내 일도 아닌데 왜 내가 상처 입어야 하나 생각했다.

    “……아.”

    그레이스는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서재의 천장은 청록색이었고, 금색의 염료로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완벽하게 그레이스의 취향이었지만 그냥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일기장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빠졌다. 벤자민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떠오를수록 그의 다정은 그저 다정이고, 사랑이 아니라는 확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마음이 아팠다. 알고 있다. 이 감정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다.

    이 통증은 원래의 그녀가 남긴 흔적이었다.

    그런데도 아팠다.

    당연했다.

    짝사랑은 원래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솔직히, 아주 솔직히 고백해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른 빙의물 소설처럼 빙의하고 보니 변한 나를 남편이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말이다.

    하지만 점점 그레이스의 기억이 돌아오자, 우울감과 그를 향한 짝사랑은 그레이스를 미치게 했다.

    점점 원래의 그녀는 사라졌다.

    다행이기는 했다. 원래의 삶도 딱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바로 이 삶에 적응할 수 있었으며, 원래의 자신을 딱히 떠올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일기장을 읽고 우울해져 산책도 때려치우고 일주일 동안 또 방에 틀어박혔다. 생각보다 사람은 감정에 좌지우지되었다.

    별관의 사용인들은 그레이스가 서재에서 돌아오고 다시 우울해진 걸 보고 비상을 울렸다. 그레이스가 모르는 뒤편에서는 ‘마님 살리기 위원회’가 열렸다.

    아마 그레이스는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샐리가 그 모임의 대표였다.

    대표인 샐리가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은근히 말했다.

    “마님, 조만간 마을에 축제가 열린다는데 한번 구경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

    “가, 가면 축제예요! 망토도 쓰고! 가면도 쓰고! 예쁜 것도 많아요. 기사님들을 많이 모시고 가면 안전할 테고…….”

    샐리는 그레이스가 자신의 외관을 얼마나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단 샐리뿐 아니라 별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 마님께서 식이조절 중이신 건 알지만 그때는 맛있는 것도 많아요. 네? 그날만 맛있는 걸 먹는 게 어때요?”

    “…….”

    “마님, 최근엔 거의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샐리는 거의 울 듯이 말했다. 사실 정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샐리를 아꼈던 그레이스라면 이쯤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도 벅찼다.

    ‘나한테 왜 다정해?’

    그 사람의 천성인 건가?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다정함이 좋았지만, 동시에 싫었다.

    억지로 결혼한 건 알고 있었다. ‘성녀의 소원’에서 엑스트라들이 툭하면 그 부분을 강조하는 대사를 치고는 했으니까.

    그레이스도 질리도록 읽어서 알고 있었다.

    ‘벤자민이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기대 따위 절대 못 해.’

    그전에 내가 진짜로 사랑하게 되어 버릴걸.

    그렇게 되면 벤자민이 무슨 행동을 해도 받아들이고 말 터였다.

    아무리 수상쩍어도, 의심스러워도 사랑하기에 받아들이고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어쩌면 소설 속 그레이스 펠튼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이불 속에서 인상을 구겼다. 샐리가 뒤에서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샐리?”

    그제야 그레이스가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샐리를 마주했다.

    “왜, 왜 우니?”

    그레이스가 거의 먹은 것 없어 핑그르르, 어지러운 시야를 붙잡으며 샐리에게 물었다. 샐리는 그 모든 게 속상했다.

    “마님께서 몸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제가 도움이 안 되니까요.”

    “아, 아니란다. 네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그레이스가 쩔쩔매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냥 속이 복잡해져서 그랬어. 미안. 생각이 많아지니까 주변이 안 보여서 그래…….”

    “…….”

    “…….”

    샐리를 보던 그레이스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밥, 먹을까?”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프로 준비할게요…… 콩소메가 좋으세요, 포타주가 좋으세요?”

    “콩소메는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니?”

    그레이스의 질문에 샐리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주방장이 매일 새로 끓여서 대기하고 있어요.”

    “…….”

    언제 먹고 싶다고 할지 모를 그레이스를 위해 주방장이 매일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그 말에 죄책감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안.”

    “마님께서 사과하시라고 말한 건 아니에요.”

    “응.”

    그레이스는 귀족이었지만 사용인에게 사과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건 빙의 전부터 그랬다.

    마음이 유독 여렸고, 착했으며 남들의 고난을 그냥 지나칠 줄 몰랐다.

    그래서 별관의 사용인 전부 그레이스를 아꼈는데, 그 사실을 그레이스는 몰랐다.

    여기서 말하는 그레이스란 빙의 전, 빙의 후 전부를 의미했다.

    결국 그레이스는 침대 밖을 빠져나와 씻고 주방장이 준비해 준 수프를 해치웠다.

    그레이스는 하녀들이 고심해서 고르고 골라 갈았다는 새 침대 시트에(솔직히 그레이스는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그들을 열심히 칭찬했다. 그들은 모두 뿌듯해했다.) 파묻혀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다시 읽자.’

    배도 부르고 몸도 깨끗했다.

    그레이스의 일기장은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새삼스럽게 벤자민의 진심을 확인하니 충격받았을 뿐이었다.

    ‘이혼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그레이스가 이혼하려고 하는 건 이혼한 뒤에도 잘 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그레이스로 쭉 살 거라면,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벤자민에게서 위자료를 뜯어낼 만큼 잘 뜯어내서 잘 사는 게 그레이스의 꿈이었는데, 그렇다면 위험 요소를 전부 제거해야 한다.

    “일단, 이거.”

    그레이스는 가장 첫 페이지를 펼쳤다.

    [권유한 대로 일기를 써 보기로 했어요.]

    일기의 첫 문장이었다.

    “권유?”

    누가 그레이스에게 일기를 쓰라고 권유했는가.

    ‘이거 장르 뭔데.’

    그레이스는 자신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해, 왜 추리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심히 고민했다.

    ‘그리고 왜 누군가한테 말하는 것처럼 쓰여 있지?’

    지난번에는 마구 떠오르는 기억을 소화하느라 깨닫지 못한 위화감이었다. 이 위화감부터 깨달았으면 그 쓸데없는 우울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다음에 가름끈으로 나뉜 페이지를 확인했다.

    그 페이지에는 날짜가 적힌 칸이 있었고, 어떤 날짜마다 주기적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빙의된 후로는 체크되어 있지 않아.’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기적으로 체크한다는 것은, 원래의 그녀가 주기적으로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그레이스도 빙의된 후 그에 대해 떠올릴 법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정확히는 원래 그레이스의 기억을.

    “……이건 이상해.”

    그레이스는 이제까지 제 기억이 모호한 이유가 빙의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니 그것이 원인이 아닌 듯했다.

    그냥, 그레이스의 기억은 너무 뒤죽박죽 뒤엉키고 뿌옇고 흐리며, 불확실했다.

    원래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떠오르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 있던 일들도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레이스가 떠올리기 시작한 기억조차도 가끔 다른 기억과 혼재되기도 했다.

    “…….”

    그레이스가 본 기억들은 전부 어떤 일과에 대한 이야기였으나 결론적으로 그레이스의 감정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 낯이 익지…….’

    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걸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레이스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톡.

    “……음.”

    톡.

    “뭔 소리지……?”

    톡톡!

    “……어?”

    그레이스는 그제야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게 아니란 걸 깨닫고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창밖이 새까맸다.

    “뭐야?”

    그레이스가 머무는 침실은 높은 층이었다. 그래서 새가 창을 두드리나 싶었는데, 아무런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또 빤히 창을 보고 있자 작은 돌멩이가 창을 두드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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