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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8)화 (8/131)
  • 8화

    아무리 다정하고 제 앞에서 환히 웃어도 이 집에 있다가는 언젠가 죽어 버리고 말까 봐 불안했다.

    혹시 진짜 병이 걸린 게 아닐까 제 몸을 조목조목 살펴보았지만, 그레이스의 몸은 살이 찐 걸 제외하면 건강했다.

    그레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정원으로 나왔다.

    ‘어라?’

    오늘은 벤자민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았다.

    ‘아니, 안 나올 수도 있지. 이제까지 우연이라고 했는걸.’

    게다가 오늘은 평소와 달리 늦게 나오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여러 생각을 잇고 잇다가 괜히 실망하지 않기 위해 변명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 산책을 시작한 그레이스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게 들어왔다.

    ‘이게 뭐지?’

    정원 덤불 앞에는 작은 팻말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

    “…….”

    전부 꽃의 이름이 적혀 있는 팻말이었다.

    그레이스의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그레이스가 팻말을 내려다보며, 벤자민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군요. 그런 문제는 고려해 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그가 그렇게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혹시 싶어 옆에 있는 하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 팻말은 이번에 정원사가 단 거니?”

    그녀의 질문에 하녀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네! 주인어른께서 이번에 명하셨어요!”

    “각하께서?”

    “네!”

    ‘왜?’

    자신이 잘 모른다고 해서 그랬나?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키며 휘몰아쳤다.

    ‘하지만 진짜 왜?’

    벤자민이 일단은 다정한 사람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평범한 다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흘러가는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잡아, 하나하나 챙기는 것을 보면 마음속이 술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있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꿈 깨.>

    <무슨 망상을 하려는 거야? 창피하게.>

    갑작스레 찬물을 뒤집어쓴 듯 그레이스의 몸이 흠칫 떨리며 정신이 맑아졌다.

    그레이스에게 팻말에 대해 알려준 하녀가 물었다.

    “마님, 쌀쌀하신가요?”

    “……으응, 조금 그런 거 같아.”

    “그러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몸 상하세요.”

    그레이스는 주변을 쓱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어.”

    저택 본관을 보아도 벤자민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째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적응한 건가.’

    그레이스가 저택 쪽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 샐리가 포근한 모포를 가져와 그레이스에게 덮어 주었다.

    “최근 마님께서 많이 수척해지셔서 걱정이에요.”

    “수척…….”

    그레이스는 제 뺨을 매만졌다.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제가 감히 참견할 부분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만.”

    샐리는 정말 걱정이 한가득한 표정으로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샐리는 그레이스에게 호의적이었지.’

    빙의 전의 그레이스에게 가장 살갑게 말을 걸던 하녀가 샐리였다. 다른 하녀들도 친절하기는 했지만, 거리감이 존재했다.

    그런 만큼, 샐리에게 호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가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냥, 갑자기 살을 빼기 시작해서 그런가 봐.”

    “……혹시 누군가가 마님께 안 좋은 소리라도 하셨나요?”

    “음?”

    누군가가 안 좋은 소리를 했냐니. 그레이스는 눈을 똥그랗게 뜬 채 깜빡였다.

    ‘안 좋은 소리는 제국민 다수가 하고 있고…… 이혼 안 하면 공작가에서 시체로 발견되는걸…….’

    그리고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생각했다.

    샐리는 그런 그레이스의 생각도 모른 채, 계속 걱정했다.

    “최근 서재도 가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있었나 했답니다.”

    “서재?”

    그레이스는 무슨 소리지? 하다가 그제야 원래의 그레이스가 툭하면 서재에 틀어박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랬지.’

    초반에는 이 몸뚱이에 적응하느라, 그다음에는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 고심하느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애초에 본래의 나도 책만 질리도록 읽었는걸.’

    그레이스는 빙의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빙의 전에는 몸이 좋지 않아 늘 병원 신세였다.

    그런 만큼 그녀는 늘 책을 가까이했다. 뛰어놀기는커녕 밖도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렇게 움직이는 게 더 좋아서 그래.”

    “…….”

    “방에만 있으면 우울해지잖니.”

    샐리는 그레이스의 말에 더욱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 그레이스가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레이스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빙의 전의 삶이었다.

    빙의 전의 삶은 그레이스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집안에 돈이 많았지만, 모두 그녀를 등한시했으며 병에 걸려 입원하자 얼굴은 거의 내비치지 않고 책만 몇 권씩 보냈다.

    [성녀의 소원]

    그 책도 어느 날 받은 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평소에 가족들이 보내 주는 책과는 사뭇 다른 계열이었다.

    그레이스는 본디 로맨스 판타지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가족들은 그런 소설은 영양가 없는 쓰레기라 평하며 그녀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읽는 행위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어느 날 ‘성녀의 소원’을 받고 신기해하며 몇 번이고 정독했다.

    ‘아, 쓸데없는 감상.’

    그레이스는 몸을 또 부르르 떨며 모포를 꼭 잡았다.

    “많이 추우신가요?”

    “그런가 봐. 오늘은 네 말대로 서재에 가야겠다. 따뜻한 차를 서재로 가져다주겠니?”

    “네, 얼마든지요.”

    그레이스는 총총 서재 쪽으로 향했다.

    ‘혹시 일기가 서재에 있는 건 아닐까.’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빙의 전의 그레이스가 일기장을 서재에 숨겨 두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서재 쪽으로 향했다.

    ‘기억이 아예 안 나는 편이 더 편했을지도…….’

    차라리 전부 기억나지 않으면 기억상실증인 척하기 좋았을 텐데, 애매하게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라거나 그레이스의 행적이 조금씩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그레이스가 결혼식장에서 벤자민을 보고 얼마나 설렜는가-’ 같은 쓸데없는 것이.

    “이쪽인가?”

    서재의 문 앞에 도착한 그레이스는 서성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그레이스는 서재의 문을 열자 엄청난 규모에 입을 쩍 벌렸다.

    ‘미, 미친.’

    기억 속에 있는 서재도 그렇게 작지는 않았다. 분명 책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억이랑 너무 다르잖아.’

    하지만 실제 서재를 마주하자 무시무시할 정도의 규모에 당황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크기를 축소해서 기억하다니.’

    책장이 높다 못해 층계가 나뉘어 있었고, 계단이 군데군데 위치했다.

    장르별로 나눠진 책은 모두 철자 순으로 빼곡하게 꽂혀 멀리서 보아도 관리가 완벽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빙의 후 정신없어 한 번도 들르지 않았음에도 따스한 서재 안은 공기가 갑갑하기는커녕 상쾌했다.

    매일 청소를 했는지 바닥에 깔린 카펫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그레이스는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책 냄새 좋다.’

    병원에서 맡던 책 냄새는 가끔 역겹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향기롭게 느껴질 줄이야.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너무 좋다.’

    얼마나 좋았냐면, 이 별관에서는 방심만 하면 부정적인 생각과 소리에 파묻혔는데 그 어떤 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서재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는 푹신하고 넓은 소파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레이스가 항상 앉아서 책을 읽는 장소였다.

    ‘창도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네.’

    그레이스는 창가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소파의 바로 근처에 있는 창이었다.

    창을 통해 밖을 보면 본관이 보였다.

    벤자민이 머무는 본관을 보자마자 기분이 상한 그레이스는 인상을 팍 구겼다.

    ‘풍경이 좋지는 않네.’

    그레이스는 아주 짧게 감상을 남기고 아무 책이나 골라 집은 뒤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잠시 뒤, 샐리가 차를 내왔다. 작고 하얀 꽃이 찻물 위에 동동 띄워져 있었다.

    “귀여워라.”

    “최근 유행이라고 하네요.”

    “차가?”

    “네, 정확히는 디저트 가게에서요. 집에서는 이런 거 잘 못하니까요. 차를 정식으로 우리는 공정은 까다롭잖아요.”

    그레이스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샐리가 활짝 웃었다.

    “꽃을 넣은 디저트도 유행 중이라고 해요. 그것도 들여올까요?”

    “아니.”

    “…….”

    “디저트는 살찌잖니.”

    그레이스의 단호한 거절에 샐리의 표정이 어두침침해졌다. 하지만 찻잔 속 꽃을 구경하던 그레이스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 나가 보렴. 식사 시간까지 이곳에 있을 거 같아.”

    “네, 즐거운 독서 시간 보내세요.”

    어둑한 얼굴을 갈무리한 샐리는 의연하게 서재를 나섰다.

    그레이스는 샐리를 보내고 책의 목차를 살펴보다 탁, 덮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책상이 들어왔다.

    ‘일기장.’

    일기장을 찾아야 한다.

    어디에 숨겼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 몸이 기억하고 있어.’

    그레이스의 몸이 이 서재에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움직이려고 한 곳이 총 세 군데였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이 창가였고 그다음이 지금 앉아 있는 소파, 그리고 마지막이 책상이었다.

    그레이스는 바로 책상 쪽으로 향했다.

    ‘없어.’

    첫 번째 서랍에는 필기구와 종이와 책갈피가 가득했다.

    ‘없어.’

    두 번째 서랍에는 실링 왁스와 양초가 있었다. 세 번째 서랍에는 편지 봉투와 편지지, 주고받은 편지 몇 통이 있었다.

    “왜 없지?”

    그레이스는 내가 틀렸나? 하고 인상을 와락 구기며 책상 위를 탕! 하고 내리쳤다. 연이은 삽질에 답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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