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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7)화 (7/131)
  • 7화

    그레이스는 자리에 앉으며 벤자민을 조목조목 살펴보았다.

    ‘원작을 안 봤더라면, 나를 정말 좋아한다고 착각했겠어.’

    벤자민은 수줍게 웃으며 디저트와 쿠키를 전부 그레이스 쪽으로 밀었다.

    “아, 다과는 괜찮습니다.”

    “네?”

    “살을 빼는 중이라서요.”

    그레이스는 그리 말하며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지간한 고급품인지 전 삶에서 마셨던 아메리카노들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제야 유행하기 시작했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좋지?’

    커피의 향긋한 냄새에 정신 팔린 그레이스는 앞에 있는 벤자민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재단사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가라앉은 것 또한 알아채지 못했다.

    그레이스는 커피 잔은 역시 홍차 잔과 생긴 게 다르구나, 신기하네! 정도의 생각만 하며 대충 대답했다.

    “아뇨, 건강 때문에요. 너무 뚱뚱한 건 그렇잖아요? 보기도 별로고요.”

    “…….”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태연한 말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다시 다정한 온기가 깃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추천해 드렸던 그 재단사 말입니다.”

    “아.”

    그레이스는 설마 자신이 내쫓은 것 때문에 벤자민이 따지려는 건가 싶어 퍼뜩 고개를 들어 설명하려고 했다.

    벤자민은 세상에서 제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산이 몰수당해 국외로 영구 추방당했다더군요.”

    “네?”

    “저도 몰랐습니다만, 탈세도 모자라 황실의 물건까지 훔쳤다고 하네요. 이번에라도 잡혀서 정말 다행입니다.”

    “……네?”

    “그런 무례한 자는 다시는 부인의 별관에 그림자조차 닿지 않을 겁니다.”

    그레이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벙한 표정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다행이지요. 늘 부인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악인은 전부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한다고요.”

    “그, 그렇지요……?”

    “부인의 뜻대로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의 미소는 정말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벤자민이 새로 데려온 재단사는 공손하다 못해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레이스와 처음 만난 날 그녀와 눈도 함부로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안색은 시체 색이라, 이 사람은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디 신전이나 의원이라도 보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벤자민이 데려오는 재단사는 죄다 정상이 아니군.’

    그레이스는 왜일까, 생각하다가도 하긴 그 벤자민 펠튼이니까 그렇겠거니 했다.

    허구한 날 아리아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데 그레이스에게 제대로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레이스는 공작이 공작 부인을 위해 재단사를 직접 찾아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샐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레이스의 옆에 있는 유리잔을 치웠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레이스는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는 샐리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저번에 영구 추방당한 그 재단사 말이에요.”

    “응.”

    “국경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네요.”

    “응?”

    “알고 보니 뒤가 더 구린 인간이었나 봐요. 경사로운 날이네요. 마님께서 식단 조절을 하고 계시니, 소고기로 축하라도 할까요?”

    “……그, 무엇을 축하하는 건데?”

    그레이스가 떨떠름하게 묻자 샐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원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해야 하니까요.”

    그레이스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자 샐리가 아차! 하며 입을 가렸다.

    “마, 마님께서는 이런 말 싫어하셨죠. 죄송해요. 마님의 마음에 괜히 불편함을 끼친 건 아닐지…….”

    “아, 아냐.”

    “정말로 괜찮으세요?”

    “응.”

    “막 악몽을 꾸시거나, 밥 드실 때 생각나서 입맛이 떨어지거나 갑자기 심장이 철렁하신다거나 드레스만 봐도 그 인간 생각이 나는 건 아니시죠?”

    “아, 아니야.”

    그레이스는 지나치게 걱정하는 샐리를 떫게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설탕으로 만든 공예품인 줄 아나?’

    아니면 비눗방울일 수도 있겠군.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불쌍해서 그런 건가.’

    아, 그거군.

    그레이스는 생각을 마쳤다.

    ‘하긴 내가 벤자민과 결혼한 것도 나의 의지는 아니었으니까.’

    황실이 펠튼 공작가를 견제하기 위해 주선한 결혼이었다. 벤자민의 뜻이 한 톨도 들어가지 않았듯, 그레이스도 딱히 바란 결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쭉 별관에 처박혀서는 단 한 번도 부부의 의무를 하지 못한 부인이라니.

    잘난 거 하나 없고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의기소침해하지만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은 동정을 사기 쉬웠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다른 말로 그런 사람을 ‘그레이스 펠튼’이라고 가리켰다.

    물론 빙의 전 그레이스 펠튼이었다.

    지금의 그레이스는 전의 그레이스보다 착하지 않았다.

    “마님, 오늘도 나가시나요?”

    “그래. 지금은 산책이라도 해야지.”

    그레이스는 전보다는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새로운 재단사를 불러 만든 드레스는 장신구와 레이스 프릴이 현저히 적은, 움직이기에 최적화된 옷이었다.

    ‘지금은 몸이 무거워서 운동은 못해.’

    괜히 운동했다가 몸에 부하가 와서 망가지는 건 사양이었다. 한번 관절이 나가면 그 뒤로는 다치기 쉽다는 사실을 그레이스는 알고 있었다.

    하여, 그레이스는 간단한 차림에 편한 신발을 신었다. 새로 온 재단사에게 구두 제작도 추천받았는데 왜 이런 간편한 신발을 주문하는지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귀부인이 이런 걸 주문하면 물어볼 듯도 한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론 그레이스는 그게 편해서 딱히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지금 그레이스에게 생긴 의문은 딱 한 가지.

    “부인, 오늘도 만났군요. 우연이네요.”

    ‘왜 그레이스가 산책할 때마다 벤자민이 나와 있는가?’ 였다.

    “아, 각하께서도 산책하러 나오셨나요?”

    “네, 요즘 날이 좋으니까요.”

    그레이스는 원래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곤 했다.

    첫날에는 벤자민이 없었다. 하지만 산책을 시작한 둘째 날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매일 만나길래 조금 찝찝해진 그레이스는 시간을 바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자민을 만났다.

    벤자민은 늘 화사하게 웃으며 우연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우연이라고 우기기도 하고, 제국에 있는 고귀하고 대단하시며 바쁜 공작의 시간이 그렇게 썩어 넘치지도 않을 거라 판단한 그레이스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왜 그가 나와 산책하겠는가?’가 그레이스의 주된 생각이었다.

    “이번에 정원에 새로운 묘목을 심어 볼까 합니다. 부인께서는 복숭아를 좋아하셨지요. 복숭아나무는 어떻습니까?”

    “아…….”

    “아, 혹시 이제 복숭아는 별로십니까?”

    “아뇨. 주면 먹어요.”

    주면 먹는다.

    그 표현에 벤자민은 대놓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복숭아 타르트는 좋겠네요.”

    벤자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살을 빼야 하니 못 먹겠지만요.”

    벤자민의 표정이 또 어두워졌다.

    “그럼 좋아하는 꽃은 없습니까?”

    “꽃, 꽃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종류는 잘 몰라서요. 이름을 모르니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딱히 몰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레이스는 정원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이혼하고 지방 어디 한적한 데 내려가서 꽃집을 운영하다가, 이름을 숨긴 누군가와 얽히는 소설 프롤로그 같은 짓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 문제는 고려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혼 후의 인생 플랜을 세우던 그레이스는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벤자민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구경하는 사용인들만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레이스와 벤자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둘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

    “아.”

    “무슨 일이신가요?”

    “이거 봐, 샐리. 이 블라우스 예전부터 있던 건데 조금 헐렁해지지 않았니?”

    그레이스는 자신이 입은 블라우스를 가리키며 웃었다.

    확실히 전보다 헐렁해져 있었다.

    “살이 빠지긴 했나 봐. 역시 식단 조절만 해도 빠진다니까?”

    물론 그레이스의 몸에는 살이 많았기에 식이조절만 해도 살이 잘 빠지지만, 어느 정도 빼고 나면 산책보다 더 강도 높은 운동을 해야 했다.

    이제까지 중 가장 밝은 미소를 짓는 그레이스를 보며 샐리가 훈훈하게 웃었다.

    ‘한 7~8키로? 그 정도 빼고 나면 이혼하자고 해야지.’

    그레이스의 속마음을 몰랐기에 웃을 수 있었다.

    “오늘도 산책 가시나요?”

    “한번 거르면 계속 거르고 싶어지니까.”

    원래 매일 하는 게 어려운 거였다. 한번 쉬고 싶은데 쉴까? 하고 쉬면 이틀, 사흘…… 나흘로 늘어나고 쭉 쉬게 된다.

    ‘그러면 이혼을 제안하는 게 미뤄지니까.’

    응, 그건 안 되지.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얼마나 아리아와 합법적으로 썸을 타고 싶겠는가.

    물론 한때는 벤자민이 정말로 취향이었지만, 그가 아리아의 호감을 위해 부인을 이용했다는 걸 안 순간 모든 호감이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까지 뚫어 버렸다.

    ‘그리고 그 부인이 나지.’

    그 부인은 정체불명의 병으로 죽고.

    ‘젠장.’

    오늘도 그레이스는 빨리 이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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