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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5)화 (5/131)
  • 5화

    ‘이걸 보고 탄수화물 중독이라고 하던가.’

    그래도 풀을 먹으니 꼬르륵 소리가 덜 나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레이스는 허한 속에 냉수를 들이부으며 달랬다.

    “재단사가 오늘 온다고 했던가?”

    “네, 점심이 되기 전에 올 예정입니다.”

    그레이스는 샐러드를 싹 비우고 아쉬운 눈으로 그릇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응해야지. 원래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양이 느는 거니까.’

    “그럼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지.”

    “다과를 준비할까요?”

    “…….”

    집사의 질문에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손님이니 차 한잔은 내줘야 하는데, 굳이 쿠키까지 내줘야 할지를.

    근 며칠간 초식동물처럼 풀떼기만 퍼먹다 보니, 그레이스는 다소 생각이 팍팍해져 있었다.

    물론 채식 요리도 맛은 있었다. 비록 그레이스의 요리를 전담하는 요리사는 별관 소속일지라도 이곳은 그 펠튼 공작가였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다 해도 그건 풀이었다.

    ‘최근 탄수화물은 거의 건들지도 않았지.’

    그레이스는 소금, 설탕, 밀가루…… 총칭 ‘행복의 가루’를 최소한으로 섭취했다. 그리고 그 탓에 그레이스는 덜 행복해졌다.

    ‘아냐, 그래도 그 덕에 살이 조금 빠진 거 같아.’

    원래 뚱뚱할수록 다이어트 효과가 빨리 나타났다.

    정확히는 부은 게 빠졌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붓기도 시간이 지나면 살로 변하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레이스는 제 턱살을 매만졌다. 전에 비해 잡히는 살이 적어졌다.

    ‘보통은 얼굴 살부터 빠지지?’

    물론 이것도 기분 탓일 수 있었다. 그레이스가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툭툭 만지고 있으니 하녀인 샐리가 말했다.

    “요즘 마님의 얼굴빛이 좋아요.”

    샐리의 말에 그레이스가 화색을 띠며 답했다.

    “그래? 물을 많이 마시고 있는데 효과를 보고 있나 봐.”

    “물을 마시면 피부가 많이 좋아지나요?”

    “사람들이 그러던데. 피곤하면 물 마시고, 피부가 까슬하면 물 마시고, 뭐만 하면 물 마시라고.”

    “네? 어떤 사람들이요?”

    “글쎄, 나도 건너건너 들은 거라.”

    ‘건너건너 들을 인맥이 없긴 한데.’

    게다가 이렇게 며칠이란 짧은 시간 만에 효과를 볼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레이스는 이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과는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

    “응. 그래도 수고가 많은데 대접은 해 주는 게 좋겠지.”

    사실 돈 주고 고용하는 쪽이 그레이스였으니 굳이 차를 내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예의와 도리라는 게 있다. 반면 그레이스에게는 뻔뻔함이란 게 없었다.

    ‘어차피 나도 차는 마실 텐데 저쪽에게 아무것도 안 내주면 미안하잖아.’

    그리고 공작가에서 과자 하나 내주지 않는다면 또 밖에 무슨 말이 돌지 모른다. 그레이스는 공작가의 내정을 관리하지 않는 게으르고 무능한 안주인이었지만, 손님 대접까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재단사라고.’

    드레스를 만드는 사람. 그들은 수많은 귀부인과 아가씨를 상대할 것이다.

    펠튼 공작가에서 그저 그런 재단사를 부를 리가 없었다. 펠튼 공작가를 제외하고도 쟁쟁한 가문에서도 애용하는 이일 텐데, 다과 없이 차만 달랑 내온다면 좋지 않은 소문이 추가로 붙을 게 뻔했다.

    ‘뚱뚱하고 못생기고 게으르고 무능한 데다가 손님 대접도 못 하는 여자.’

    그레이스는 어째 ‘그레이스 펠튼’에게 붙는 수식어 중 좋은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는 실제로 그러했다.

    ‘아니 딱히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는데, 게으르지도 않고.’

    무능한 건 모르겠지만, 손님 대접도 손님이 찾아오지를 않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그레이스는 이쯤 되면 이 모든 소문을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퍼트린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아니겠지만.’

    그레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족함이 없게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나는 안 먹을 거니까, 알아 두고.”

    “네.”

    그레이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윽.’

    꽤 크게 난 터라 주변에서 혹 들었을까 싶어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그녀는 재단사가 오기 전에 물이라도 잔뜩 마시기로 했다.

    ⋆★⋆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어서 오게.”

    별관 응접실에 도착한 재단사가 그레이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레이스는 그가 자신을 향해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에 속으로 감사했다.

    ‘당연한 건가?’

    하지만 보통 클리셰지 않나. 지위와 상관없이 오자마자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 그레이스는 하도 소문이 좋지 않기에 당연히 바로 무시당할 줄 알았다.

    그녀의 긴장 어린 걱정을 모르는 듯, 접객실로 이동한 뒤 재단사는 두툼한 책자를 건넸다.

    “공작 부인께서 새 옷을 맞추신다고 하여, 카탈로그를 가져왔습니다.”

    롱 소파에 앉은 그레이스는 재단사가 건넨 카탈로그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드레스는 봐도 무엇이 유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의 그레이스는 별관에만 박혀 살았고, 현재의 그레이스는 이곳에 툭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 이거 예쁘다.’

    그런데 그중에서 짙은 청록색에 금사로 장식된 드레스가 그레이스의 눈을 사로잡았다.

    정말이지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였다.

    온갖 옷감 조각을 꺼내어 정리하던 재단사는 그레이스의 시선이 한 페이지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드레스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름답다고 생각하, 네.”

    그레이스는 다소 어색한 말투를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 당장 입을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그레이스가 몇 마디의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재단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충언을 올리자면, 공작 부인께 그 드레스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

    “코디튼 백작 부인께서도 그 드레스와 같은 디자인을 맞추셨습니다. 부인께서 같은 드레스를 맞추시면 괜히 비웃음 살까 두렵습니다.”

    페이지의 끝을 매만지던 그레이스의 손가락이 멈췄다.

    “……뭐?”

    그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기억이 새어 들어왔다.

    “공작 부인, 그 장신구는 부인께 너무 화려합니다. 보석의 빛에 파묻힐 겁니다.”

    “이 드레스를 공작 부인께 추천해 드립니다. 지고하신 귀부인의 몸에 주근깨가 있는 것은 큰 흉이니까요.”

    “아, 그 다이아 목걸이. 황녀 전하께서도 구매하셨다고 하더군요. 모두가 그분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극찬하였습니다. 역시 공작 부인께서는 보시는 눈이 뛰어나시군요. 공작 부인께서도 그 목걸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 외에도 재단사는 은밀한 어조로 끔찍하게 혀를 놀렸다.

    ‘미친놈 아냐?’

    원래의 그레이스는 답답할 만큼 소심하고 타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공작이 데려온 재단사가 아무리 자신을 폄하하고 깎아내려도 그에게 말 한번 못하고 혼자 앓았다.

    재단사는 다른 고용인이 없는 곳에서만 다정한 어투로 그레이스를 은근하게 깎아내렸다.

    그러면 그레이스는 그게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미친놈.’

    그레이스의 청록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래, 재단사에게 있어 그레이스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공작가의 안주인이라 드레스의 값이 밀릴 일이 없을 테고, 비싼 천을 얼마든지 쓸 수 있을 테며 상대가 그 ‘그레이스’다.

    얼마든지 비하해도 찍소리 못하는 귀족. 그 높고 지고한 펠튼 공작가의 안주인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분이 드니, 좋았을 테지.

    하지만 그건 예전의 그레이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 몸에 남아 있는 감정 탓에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아니, 사실 무엇보다 건강을 위해 밀가루와 설탕을 최대한 줄였다.

    다이어트를 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걱정 어린 시선도 버거운데, 이런 시비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녀의 인내심은 아침 점심을 건너뛴 사자와도 비슷했다.

    이제 재단사가 그녀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레이스는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생의 자신이 인터넷으로만 봐 왔던 말도 안 되는 진상들을! ……하지만, 금방 진정했다.

    ‘안 돼. 그렇게 미쳐 날뛰었다가는 이혼 절차를 밟을 때 내가 불리해질 거야. 내 잘못이 얹어지는 거잖아.’

    그레이스가 살고 있는 제국은 남존여비 사상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레이스는 좋은 말이라고는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공작 부인이었고, 상대는 좋은 말만 듣고 동정 여론까지 붙어 있는 벤자민 펠튼이다. 그 동정의 원인은 그레이스, 본인이었다.

    가뜩이나 불리한 입장이었다. 물론 벤자민이야 ‘우리 이혼해요.’라고 말하면 바로 좋다고 돈을 얹어 줄 것이다.

    앞으로 그에게 절대로 접근하지 않겠다고 신전의 이름 아래 계약까지 한다면 돈을 더 얹어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돈을 최대한 깎이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재단사를 앞에 두고 아주 짧은 찰나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저 재단사를 어떻게 굴려서 내쫓을까? 기왕 한다면 밥줄도 끊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원래의 그레이스라면 그녀가 독한 마음을 먹어도 밥줄을 끊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의 그녀라면, 해도 공작가와의 거래만 끊기로 하겠지. 그것도 엄청난 각오였을 거야.’

    물론 펠튼 공작가의 자본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손실이었다.

    하지만 고객이 그레이스인 이상 큰 타격은 없었다. 그레이스는 살롱, 티 파티 그리고 연회 등 눈에 띄는 사교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닿지 않는 선망의 대상도 아니었다.

    운 좋게 펠튼 공작가에 들어온 별 볼 일 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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