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4)화 (4/131)

4화

“일기장. 일기장이 분명 있어, 있을 텐데.”

‘빙의하자마자 이 세상이 소설 속이란 걸 알았으면 좀 좋아?’

그레이스는 가장 고전적인 위치인 침대 아래를 샅샅이 뒤지며 그리 생각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냐, 바로 이 세계가 ‘성녀의 소원’ 속이라는 걸 알았으면 절망했을 거야. 나는 그레이스 펠튼이고…….”

침대 아래는 허탕이었다.

그레이스는 차례차례 벽장이나 서랍 등을 뒤적였다.

‘그레이스는 직접적인 등장은 없으면서 욕만 지지리 먹다가 갑자기 의문의 병으로 죽어 버리는 인물이잖아.’

게다가 그게 진짜 병인지 아닌지도 아무도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현재 당사자인 자기 자신만이 신경 쓸 뿐이었다.

이런 처지를 바로 깨달았으면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실이라는 걸 알고, 그레이스라는 걸 깨닫고 나니까 받아들인다는 선택지밖에 없었을 뿐이다.

“찾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레이스는 보석함 아래에 숨어 있는 칸을 발견했다.

“여긴가?”

그래, 이 장소도 꽤 고전적인 위치지. 그레이스가 중얼거리며 숨겨진 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칸에는 반지 하나만 덜렁 들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 반지를 집어 들었다.

‘나오라는 일기장은 안 나오고…….’

반지는 어둠 속에서도 약간 반짝였으나, 그뿐이었다. 공작가의 위상에는 걸맞지 않은 촌스러운 모양새라 오히려 보석함에 쓰인 좁쌀만 한 장식보다도 값어치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가운데 박힌 보석은 진짜가 아니라 붉은 유리알이었다. 그레이스는 그 반지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처박아 넣었다.

‘기분 나빠.’

그 반지를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리며 메스꺼웠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에 그레이스는 제 가슴께를 퍽퍽 내리쳤다.

“일기장…….”

빙의 첫날에는 어떤 기억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뜨문뜨문 그레이스의 기억이 떠올랐으나, 그뿐이었다.

‘더 이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그레이스가 이 세상이 소설 속이라는 걸 알아챈 게 용할 정도였다. 아마도 뜨문뜨문 떠오른 그레이스의 기억 덕이었을 테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그레이스의 초조한 생각이 전부 끊겨 나갔다.

“마님, 샐리입니다.”

“…….”

그레이스는 샐리가 누구였나 잠시 고민했다. 기억 속을 더듬으며, 유독 그녀에게 살가운 금발 하녀가 샐리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 들어와도 괜찮아.”

그레이스가 대답하자 샐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은쟁반에 주전자와 컵, 그리고 작은 봉투 하나를 올려 둔 채였다.

그레이스는 샐리가 가져온 것을 보고 물었다.

“그건?”

“약이에요.”

“약?”

그레이스가 의아한 듯 되묻자 샐리가 오히려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약을 먹었, 아니 그래. 먹었지. 미안, 내가 최근 조금 오락가락해.”

그레이스의 대답에 샐리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레이스는 괜히 찔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한동안 약을 먹지 않은 거 같아서, 잊고 있었네.”

샐리는 그레이스의 애매모호한 대답을 가만 듣고, 은쟁반을 작은 협탁에 올려 두었다.

“…….”

그레이스의 시선은 샐리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하나, 둘, 셋…….’

총 4알의 알약. 그레이스는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이 약에 관한 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약에 관한 내용도 일기장에 있으려나.’

“이 약은…….”

“최근 마님께서 약을 드시지 않으신 걸 주인님께서 아시고 걱정하셔서요. 저에게 꼭 챙겨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각하께서?”

그레이스는 조금 전까지는 별생각 없다가, 벤자민의 이름이 나오자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부탁, 이라고?’

공작이 하녀에게 명이 아니라 부탁이라니. 그레이스는 이질적인 표현에 몰래 눈썹을 찡그렸다.

그레이스가 한동안 약을 먹지 않았다는 걸 벤자민이 알고 있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약 봉투에 고정되었다.

“내가 요즘 조금 정신없어서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이 약을 먹게 되었더라?”

“…….”

그레이스의 질문에 샐리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주인님께서 마님의 건강을 위해 받아 오셨어요.”

“내 건강?”

“네.”

샐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 외의 것은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까 무슨 약인지도 모르는 건가?’

무슨 약인지도 모르는데 줬다고? 그레이스는 영 미심쩍었지만, 그런 심경은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

“각하께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전해 줄 수 있을까?”

“네, 알겠어요.”

“그리고 물을 더 마시고 싶으니까, 주전자는 두고 가고.”

샐리는 그레이스의 말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샐리가 나가자마자 그레이스는 문에 바짝 붙어 떠나는 소리를 확인한 뒤, 약을 다시 곱게 포장해 침대 옆 협탁 서랍에 쑤셔 넣었다.

“나를 위해 받아 온 약?”

그레이스는 그 말을 정정했다.

‘나를 죽이기 위해 받아 온 약일지 누가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레이스만큼은 벤자민을 바로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슨 행보를 걸을지 알고 있으며, 그레이스가 ‘뜬금없이 정체불명의 병’으로 사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나는 그동안 이 저택 밖을 나가지 않았어.’

그리고 원작의 그레이스라면 앞으로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이 공작가에 있는 한, 언제까지고 벤자민의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애초부터 죽이려고 한 건가, 설마?’

그레이스는 소설 속 주변 인물의 입을 통해 강조되던 둘의 결혼 배경을 떠올렸다.

이 결혼은 당초부터 황실에 의해 강제된 결혼이었다.

다정하고 공평한 공작으로, 강대한 권력과 부를 가졌음에도 약소 귀족과 평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벤자민은 고작 그레이스가 추하다고 이혼할 순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레이스를 별관에 처박아 두고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이혼해 달라고 간곡히 청하기를 기다리거나 그전에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잔에 담긴 물을 벽난로 쪽에 흩뿌렸다.

치이이익- 하고 적은 양의 물이 벽난로의 불씨 하나 제대로 끄지 못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는 불길이 다시 피어오르는 걸 구경하다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음으로 급한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기장은 앞으로 천천히 찾아보자. 어차피 지금 당장 이혼할 것도 아니고. 별관이라고 해도 규모가 크고 방도 많으니, 찾아볼 곳이 많아.’

“일단 부엌부터 가야 해…….”

별관에서 하는 식사는 전부 완벽했다.

그러니까, 맛이 너무 완벽했다. 즉, 살을 빼기에는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별관 사람들은 그레이스가 조금만 우울해 보이면 맛있는 걸 가져다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다 맛있긴 했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일 만큼 맛있었다.

자칫하면 과식할 정도로.

오늘 저녁부터 메뉴를 가볍게 바꿔 달라고 해야지, 식사량을 확 줄여 달라고 해야겠어.

그레이스는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이 모든 소식이 벤자민에게 닿을 거란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리고…….

“이게 다 뭐야?”

“주인어른께서 마님께 보내신 선물이라네요!”

그레이스의 다이어트 소식을 들은 벤자민은 바로 다음 날 온갖 진귀한 음식을 보냈다.

“어떡할까요, 마님!”

“세상에 무지개 새의 알이라니, 이게 얼마짜리야!”

“포트슨사의 마카롱! 이건 황실에 납품하는 마카롱이 아닌가요?”

그레이스는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전부 돌려보내.”

“네?”

“전부. 아니면 너희끼리 나눠 먹어.”

“마, 마님. 하지만 각하께서…….”

“각하께는 마음만 받겠다고 해 줘.”

사실 마음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 인간이 아무 이유 없이 먹을 걸 보낼 리가 없잖아.’

온갖 기름지고 달콤한 것투성이라니.

누가 봐도 살찌기 좋은 것뿐이었다.

⋆★⋆

그레이스는 그레이스 나름대로 변화를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소문이 난 지는 오래였다.

그러니까 다이어트를 결심하기 전부터, 그녀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온 저택에 퍼져 있었다.

예를 들면 그녀의 말투가 가끔 오락가락한다거나, 말을 뒤바꾼다거나, 취향이 조금 바뀌었다거나 등 소문을 이루고 있는 주된 감정은 ‘걱정’이었다.

그 후로 별관은 더더욱 외부인이 들어오지 않게 온 힘을 쏟았다.

오죽하면 쥐는커녕 벌레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외부인에는 벤자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벤자민이 별관에 들어가지 못한 지는 한참 되었으니, 그는 따지자면 벌레만도 못할지도 모른다.

벤자민은 심히 무표정한 얼굴로 별관을 바라보며 옆에 서 있는 보좌관, 아벨 번턴에게 말했다.

“내가 보낸 것을 전부 거절하고, 고용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네, 마음만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 마음이라…….”

벤자민은 그 말을 되뇌다가 몸을 돌려 반대로 향했다.

“부인께서는 친절하기도 하시지.”

⋆★⋆

‘부족하네.’

그레이스는 드레싱을 거의 얹지 않은 샐러드를 포크로 푹푹 찍어 먹었다.

맛은 있었다.

고작 풀로만 만든 요리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그레이스는 전생까지 포함해 오늘 처음 알았다. 전생의 그녀는 샐러드는 드레싱 맛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족했다. 배가 부르기는 했지만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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