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화 (2/131)

2화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상기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레이스가 몸을 떨자 벤자민이 걱정스레 물었다.

“부인,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아무 문제도 없어요.”

“역시 추운 것 아닙니까? 들어가시겠습니까? 오랜만의 외출이시니 몸이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아뇨, 정말로 괜찮아요.”

아까 그레이스가 상기했듯, 그레이스는 완결 날 때까지 직접적 등장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도 엑스트라라고 할 수 있나? 그냥 설정일 뿐이지.’

그래서 어떻게 죽는지도 묘사되지 않았고, 그저 공작가의 장례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벤자민의 언급이 다였다. 벤자민이 공작 부인의 죽음에 관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죽은 후,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에 녹안은 신뢰의 다정남이라고들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의 뒤통수를 치고 싶었는지 그는 최종 흑막으로서 여주와 남주와 대치하게 된다.

‘여주인공을 납치 시도하고, 나중에는 죽이려고까지 하니까.’

집착에 집착, 또 집착의 끝을 달리던 그는 최후에는 여주인공의 품에서 사망했다.

그런 인물이니 여주를 차지하려고 자기 아내를 병으로 위장해 죽이는 것도 가능하겠지. 소설 내에서 확실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벤자민을 가장 애정했었던 그레이스로서는 그리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내 최애였는데.’

그레이스는 소설을 읽을 때, 벤자민은 절대 서브남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벤자민은 여주인공, 아리아한테도 툭하면 제 아내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그레이스는 그 가정적인 면모와 다정함에 벤자민을 좋아했던 거지, 여주에게 질척거리며 집착과 광기에 빠지는 벤자민을 좋아한 게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죽기 전, 아리아에게 한 고백을 떠올렸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당신과 행복하게…….”

그레이스는 그를 향해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래, 이런 아내를 정말 사랑할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레이스의 심장은 불편하게 뛰었다.

원래의 그레이스가 가진 벤자민을 향한 마음이었다.

그레이스와 벤자민은 부부였음에도 따로 살았다.

방을 따로 쓴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로 거주하는 건물 자체가 달랐다. 벤자민은 본관에서 살았으며, 그레이스는 별관에서 지냈다.

‘기억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네…….’

애매하게 남아 있는 원래 그레이스의 기억은 그녀를 감질나게 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필수적인 것들은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벤자민은 절대 별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정보가 있었다.

‘힘들다.’

짧은 산책을 끝내고 별관으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사실 산책을 더 오래하고 싶었지만, 벤자민이 금붕어 똥처럼 그레이스를 쫓아다녔기에 오래 거닐 수 없었다.

‘그냥 혼자 걷고 싶으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할걸 그랬나?’

하지만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벤자민이 취향이라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저리 가라고 했다가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기분을 상하게 해 ‘병으로 사망’하는 기간이 앞당겨지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아니, 물론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죽인 범인인 게 확실하진 않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망에 대해 생각하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님, 벽난로의 불이라도 피울까요?”

“많이 추우시면 잠시나마 마도구를 켤게요.”

“아, 아냐. 괜찮아.”

그레이스는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하녀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품위 없이 마음대로 소파에 누워 있어도 하녀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까지 구박데기는 아닌가?’

그레이스는 무려 ‘본관이 아니라 별관에 콕 박혀 지내는 안주인’과 ‘안살림을 하지 않는 안주인’이라는 두 가지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벤자민을 그리 자주 보지도 않으면서 그를 몰래 연모했으며, 별관 밖으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도 않았다.

‘부부의 의무를 해야 하는 날이 되면 벤자민은 늘 저택을 비웠지.’

그레이스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별다른 추측이나 그레이스의 기억을 더듬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성녀의 소원’을 수없이 많이 읽었다.

주변 인물들은 벤자민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합리적인 결혼을 한 건지 쑥덕거리곤 했다.

원작의 주인공들인 아리아나 실베스터의 귀에도 공작 부인에 관한 추문이 많이 들어갔을 정도였다.

‘정작 그레이스는 한 번도 직접 등장한 적 없는데도.’

밤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고, 많은 이들이 뒤에서 쑥덕거렸다.

“얼마나 추하게 생겼길래 만지는 것도 끔찍해할까요?

“…….”

그레이스는 자신이 진짜 그레이스가 아님을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미어졌다.

‘그래도 늘 그 사람이 저택을 비우는 쪽이라 다행이야.’

그레이스의 기억에 따르면 벤자민은 늘 그날이 다가올 때쯤이 되면 이런저런 일을 핑계로 저택을 비웠다.

어떤 일을 핑계로 저택을 비우는 것은 늘 벤자민이었기에, 그레이스를 향한 비난의 시선은 적었다.

……그러니까, 외적인 원인을 제외한 비난의 시선은 적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이어 하고 있으니, 그레이스는 어쩐지 제 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레이스는 팔을 들어 킁킁 제 몸의 냄새를 맡았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꽃이 만개한 정원을 거닐었기에 몸에서는 당연히 향긋한 향만이 물씬 풍겼다.

‘역시 기분 탓이야.’

그레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다.”

자신의 몸에 대해 폄하하던 와중에도 배는 고팠다.

그레이스가 배고프다고 하자 하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식당에 식사를 준비할까요?”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방에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방에서 먹어도 돼?”

그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럽게 묻자, 하녀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퇴창 쪽으로 향했다.

“……그러면 저쪽에서 먹을 수 있을까?”

“마님께서 원하시는 건 얼마든지요.”

하녀들이 밖으로 나가고 그레이스는 멍하니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퇴창 쪽으로 가 앉았다.

그레이스는 창틀 그림자가 진 자신의 통통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통통이 아니라 퉁퉁인가.”

통통이든 퉁퉁이든 다른 사람이 보기엔 뚱뚱이겠지. 그레이스는 또 우울해지려다가 정신 차리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예를 들면, 지금 이 몸은 빙의 전의 삶보다 훨씬 낫다는 점.

“…….”

그레이스는 내려다보던 손을 꽉 쥐었다.

약품의 냄새, 기계 소리와 복도에서 사람이 오가는 소리, 그리고…….

“아.”

그레이스는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우울한 생각으로 빠져 버렸다.

‘원래의 나는 그대로 죽었을까?’

원래 삶의 그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기는 했다.

그때, 어디선가 타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의 몸이 빳빳하게 굳으며 고개를 급히 들었다.

“잘못 들었나?”

방 안에는 여전히 그레이스뿐이었다.

그럼에도 심장은 불안할 만큼 세차게 뛰었다.

‘아냐, 분명 들었는데…….’

어디선가 숨소리가, 그리고 뒤따르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찢어질 듯이 그녀를 비웃는 역겨운 웃음소리였다.

그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그레이스의 생각이 뚝 끊겼다.

그레이스는 숨을 헉 들이마시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레이스의 대답은 아주 작았으나, 그걸 놓치지 않고 들은 하녀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수프와 빵이 담긴 바구니가 쟁반에 올려져 있었다.

“빈속이니 너무 무겁지 않은 거로 준비했어요.”

“고마워.”

그레이스에 빙의하고 나서 며칠간 그녀는 방 밖도 나서지 않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 그레이스를 배려하기 위해 하녀는 부러 가벼운 음식을 내왔다.

‘이런 몸으로 용케 잘도 움직였구나, 나…….’

하녀의 배려를 눈치챈 그레이스는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여기다가 놓으면 될까요?”

“응.”

하녀는 그레이스의 빈 옆자리에 식기가 담긴 쟁반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레이스는 빵을 하나 집어 들어 죽 찢었다. 갓 구웠는지 향기로운 버터 내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맛있다.’

씹을수록 달콤하고 농후한 맛이 입 안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레이스는 방금 한 모든 생각을 씹어 소화하려는 듯 빵을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남은 반쪽을 수프에 찍어 입에 넣을 때쯤, 밖에 마차가 준비되는 게 보였다.

‘저건?’

그리고 아까 전의 복장보다 더 정갈한 차림을 한 벤자민이 본관 정문에서 급하게 나오더니, 마차에 탑승했다.

그레이스는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벤자민이 탄 마차를 빤히 바라보았다.

“…….”

마차가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각하께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

“아.”

그레이스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하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니?”

“그, 그것이…….”

“알고 있구나.”

그레이스는 하녀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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