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화 (1/131)

1화

여자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죽고 싶다.’였으며, 그다음 뒤따른 것은 이상하리만치 낯익은 자기혐오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여자는 퇴창에 늘어져 앉아,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원래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비쳐 보였다.

살이 쪄 퉁퉁한 얼굴에는 주근깨가 피어 있었으며 곱슬거리는 당근색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청록색의 눈동자는 어둡고 탁해 이 몸의 주인이 그간 얼마나 생기 없는 삶을 이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 몸을 웅크리고 다녔는지, 자동으로 굽는 어깨를 다시금 쭉 편 여자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니까 여기가 그, 소설 속이란 말이지.’

몇 주 동안 지내며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없고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세계는 그녀가 죽기 전에 읽은 ‘성녀의 소원’이라는 소설 속이었다.

‘……나는 빙의를 한 건가?’

‘성녀의 소원’은 지극히 평범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빼면 아무런 특징도 없던 여주인공, 아리아는 어느 날 자신이 성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녀로서 인정받은 아리아가 제도로 올라와 활동하며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된다.

‘여기까지는 평범하지.’

아리아와 주로 엮이고 이어지는 인물은 제국의 황태자, 실베스터였다. 황태자였음에도 입지가 애매모호했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저주받은 걸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저주는 아리아와의 접촉을 통해 조금씩 풀어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도…… 평범한가?’

특이한 설정이 있다면 서브 남주, 벤자민 펠튼이었다.

벤자민은 북부 공작이었는데, 북부 공작이었음에도 메인 남주가 흑발이라서 그런지 갈색 머리에 다정남이라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녹색 눈이었다.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은 다정남의 보증수표라고들 하지만, 북부 공작이 강아지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영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특이한 설정이 있다면, 그는 유부남이었다.

‘아니 왜 여주랑 썸을 타는 남자한테 유부남 속성을 주는 건데.’

여자는 생각했다. 작가가 글을 쓰기 전에 불륜 드라마 한 편을 장난 아니게 흥미롭게 봤나 보다 하고.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원치 않는 결혼이라고 주변 인물들이 계속 말하기는 했다. 여자는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이 몸에 들어와 버렸고, 점점 이 몸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이 몸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왜 내가 하필 이 몸에 빙의한 건가 한탄해 봐도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비록 그녀가 엎지른 물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여자가 퇴창에 웅크린 채 한숨을 푸욱 내쉬자 구석에 서 있던 하녀들이 당황하며 하나둘 입을 열었다.

“마님, 마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내올까요?”

“마님께서 좋아하시는 찻잎도 한가득 들여왔어요.”

“마, 맞아요! 새 티 세트도 도착했답니다. 이번 한정판이요!”

그녀가 이 몸에 빙의한 후로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기에, 모두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나마 지금 상태가 나아진 거라면 나아진 것이다.

당연했다. 난생처음 보는 세계에,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아.”

“마니이임…….”

하녀들이 여자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창문에 흐릿하게 비친 제 잔상을 바라보았다.

툭, 이마를 창문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바람이나 쐴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은 하녀들은 저들이 모시는 주인의 마음이 바뀔까 펄쩍 뛰었다.

“좋은 생각이세요!”

“옷을 준비해 올게요!”

“마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옷을 입고 산책하러 나가면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아니, 그전에 목욕부터 해야죠!”

다들 바삐 움직이며 여자가 발언을 철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왜 다들 내 눈치를 보는 거지?’

여자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몸은 움직이기 불편했다.

근처에 있는 거울에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

빙의 전의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그저 두 다리로 서 있을 수만 있어도 만족할 수 있었다.

‘거기에 건강하기까지 하면 더 좋고.’

그런데 이 몸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자기 자신을 향한 깊은 혐오였다.

여자가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녀 한 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거울을 치울까요?”

“괜찮아.”

거울을 잠시 본 것뿐인데 왜 저리 안절부절못하는지.

사실 여자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이 몸에 들어오면서 몸 주인의 기억을 뜨문뜨문 물려받았다. 이 여자는 제 모습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자기혐오가 피어오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 거야.’

얼마나 끔찍했는지. 나는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니라 타인이라고 몇 번을 상기시키고 나서야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끔찍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계속 실내에 틀어박혀 지내느라 근육이 많이 사라지고 살이 쪄서 그렇지, 평범하다면 평범하게 생긴 외관이었지만 원래의 몸 주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마님, 목욕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오늘은 저희가 시중을 들어도 될까요?”

“…….”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홀로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목욕 시중은 어색했다. 다행스럽게도 빙의 전의 여자도 목욕 시중을 싫어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여자가 중얼거렸다.

“몸을 보여 주는 게 싫은 거였겠지만.”

아무튼, 오래간만의 목욕은 여자의 기분을 누그러트렸다. 이제까지의 비관적이었던 생각들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

옷장 속에 있는 옷은 거의 다 어두운색이었다.

‘다 거기서 거기인 거 같은데.’

그녀가 보기에 디자인은 다 거기서 거기였는데, 하녀들은 열심히도 옷을 골라 댔다.

오랜만의 산책이니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레이스나 리본이 거의 달리지 않은 감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슴없이 밖으로 나서자 모두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원래도 바깥출입이 거의 없었고, 내가 들어온 후로는 방 밖으로는 한 발짝도 안 나갔으니까.’

그래도 여자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니,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는 말이 맞았다.

여자는 ‘평소처럼’ 인적이 드문 뒤뜰 정원이 아니라 정문 쪽의 화려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을 관리하던 정원사가 깜짝 놀라 숨는 게 보였다.

방의 창을 통해서만 보던 정원을 가까이서 보니 더욱 생기 넘치고 화려해 보였다.

“가까이서 보면 이런 모습이구나…….”

“마님의 방 창문을 통해서도 잘 보이도록 하라고 주인어른께서 명하셨어요!”

그녀의 뒤를 쫓은 하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각하께서?”

“네!”

마치 자신을 칭찬해 주길 바라는 강아지와 비슷했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던 그 하녀는 얼마나 정원을 신경 써 꾸몄는지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하지만 여자는 저 말이 웃기기만 했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이 몸의 처지를 얼마나 잘 아는데.

저 앙증맞은 하녀가 무슨 말을 하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중, 다른 이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부인.”

사아아아- 바람이 불며 풀잎이 흩날렸다.

“…….”

여자는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바라보았다.

“부인께서 어쩐 일로 여기까지 모습을 드러내셨습니까.”

“제가 오면 안 되는 거였을까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닙니다.”

깜빡.

청록색의 눈동자에 남자의 모습이 담겼다.

그 어떤 색보다 따뜻한 갈색의 머리칼, 녹음과도 같은 녹색의 눈.

아름다운 외관의 남자는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면요?”

“걱정했습니다.”

여자는 ‘걱정했다’라는 말에 속으로 비웃었다.

‘개뿔.’

여자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은 벤자민 펠튼.

‘성녀의 소원’이라는 소설 속의 서브 남주였다.

그리고 그녀가 빙의한 몸은 ‘그레이스 펠튼’으로,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서브 남주의 아내였다.

⋆★⋆

그레이스 펠튼, 결혼 전의 이름은 그레이스 린덴.

더는 펠튼 공작가의 힘을 키울 수 없던 황실이 억지로 이어 준 가문의 여식이었다.

귀족으로서의 역사는 깊었지만 현재는 소작농과 다를 바 없는 한미한 자작가의 딸로, 원래라면 공작가와는 연이 닿을 리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벤자민과 딱 세 번 만난 다음 결혼식을 치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더는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냥 그런 거면 상관없지.’

그레이스는 자신의 뒤에서 따라 걷는 벤자민을 흘끗 돌아보았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돌아볼 때마다 방긋 웃었다.

그러면 그레이스는 또 떨떠름한 마음을 안은 채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애초에 이 결혼은 황실에 의해 억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벤자민의 처지를 동정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황실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추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와 결혼했으니까.’

그리고 뜨문뜨문 남아 있는 그레이스의 기억에 따르면 둘은 부부의 의무는커녕 결혼식 때도 입을 맞추지 않았다.

이 결혼은 정말 이해관계가 얽힌 결과였을 뿐으로, 진짜 부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뿐이라면 그냥 공작가의 배경 아래 호의호식하며 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작품 중후반에 원인불명의 병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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