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 세계와 자신, 그 둘 사이에서
“그래서 오빠, 무슨 이야기인데?”
태희가 팔짱을 낀 채 태석을 보고 있었다. 눈도 웃고 있고 입도 웃고 있다. 하지만 어쩐지 살짝 탐탁지 않다는 듯했다. 그 이유는 태석이 잘 안다. 태석은 그동안 태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다. 도움을 청하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이 망해가는 지금 이 상황에서야 도움을 청하다니, 괘씸한 것인지도 모른다.
“뭐, 그러니까…….”
“중요한 일에서야 도움을 청하는구나. 정말로 기뻐. 오빠에게 큰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게.”
“응, 그래.”
태석이 스카이를 보았다. 키가 작아 내려다보아야 했고, 스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석을 올려다봤다.
“왜 그래, 새끼야?”
“좀 가 있어. 다른 데로.”
“내가 어딜 가.”
스카이가 하품을 쩌억 했다.
“기껏해야 현재 나랑 계획을 짜둔 그런 일일 텐데, 나도 대화에 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싫어, 안 가. 들을 거야.”
태석이 태희를 보았다. 태희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다. 태희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왜 그러세요?”
“누나, 누나, 이 애는 누구예요?”
“새로 온 친구인가요?”
태희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래, 친구야. 어서 데리고 같이 놀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 친절하게 놀아줘야 해. 최대한 재밌게 놀아.”
“네!”
“알았어요!”
스카이가 상황이 심상치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잠깐, 잠깐?!”
스카이를 끌고 아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스카이가 기운이 약해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야, 야! 이 새끼들아! 내가 왜 이런 애새끼들이랑 놀아야 하는 건데?! 악마는 천성적으로 순수한 아이를 싫어한다고! 으아!”
“후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구나?”
“우리가 잘 놀아줄게.”
“어서 소꿉놀이부터 하자. 네 역할은 공주!”
“공주?! 지, 지랄하지 마!”
“하얀 드레스를 보니까 공주 말고는 안 떠오르는걸.”
“이 개새끼들이이이이이……?!”
태석은 스카이를 잠깐 보다가 식은땀을 흘렸다. 아이들, 의외로 무섭구나. 소꿉놀이로 끌려가 공주답게 치장 당하는 모습을 보며 태석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과연, 순수함은 어떨 때는 잔인하게도 보이는 법이다.
태희가 말했다.
“그래서, 찬찬히 이야기해볼까?”
“좋아.”
태석은 여태까지 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스카이가 말한 지하 세계라는 곳과 지하 세계에 가서 역사 개변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까지 말했다.
“흠, 재밌네. 역사 개변이라……. 한 줄 추가로 적으면, 역사가 바뀌는 거지?”
“그래, 유일신을 죽이는 것도, 세상을 창조하는 것도, 멸하게 하는 것도 가능해. 말 그대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모든 것이 가능한 치트키 같은 것을 이루는 말이다. 예전 신화에서나 있을 법한 것들인데, 흔히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신 하나가 등판하면, 모든 등장인물이 불가능한 일을 아주 간단히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에서는 최근 들어 그런 것이 줄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시하고 재미없을 정도로 사건이 빨리 끝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이야기에서조차 거부하는 것, 역사 개변을 이룰 수 있다니 태석은 그렇기에 확신했다.
유일신을 이기려면, 이 세상의 반칙 같은 존재를 이기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이미 확정이겠네. 유일신을 이기려면 역사 개변밖에 답이 없어.”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무슨 생각?”
태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태석을 유심히 보는 듯했다. 태희가 눈치챈 모양이다. 고개를 저으려다가 한숨을 뱉었다.
“설마하니…… 다른 역사를 개변할 생각이야?”
“아직 고민 중이야.”
“예를 들자면 어떤……?”
“엄태석과 엄태희의 부모님은 죽지 않고, 가족은 그 어떤 불행도 겪지 않는다.”
“……확실히 매력적이기는 하네.”
“하지만 역사 개변은 단 한 번이 가능해. 이런 식으로 역사 개변이 가능한 유일한 찬스를 낭비하면…….”
“미래가 바뀌고, 어떤 미래가 우리를 마주할지 모른다는 거네.”
“그렇지. 어쩌면 지구는 무사하고, 다른 어떤 행성에 유일신이 등판해서 그 행성을 멸하게 할지도 몰라. 세계 자체가 삭제될 수도 있어.”
“확실히, 그렇네.”
“그건 최악의 경우이고, 바뀐 미래에는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복이야. 가족이 살아 있고 그 어떤 불행도 겪지 않을 수 있으니까. 우리 가족은 평생을 행복해야 한다는 개변이 들어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죽은 뒤에야 유일신이 등판해서 세계를 멸하게 할지도 모르고.”
“그거네, 요약하면.”
태희가 쓴 미소를 지었다.
“우리만이 행복한 세상이느냐, 아니면 우리는 그대로이고 타인들이 행복해하느냐, 그런 것이겠네.”
“그렇지.”
“예전 같다면 오빠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겠지.”
“그래.”
“왜냐면, 지금의 오빠는 자신의 행복 또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묻고 싶어.”
태석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런 걸 나한테 물어도…… 나는 답해줄 수 있는 게 없어.” 태희가 상냥하게 웃으며 태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오빠의 선택을 존중할게. 오빠는 오빠다운 선택을 내려. 그 어떤 결정일 지라도 오빠가 선택한 거니까 믿고 맡길게.”
“……그래.”
태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괜한 걸 물었는지도 모르겠네. 고민하게 해서 미안해.”
“뭐, 오빠가 나에게 거의 처음으로 고민 상담을 한 거니까…… 나는 기뻐.”
“그러냐.”
“그렇지.”
태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나는 세상의 안에서 계속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테니, 오빠는 세상의 뒤편에서 구원을 해줘.”
“그 대사, 어디서 들어본 느낌인데.”
“원더우먼. 꽤 재밌어.”
“……요즘 영화를 잘 안 봐서.”
솔직히 태석은 그런 영화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손을 흔들며 아이들에게 시달리던 스카이를 끌고 가며 태석이 말했다.
“좋아, 그러면 세상을 구하러 가볼게.”
“그래, 가다가 붙잡히지 말고. 오빠는 이제 누군가에게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는 확신한 표정으로 태희가 눈을 부릅떴다.
“오빠는 여기에 없던 거야. 온 적도 없어. 나는 오빠를 본 적이 없어.”
“그래, 그러면.”
태석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무언가 시공이 뒤틀리는 듯 보였다. 태석이 겐세로 순간 변신하여 중력자를 이용해 빠르게 이동한 것이다. 마력 소모가 커서 아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먼 거리를 갈 때는 이런 중력자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태희가 사라진 태석이 있던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잘 되겠지.”
언제나처럼, 정말로.
태석은 부산에 도착했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향한 결과, 사람들이 가장 밀집된 곳이 부산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법 후덥지근한 공기였다. 카알이 죽고 전쟁이 끝난 직후, 테라포밍이 어정쩡하게 사라지고 있었기에 날씨가 이상 기후를 보이는 것이다. 태석이 후드티가 더워서 살짝 퍼덕이고 있었고, 스카이가 땀을 질질 흘리며 고통스러워 했다.
“더워어어어.”
“좀 참아. 몸이 애가 되니까 생각까지 어려진 거야?”
“몸이 애라서 약해서 그렇다.”
“뭐, 그러냐.”
“어디 쉴 곳이 필요한데. 다시 중력자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는 없어?”
“안 돼. 마력은 항상 남겨둬야 하거든. 마력이 더 회복되면 쓸 생각이야.”
“어째서 아끼는 건데.”
“언제 있을지 모를 전투를 위해서.”
태석이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 더위에 검은 후드티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카이가 말했다.
“너를 이상하게 보는데.”
“그럴 만하지. 이런 날씨에 이런 옷을 입고 얼굴도 가리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너를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걸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야.”
“그렇지. 게다가 수배령이 아직 퍼지지 않아서 상황을 모르는 사람도 많고.”
태석이 잠깐 길에서 멈춰 섰다.
“저기에 칸타로스가 있는데, 갈래?”
“좋아, 제대로 된 칸타로스의 요리는 어떨지 궁금하거든.”
“꽤나 맛있었나 봐?”
“딱히 맛있는 건 아니고, 그래, 먹을 만해. 먹을 만해서 좋아.”
“맛있다는 거네.”
“그건 아니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태석이 칸타로스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제법 넓다. 칸타로스 중에서도 제법 크게 지은 체인점인 모양이다. 칸타로스 특유의 재즈풍 음악이 흘러나왔다.
“패스트푸드를 파는 주제에 음악 센스가 좋은걸.”
“그러냐? 나는 잘 모르겠는데.”
“너는 항상 들어서 그래.”
스카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했다.
“어디, 그래서 어디서 먹는 거야?”
“칸타로스는 안 가봤나?”
“악마들이 그딴 싸구려 음식 먹지 말라 해서 먹어본 적 없지. 솔직히 색욕이 더 강해서 식탐은 없었거든.”
“다른 욕구들이 색욕을 대체하나 보네.”
“그런 셈이야. 아무래도 나는 더 이상 욕구를 채울 수 없으니까.”
“그렇군.”
거세를 당한 고양이들이 수면 시간과 식탐이 많아지고는 한다. 그런 것과 비슷하게, 악마로서의 욕구를 거세당한 스카이는 다른 욕구들로 그 공허를 채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태석이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가 음식을 주문했다. 다행히 태석이라고 알아보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인상이 엄청 바뀐 건가? 실제로 인상이 바뀌었다. 태석은 태석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사나운 인상이 되었다. 어쩌면 도망자라는 신분과 현 상황에 대한 고뇌와 그간의 고생 때문에 인상이 많이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태석이 음식을 받고 위층으로 올라가 창가를 보면서 음식을 세팅했다.
그리고 티비를 보았다.
티비에서는 김범수 기자라는, 어딘가 불쾌한 인상의 남자가 뉴스를 진행하는 것을 보았다. 솔직히, 얼굴이 오크에게 세 번은 얻어맞은 인상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인간이 아닌 오크의 자손일지도 모른다고…… 지극히 외모지상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스카이였다. 어쨌든 그 기자의 얼굴은 다행히도 일찍 사라지고, 세킨 시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세킨 시레나가 태석의 수배령을 공지했다. 뉴스를 듣던 칸타로스 손님들이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수군거렸다.
태석이 그 수군거림을 잠시 듣다가 미소를 지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콜라를 빨대로 마시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스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서 가자, 스카이.”
“그래, 좋아.”
스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숨을 뱉었다.
“색욕의 스카이가 이런 초딩 같은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니. 슬프네.”
“이제 그것도 옛일이지, 꼬맹아.”
“윽…… 젠장.”
스카이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태석이 서둘러 칸타로스에서 빠져나왔다. 먹을 것도 전부 먹었으니 더 시선을 끌기 싫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공중전화를 찾고 있었다.
“일단 스카이, 확실한 거야?”
“뭐가?”
콜라를 양손에 들고 낑낑거리며 오던 스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하 세계로 가는 법, 그게 맞냐고.”
확인 차원에서 묻는 것이다. 태석은 스카이를 아직 신뢰하지 못하니까. 행동을 취하기 전에, 공중전화에 전화를 걸어 에덴과 접촉하기 전에 마지막 확인 작업이다.
“응, 맞아.”
“좋아.”
태석이 스카이를 노려보고는 눈 하나 깜짝 않는 스카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공중전화 쪽을 본다.
지하 세계로 가야 한다.
그곳에는 태석이 원하는 역사 개변을 할 수 있는 책이 있다.
그 책으로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
‘좋아, 세킨 시레나라고 했던가.’
그 녀석의 정체는 유일신. 이 세상을 멸하려는 존재.
‘반드시 막겠어, 너의 악행을. 모두의 행복을 위해.’
그 행복은 어디를 향하는가. 태석의 가족을 향하는 것인가, 아니면 태석이 아닌 전 세계의 존재들을 위한 행복인가. 솔직히, 태석도 누가 행복해질지 모른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자신과 이타적인 자신 사이에서.
태석이 공중전화의 수화기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반드시, 모두를 위해.”
그리고 수화기를 잡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