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 머리가 잘려도 움직이는
“뒤로, 뒤로, 뒤로, 뒤로!”
시연이 기겁하며 현지의 외침에 뒤로 백스텝을 했다. 서너 번 백스텝 후에 몸을 빙글 돌려 오크 부대장 곤소의 창을 피했다. 살짝 머리카락이 스쳐서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시연이 빙글 몸을 더욱 돌려 뒤쪽을 노리고, 백마법을 시전했다.
팡!
하얀빛이 순간 부딪쳐서 곤소의 등에 타격을 주었다.
쿵!
연이어 현지가 마력의 실로 창의 움직임을 묶었다.
“과연, 이것이 마력의 실.”
곤소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너무 편협하고 생각이 짧군요. 더욱더 잘 이용할 수 있을 터인데!”
“뭐라고?”
“아닙니다. 당신이 이해할 리 없겠지요.”
“기분 나쁘게! 시연 씨!”
“네!”
시연이 서둘러 현지의 마력의 실에 백마법을 쏘았다. 파지직! 순간 하얀 전류 같은 것이 마력의 실의 라인을 타고 화르륵 번졌다. 곧이어 창에 데미지가 가고, 쩌적 소리를 내며 약간 갈라졌다.
“흠!”
곤소는 놀라지 않고 창을 뒤로 슬쩍 빼서 마력의 실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곧이어 창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태석이 가지고 있는 속성 단검과 같다. 자가회복 기능이 있는 것이다.
창이 완벽히 날카로운 새것과 같이 되자, 시연이 혀를 찼다.
“쓸데없이 좋은 무기를 쓰기는.”
“무기는 전사의 수발과 같소이다! 무기를 폄하하는 인간들은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말투도 짜증 나!”
어디서 배운 말이야! 시연이 성질이 나서 더욱더 접근했다. 팡! 팡! 백마법을 순간순간 터트리며 주먹으로 곤소의 몸을 강타했다. 그때 창을 짧게 잡고 곤소가 시연을 근거리에서 공격한다. 시연이 순간 놀라서 옆으로 비껴서 피했다. 뒤로 백스텝. 그다음 다시 공격하려 하지만…….
쉭쉭!
곤소가 견제 차원에서 찔러넣은 리치가 긴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검을 쓸까요?”
“오히려 마이너스예요. 리치 차이가 모호해서 더 다루기 힘들 거예요.”
창과 검의 싸움에 익숙지 않기에 더 위험하다. 시연은 검을 다루는 게 아직 능숙하지 않으니까.
현지가 마력의 실로 그물 같은 것을 만들었다. 곤소에게 그물을 날렸다. 포획하려는 작정이다. 하지만 곤소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그 마력의 그물을 피했다. 동시에 현지에게 돌진, 창으로 찔러넣으려 했다.
파아아아앙!
막대한 백마법이 터져나가 곤소의 창의 방향을 꺾었다. 아니, 손목의 방향이라던가 그런 것이 꺾인 게 아니다. 창 자체가 꺾였다. 곤소가 칫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창을 수복하면서 곤소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 아는가?”
“뭐를 말이지?”
“우리 측 대장은 태석에 의해 격파되었다는걸.”
“그거 함부로 알려줘도 되는 거야?”
“그렇다.”
“음…….”
오크 조직은 바보 집단인가? 대장 죽어도 숨기고 계속 싸우는 게 맞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곤소가 히죽 웃었다.
“역시 바보들이군.”
“바보, 바보 거리지 마. 진성 근육 뇌같이 생긴 게.”
“너는 머리가 잘려나간다고 해서 싸움을 중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
“……?”
“머리가 잘려도 오크는 싸움을 끝내지 않는다. 그게 우리 카알의 부하들의 정신이다. 그러니…….”
곤소가 히죽 웃으며 창을 짧게 잡고 날 쪽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설마? 설마? 설마?!
시연과 현지가 입을 가렸다.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곤소가 자신의 목을 잘라냈다. 머리가 없어졌다. 곤소가 수화로 대충 말을 했다. 이제 머리가 죽었기에 몸만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너, 나, 싸운다. 그리고 너, 죽는다.’
대충 그런 의미 같다. 시연이 소리쳤다.
“이 미친놈!”
곤소가 소리를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달려들었다. 시연과 현지가 각자의 싸움법에 따라 마법과 마력의 실을 준비했다.
두 집단이 격돌했다.
“후, 후, 후. 당신의 전투력은…….”
“그거 헌터 도구 아닌 거 다 안다.”
대한이 코를 후비며 오크 부대장이자 연구원, 한셀에게 말했다. 한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 후, 후후후후.’ 하는 이상한 웃음을 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굴에 쓰고 있는 초록 렌즈 선글라스를 벗어 땅에 내던지고 말했다.
“안 속는군요. 역시 인간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분답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세간에서는 대한의 헛소리 유머집이라는 책이 나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대한, 당신을 만나 영광입니다. 후, 후, 후후후후후…….”
“아니,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냐고.”
대한이 화가 나서 아까부터 헛소리만 해대는 오크 부대장 한셀에게 물었지만, 한셀은 여전히 ‘후, 후, 후후후후…….’ 하는 이상한 웃음만 내고 있었다.
대한이 거의 울먹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맙소사!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절망스러워…….”
“뭘 그렇게 절망하는 거예요? 싸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세희가 날카롭게 물었다. 대한이 소리쳤다.
“그야 헛소리만큼은 내가 세계관 최강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미친놈이 앞에 있잖아요. 마치 내가 반에서 제일 카드 게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현질 떡칠해서 더 잘하는 태석이 있는 거랑 같잖아요.”
“그랬었나요?”
“태석이 녀석, 카드 게임 겁나 미쳐서 했다니까요?”
“음…….”
일단 기억해두도록 할까. 나중에 카드를 사주던가 해야겠다. 세희가 그것을 머리 한켠에 밀어 넣고, 대한에게 말했다.
“일단 별로 위협은 안 되니까 저 녀석을 무찌르도록 하죠.”
세희가 빛의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정신 차리고 싸워야죠.”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대한이 흑마법을 날렸다. 하지만 한셀은 ‘후, 후, 후후후후…….’거리면서 자신의 휴대폰 같은 기계장치를 꺼내 들고 버튼을 눌렀다.
팟!
뭔가가 한셀의 앞에 나타났다. 검은 보호막 형태의 홀로그램 같은 것인데, 그것에 흑마법이 맞자 검은 보호막이 새하얗게 변질했다. 그리고는 다시 꾹, 꾹 버튼을 누르자, 하얀 보호막이 검날의 형태로 찰흙처럼 변해 대한을 노리고 돌진했다.
“우왓?! 저게 뭐야?!”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한이 당황해서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피했다. 당황한 것치고는 제법 날렵하고 정확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 정말 간단히 피한다는 느낌이다. 태석과의 그간 수련이 그의 몸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피해내고는 대한이 훅 숨을 내뱉으며 흑마법을 빠르게 날렸다. 위력은 약했지만, 한셀의 몸을 관통했다. 어깨 부분을.
“훗…… 아프다…….”
“반응이 시원하지가 않은데.”
“그야 어깨가 뚫리니 시원하지는 않지요. 딱히 더운 날씨가 아니니…… 후후후…….”
“아니,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제발 날 괴롭히지 마.”
맞은 건 한셀인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대한이다.
정말 이상한 상황이다.
한셀이 히죽 웃으며 다시 자신이 들고 있는 기계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셀의 어깨가 순식간에 나노 입자 같은 것이 기계에서 튀어나와 회복된다. 어깨의 상처가 메꾸어지고, 상처가 완벽히 사라진 것이다.
대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엄청난 기술이네.”
“그렇습니다. 헛소리에 있어서 대한 씨가 더 대단할지는 모르겠지만, 과학 기술은 저희 오크 측이 더 대단하지요. 이것은 드워프에게 버금가는 기술일 것입니다. 후후후후…….”
“아, 그러냐.”
대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가만히 있다가 소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도 네가 더 한 수 위거든?”
“후후후…….”
“이 상황에 그렇게 웃는 것만 봐도 또라이라는 게 느껴져!”
세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강적을 만난 모양이네요. 여러 가지 의미로…….”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 가지 의미.”
“…….”
대한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아무튼! 끝인 줄 알아, 이 새끼야!”
“끝은, 당신이 끝일 겁니다.”
한셀이 눈을 번뜩이며 그렇게 말했다가…….
“후후후…….”
하고 웃어서 산통을 깼다.
대체 뭐하는 정신 나간 놈일까……. 대한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강지가 병원에 도착했다. 자신이 업고 있는 아이를 응급실에 데려가자, 난리법석인 응급실에서 한참이나 기다려야 간호사 한 명이 달려온 것이 보였다. 남자 간호사이다. 온몸이 피로 떡칠 되어 있다. 그만큼 응급실이 전쟁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니, 이미 밖이 전쟁통이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간호사가 소리쳤다.
“이 환자는 또 무슨 일입니까?”
“당했어요. 오크에게.”
“어서 병실 침대…… 가 남은 게 없잖아, 젠장. 어서 바닥에 눕혀요. 아, 젠장. 뭔가 푹신한 것 없나…….”
간호사 머리를 긁적이다가 간호조무사에게 소리쳤다.
“어서! 내가 가지고 온 옷 내놔!”
“네? 하지만 그거 선생님께서 아끼고 계시던 것…….”
“아끼던 한정판 옷이니 뭐니가 중요해? 어서! 딱 보니까 골절이니 뭐니 뼈에도 이상이 있어 보여서 딱딱한 바닥은 안 된단 말이야!”
“아, 네!”
간호조무사가 뛰어갔다. 간호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피로 범벅인 안경을 자신의 옷으로 대충 닦아 문댔다. 핑크빛 렌즈처럼 화악 번져 있다. 간호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안경을 쓰며 투덜거렸다.
“무슨 코팅이라도 된 것 같네.”
완전히 피에 물들어져서 어쩔 도리가 없어 보인다.
“렌즈라도 낄 걸 그랬나.”
하지만 렌즈는 껴본 적이 없었기에 딱히 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지가 자신의 비싸 보이는 옷에 피 묻은 아이를 눕히고 있는 간호사를 보며 물었다.
“뭔가 도울 것은 없습니까?”
“도울 거?”
간호사가 서둘러 아이의 상태를 보았다. 사실 의사가 해야 할 일이지만, 의사들이 모두 바쁜 상황이고, 간호사들이라도 나서서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 심지어 수술까지 간호사가 맡고 있었다. 그만큼 사태는 심각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간호조무사까지 수술에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간호조무사가 맡아서 죽는 것이나, 아니면 의사 없어서 내버려둬서 죽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만…… 혹시 모르잖는가? 간호조무사가 운 좋게 살려줄지. 그런 희망이라도 품고 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도울 거 많지요.”
“뭐죠?”
“우선 전력이 모두 끊긴 상황이고, 보조 전력 가동 중인데 그마저도 배터리가 세 시간 후에 끊겨요.”
“그게 끊기면?”
“환자 천 명 중 오백은 뒤지는 거죠. 겨우 살려놨는데, 시발…….”
“그러면, 그 전력이 유지되면?”
“앞으로 수 명은 더 살릴 수 있습니다. 전기 많이 잡아먹어서 가동 못 하고 있는 기기들도 쓸 수 있으니 지금보다 로테이션이 더 빨라지겠죠. 그나마 2G에서 3G로 넘어간 수준이겠지만.”
“투지? 쓰리지? 그게 무슨…….”
“아무튼, 그거 해줄 거 아니면 어서 가요. 환자 아니면 혼잡하니까. 잠깐, 거기! 너! 어서 저 환자 맡아. 네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지혈이라도 해달라고! 저기 팔 잘린 거 안 보여?!”
“하겠습니다.”
“아, 네? 뭐라고?”
“보조 전력 충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네?”
“이 팔이라면.”
강지가 자신의 기계팔을 보여주었다. 간호사가 눈을 꿈벅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안경이 이상해서 잘못 본 게 아니었잖아.”
그리고는 한숨을 뱉었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를 따라오시죠.”
그리고는 아이의 몸에 붕대를 마저 묶고 나서, 간호사가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어서!”
재촉했다.
태석이 심호흡을 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주변에는 오크들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인상을 찌푸렸다. 역하군. 모두 지석과 태석이 잡은 녀석들이라지만, 아무리 보아도 오크들의 시체는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머리를 잘려도 싸울 수 있다니, 팔다리를 모두 잘라내서야 녀석들이 퍼덕이면서 계속 배치기로 움직이려 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태석이 말했다.
“죽지를 않네요.”
“카알이 죽은 이후 더 그런 모양이야.”
“아무튼, 형. 이 우주선에서 빠져나오죠.”
태석이 그렇게 말하고는 우주선을 착륙할 수 있는 버튼을 찾기 위해 조종칸으로 향했다. 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조종칸에 도착, 버튼을 찾고 있다.
“그보다 형.”
“왜 그러지?”
“많은 일이 있었나 봐요. 어쩌다 그런 반지를 얻게 되었죠?”
“네가 없는 곳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일들이 있어. 내가 겪은 일은 나중에 찬찬히 설명해주도록 하마.”
“뭐,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고, 일단 이 버튼이 맞나? 잘 모르겠네.”
“어디, 보여줘 봐. ……이 버튼은 로켓 발사를 하는 것 같다.”
“음, 큰일 날 뻔했네.”
태석이 손을 뗐다. 잘못 만지다가는 태석의 손에 지구가 멸망할 뻔했다. 한숨을 뱉으며 다시 다른 버튼을 찾기 시작했다. 지석이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조종칸 문 쪽을 보았다.
태석 또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크 한 마리가 멀쩡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았다. 오크치고는 몸집이 작고 가냘펐다. 그런 오크가 말했다.
“안녕?”
태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는 누구지?”
“기억나나?”
그리고는 오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 때문에 이미 죽어 있는 스카이라고. 원격 조종으로 대화 중인.”
“……?”
스카이?
스카이 할 블랜드?
색욕의 악마?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하긴 오크치고는 몸매가 지나치게 미인상이다. 태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아아, 원격 조종이라고……. 이미 죽어서 원격 조종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거구나……. 이제 이해했…… 을 리가 없다.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설명이 필요해, 스카이 할 블랜드.”
“그래, 그래. 알았어.”
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태석에게 물었다.
“오크 지인도 있는 거냐?”
“조금…… 다르죠.”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달라요. 이건 조금 이상하게.”
“그렇군. 너도 이상한 일을 많이 겪었군.”
지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해한다. 이해해.”
“뭐를 대체…….”
태석이 한숨을 뱉었다.
눈앞의 오크 모습을 한 색욕의 악마, 스카이를 보았다.
스카이가 설명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