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나?
시연과 현지가 한숨을 뱉었다. 주변에 오크들은 없다. 정확히는 없다기보다는 죽어 있었다. 현지가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그리 나쁘지 않아. 마력 소모도 적었고.’
마력의 실은 많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좋다. 게다가 응용성도 좋다. 어쩌면 인형 같은 것을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가끔 사람도 순간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것을 보면, 인형을 만들어서…….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현지로서는 불가능한 이상향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은 전투 중에 떠올리지 말자.
현지가 시연 쪽을 보았다. 시연은 언뜻 보기에 멀쩡해 보였지만, 이전에 다쳤던 팔이 아직도 말썽을 부리는 것인지 팔을 잡고 있었다. 아마 오크에게 둔기 같은 것으로 얻어맞은 탓이리라.
시연이 말했다.
“조금 아프네요.”
“방금 전, 오크한테 맞으셨어요?”
“네, 아마도. 정신없어서 몰랐지만, 이제 통증이 확 오네.”
“가만있어 봐요.”
“네?”
“제가 이런 쪽으로는 자신이 넘치니까요!”
현지가 활짝 웃으며 시연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팔 쪽을 잡고…….
콱!
뚜드드득!?
시연이 소리를 질렀다.
“끄아야야야야야아아아아아앙?!”
고양이인지 사자인지 모를 울음 소리가 났다, 시연의 입에서. 정말로 아플 것이다. 현지도 처음에 겐세에게 당한 적이 있으니까.
“끄르르르릉!?”
“아무리 아파도 인간의 소리를 내주세요.”
“아프잖아요?! 이, 이게 무슨…….”
“그거예요, 그거. 뼈 맞추기.”
“뼈 맞추기? 하지만 뼈가 어긋나지는…….”
“이래서 힐링팩만 붙일 게 아니라, 병원도 한번 가보고 해야 한다니까요, 헌터들은.”
“아…….”
시연이 이해했다.
북한에 갔다 온 이후로 어깨가 조금씩 뻐근했는데, 힐링팩으로 회복은 되었지만 뼈가 어긋난 상태라 계속 통증이 온 것이다. 불치병에 걸려서 걱정되었지만, 지금 상태를 느껴보니 완전히 통증이 사라졌다. 어깨를 움직여보니 움직이기도 편하다. 시연이 말했다.
“고마워요.”
“아무튼, 일단 주변을 살펴보죠.”
“그래요.”
시연이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상황을 살피는 것이다. 인간이 죽어 있다. 오크도 죽어 있다. 시체들이 즐비하다. 그리 유쾌한 풍경은 아니다. 현지의 표정이 어둡다. 시연이 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구하면 돼요.”
“……네, 그래야죠. 마음은 아프지만.”
시연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현지 또한 마력의 실을 주변에 터트려 마력의 실의 속성을 변경했다. 탐지 쪽으로 유용하게. 현지가 눈을 감고 마력의 실에서 반응하여 현지에게 돌아오는 마력을 느낀다. 그리고 눈을 떴다.
“없나요?”
시연의 물음에 현지가 잠시 시연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있어요.”
“얼마나?”
“한 마리.”
“한 명이라면, 문제없네요.”
“하지만 그 한 명, 마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지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청나게 강해요. 강한 뭔가가 오고 있어요.”
“강하다고요? 대체…….”
현지가 고개를 들어 올려 어느 장소를 본다. 천천히 걸어오는 오크의 모습이 보였다.
오크가 한마디 했다.
“이보쇼, 아가씨들.”
“왜 그러지?”
“오크 부대장 곤소입니다만, 어째서 죽지 않고 부하들을 죽이는 것입니까?”
“…….”
현지가 오크 부대장 곤소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야 너희가 우리의 영역을 침범했으니까.”
곤소가 히죽 웃으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우산 형태의 도구가 순식간에 크기를 불려 거대한 창의 형태가 되었다. 창을 뒤로하여 횡으로 들고는 외쳤다.
“그러면 우리 새끼들을 죽인 대가는 치러야겠수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시연이 단호한 표정을 했다.
“우리가 있는 한.”
세희가 공중에서 지상을 훑었다. 빛의 날개를 펄럭이며 주변을 살핀 것이다. 그리고 한숨을 뱉었다.
“저기 아는 사람이 있네.”
대화는 많이 안 해봤지만, 아는 사람이기는 했다. 태석의 친구 대한이니까.
둘이 사귄다는 루머도 돌고, 여러 가지로 이상한 루머도 도는 청년이지만, 기본적으로 여자관계가 문란하지 않고 성실한 헌터라고 유명하다. 팬도 많은 듯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 안 쓰는 느낌이지만.
세희가 지상으로 강하하여 땅에 착지했다. 대한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손을 뻗었다.
“누구시죠?”
“저 모르시나요? 저도 꽤나 유명한데.”
“……세희 씨? 태석이랑 붙었던.”
“맞아요.”
세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오크들 시체가 엄청난 걸 보아 여기서 주구장창 붙었나 보네요.”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태석 씨는요?”
“태석이는…… 저쪽으로 갔습니다.”
우주선 쪽을 가리켰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세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또 혼자 위험을 무릅쓰고 제일 큰일을 해결하려는 거구나. 이제 그에 대해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태석은 위험한 일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남을 돕는다면 생각하지 않는 타입이다. 무조건 돕겠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선다. 그러니 세희의 언데디에이션을 구제할 때 천사로 변하는 위험까지 겪으면서 세희를 구했다. 대단한 청년이다.
대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또 위험에 달려든 거죠.”
“정말 지겹겠네요.”
“지겹다기보다 정말이지 남을 생각하면서도 안 하는 녀석 같아서.”
“그게 무슨 의미시죠?”
“그야 태석을 걱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자기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그렇죠.”
“동감이에요.”
세희가 한숨을 뱉었다.
“전방에 한 마리.”
대한이 고개를 돌려 세희가 보는 곳을 보았다. 오크 한 마리가 보였다. 머리가 길고 산발이 되어 있다. 그리고 실험 가운 같은 것을 입고 있다. 연구원 같아 보였다.
안경을 들어 올리며 오크가 말했다.
“나는 부대장 한셀.”
그리고는 대한과 세희를 보았다.
“너희의 강함은 좋은 연구 대상일 듯하다. 어서 나에게 포획되어라.”
그리고는 손을 뻗어 마법을 사용한다. 순간 올가미 같은 것이 대한과 세희를 노리고 달려든다.
세희가 서둘러 소리쳤다.
“대한 씨!”
“으악?!”
대한이 세희에게 잡혀서 순간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착지했다. 어질어질하다. 중력이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달팽이관이 정상적으로 돌아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대한이 오크, 한셀을 보며 말했다.
“너, 정체가 뭐야.”
한셀이 히죽 웃었다.
“나?”
그러고는 안경을 들어 올려 고쳐 쓰고는 미소 짓는다.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우주 최강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너희들은 연구 대상이다. 잡혀라.”
“오크들은 다 미친놈밖에 없나.”
대한이 뭐라 한마디 했고, 세희가 맞받아쳤다.
“확실히 조금 독특한 괴물들이긴 하네요.”
하지만 그런 비아냥에도 한셀은 별로 짜증 내는 기색이 없이 손을 뻗었다. 대한과 세희가 서둘러 움직였다. 공격을 회피할 준비를 한 것이다.
강지가 한숨을 뱉었다. 시체들이 넘쳐난다. 오크의 시체도, 인간의 시체도. 아파트 근처에서 벌어진 습격이라 아이도 여자도, 나이 든 노인도, 시체의 성별과 나이 분포가 다양하다. 끔찍하다. 심지어 임신한 임산부도 배가 갈려서 죽어 있다. 안에 있던 아이도 죽었다. 꿈틀거리다가 피식, 하고 눈도 못 뜨고 죽은 것이다. 강지는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이 아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아파.”
강지가 기계팔을 보다가 손을 떤다. 그리고 손을 얼굴에 댔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났다.
기계팔을 달던 때가 기억난다. 자신이 알고 있던 소년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때와 같은 감정이 지금 느껴졌다.
이 감정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내면부터 부수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이제는 익숙하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물지조차 않은 느낌이다. 아물던 상처가 더욱 강렬하게 찢어지기에 더욱 고통이 강하다. 강지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어째서 눈물이……?
이해할 수 없다. 강지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는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니까. 그런 걸 가르쳐줄 어른은 없었고, 아이들은 몰랐다. 강지는 인간성이 결여되는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오크들에게 노예가 되면서까지.
그때, 시체들 틈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일까 소녀일까. 변성기가 오지 않은 채 목청이 꺼져라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체들을 뒤집어엎었다. 들어 올려 옆으로 치우고, 또 치웠다. 처참하다. 음식물 쓰레기를 손으로 치운다기보다는 강지의 정신적인 상처를 후벼 판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치우다 보니 어린아이가 팔에 큰 상처가 난 채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강지가 서둘러 아이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웠다.
“어서 가자.”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 듯하다. 소년은 많이 다쳤다. 죽을지도 모른다. 기계팔이 없을 때의 강지처럼,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헌터나 오크가 아니니까, 성천주도 아니니까.
강지가 품에 안은 채 데려가려 할 때.
“엄마, 엄마가.”
강지가 그곳을 본다. 엄마로 보이는 것은 머리가 부서진 채 뇌 조각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입을 악물고, 소년의 눈을 가린 채 달려갔다.
“엄마! 엄마아아아아!”
소년의 비명을 못들은 체하며, 강지는 자신이 위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기계팔을 이용해 하늘로 비상하며.
태석이 오딘의 지팡이를 든 채 있다. 지석은 천사의 반지를 통해 천사로 일시적으로 변신한 채 쓰러진 카알의 앞에 있었다. 태석이 카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병력을 모두 물러라, 카알.”
“그럴 순 없다.”
이미 크게 다친 모양이다. 오딘의 힘을 쓰는 태석에, 천사의 힘을 쓰는 지석이 싸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반쪽짜리 강신자인 카알이 이길 리가 없다. 이 정도는 예측 범위였다. 카알이 히죽 웃었다.
태석이 물었다.
“왜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지?”
“끝이 아니니까.”
“끝이 아니라고?”
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끝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너희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인간은 그간 짧은 세월 동안 강한 헌터들을 많이 양성했다. 그리고 성천주들이 끊임없이 흑수정을 정화하여 나온 것들로 헌터들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강신자인 인간 또한 나타났다. 지극히 인간에게 있어서 유리한 상황이었어.”
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제 곧 엘프와 드워프도 인간을 돕기 위해 오크들과 적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니 오크들은 이제 끝이야. 카알, 너뿐만 아니라 오크 그 자체가 멸할지도 모른다.”
“그렇군. 그래서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카알이 히죽 웃었다.
“아주 미시적이야. 미개한 족속들답게 미시적으로밖에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어.”
“뭐?”
태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생각해보아라. 태석, 네놈의 잘난 베끼기 능력으로 천 개의 눈으로 보아봐라.”
카알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네놈이 뭘 간과하고 있는지. 나를 무찌르면 정말 끝인지를.”
“……헛소리군.”
“헛소리로 생각한다 해도 너는 이미 졌어.”
“닥쳐.”
태석이 카알의 목을 잡고 비틀었다. 카알이 사망했다.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카알의, 시신의 눈을 감기고 태석이 말했다.
“이제 끝…… 이겠죠?”
“아직 남은 잔병들을 처리해야겠지.”
지석의 말에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잔병. 어서 처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