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 모두의 활약
강지가 말했다.
“가야 해요.”
태석 소유의 아파트. 그 건물 내에 태희와 강지가 있었다. 태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지를 보고 있었고, 강지가 돌연 발언한 것이다.
자신도 가야 한다고.
싸워야 한다고.
태희는 말리지 않았다. 걱정은 했지만, 적어도 강지에게 울고불고 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여러 번 보내 보았으니까.
태석을.
태석은 그때마다 살아 돌아왔다. 여러 위험을 헤치고, 여러 사람들을 구원하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가 원하는 해피 엔딩을 이루어졌다.
그런 일을, 그런 대단한 일을 고작 어린 소녀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강지를 믿기로 했다.
그러니 미소를 지으며 태희가 말했다.
“갔다 와.”
그 말과 함께.
팟!
강지가 기계팔을 이용하여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벽을 딛고 달려 오크 둘을 단숨에 도륙 냈다. 기계팔을 거대한 대검의 형태로 바꾼 채, 다른 오크 세 명에게 말했다.
“또 나에게 붙을 녀석은? 있나요?”
소녀의 말에, 자그마한 체구에 흉측한 기계팔을 달고 있는 그녀의 말에 오크들이 흠칫 떨었다. 무섭다. 오크들은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어째서 저런 어린 소녀에게? 자기 자신이 우습게도 느껴졌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저 소녀는 자신들보다 강하다. 한낱 오크 따위가 개길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잘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크들은 입을 악물었다.
어차피 싸우지 않고 진다면 카알에게 죽는다. 그것은 결국 조삼모사와 같다. 늦게 죽으나 일찍 죽으나 상관없다.
그들은 전사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전사.
그렇기에 오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모두 둔기나 거대한 무기였다. 그 무기를 들고 돌진했다.
강지가 히죽 웃었다.
“당신들도 별수 없는 오크들이군요.”
오크들이라면 치가 떨린다.
몰랐지만, 강지는 오크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이제 그 분노를 터트릴 때이다.
노예 시절 당했던 수모를 되갚아주마.
시연과 현지는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음냐, 너희들, 음냐아아, 아, 맛있다.”
“어서, 우물우물, 덤벼, 우물우물.”
너무 평화로워 보인다. 음식을 먹으면서 싸우니 그런 것이다. 햄버거는 이미 입안에 욱여넣었지만, 살 때 쓴 돈이 아깝다면서 전투 전에 다 입에 넣고 싸움을 나선 것이다. 오크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연과 현지를 보았다. 시연은 간신히 다 삼킨 후에 말했다.
“아무튼, 붙어!”
“뭐 그리, 우물우물, 빨리 먹어요?!”
현지가 깜짝 놀라 양배추를 튀기며 소리쳤다.
오크들이 말했다.
“저 여자들은 뭐지?”
“겁나 멍청해 보이는데?”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어서 싸우자!”
“우리는 전사다!”
“그래, 우리는 전사이니 싸워야 한다!”
“아무래도 싸울 생각인 듯한데요, 시연 씨?”
“그, 그래요? 으음. 뭐, 싸워야죠. 조금 졸리긴 하네요.”
“싸우다 자면 안 돼요, 시연 씨.”
“네, 네.”
현지가 속에 입고 있는 슈트를 통해 마력의 실을 터트렸다. 그리고 오크들의 무기에 하나하나 부착, 이를 당겨 땅에 떨군다.
“어?!”
당황한 순간, 시연이 백마법을 실은 주먹으로 오크의 배를 강타했다.
퍼어억-!
배를 강타당한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시연이 발로 오크의 머리를 차고, 이어서 마력의 실로 목을 졸라 쓰러트렸다. 됐다. 이 정도라면 문제없다. 오크들은 별로 강하지 않았다. 수가 많아서 문제지. 아무래도 훈련받은 평범한 오크들은 이 정도 힘인 듯하다. 아마 테라포밍을 하지 않은 행성이라 제힘을 발휘하기 힘든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좋은 일이다. 시연이 다음 오크를 상대하기 위해 힘을 냈다.
‘그보다.’
싸우며 시연은 생각했다.
태석이 생각난다.
태석이 방송을 통해 했던 말, 모두가 해피 엔딩이기를 바란다는 그 말.
인상 깊었다.
왜냐면, 시연 또한 그에게 얻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딱히 위험에 처하고 도움을 받지는 않았지만, 리치와 싸울 때도, 아이언 월드 대회 때도, 북한에 갔을 때도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싸우고 성장하고, 이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종종 생각한다.
시연은 태석을 동경하고 있다고.
태석을 사랑하는 게 아닌, 태석처럼 되고 싶다는 감정이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수록 더욱 힘을 키웠다. 연습하고 연습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가즈 나이트에 소속되었다.
……애당초 가즈 나이트가 실존하는 그룹인지도 모르겠지만, 대한이 태석의 대리로 말해줬으니 사실이겠지. 아무렴 아무리 멍청한 대한이라도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정말로 그런 것이다.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현지에게 말했다.
“빨리 이기고 싸워서 태석 씨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활약을 펼치죠.”
“그래요, 좋아요.”
뭐, 그래 봤자 시연이 생각했을 때 태석이 더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았지만.
미소를 지었다.
오크들과 싸웠다.
대한은 지팡이를 휘휘 젓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장 났나.’
지팡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주변에는 오크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점점 오크들이 대한을 처리하고자 몰리다 보니 어느새 군단을 이룬다는 느낌이다.
대한이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나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대한은 대단한 인물이 맞다. 왜냐면, 오크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사실 D랭크 헌터에게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대한은 이미 오늘만 해도 오크 열 마리 이상은 잡았고, 삼십 마리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크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대한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아.”
숨이 찬다. 지팡이도 이제 흑마법을 강화시켜줄 기능을 잃은 상태. 대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 지팡이도 망가졌고 이제 본래 힘으로 싸워야 하는데, 오크들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생각한다.
태석이라면 이때 다른 생각을 했을 거다. 무슨 생각일까? 누군가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대한이 지팡이를 양손에 쥐고 말했다.
“이 오크들아, 인간들 영역에 침범해서 깽판 치니까 좋냐?”
오크들이 흠칫 떨었다.
“나는 말이지, 태석이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싸우는 거야. 원래 성격이라면, 안전한 게 좋으니까 후방에서 꿀 빨고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는 대한이 지팡이를 부러트렸다.
“그러니까.”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양손에 흑마법을 실었다. 검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양손에 가득.
“태석을 위해서라도 나에게 죽어줘.”
그러고는 흑마법이 비라도 내리듯, 온갖 곳에 빗발쳤다.
결과는 뻔하다.
겐세와 고란은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태석이 떠나간 후, 방송 장비와 수풀뿐인 곳에서 선 채 때에 맞지 않는 여유로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우리도 싸워야 하지 않을까?”
“글쎄.”
겐세가 피식 웃었다.
“여기서 조금 더 이러고 싶군.”
“이러면 솔직히 죄책감이 들어. 오크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데 우리는 뭘 하는 거지? 가만히 서서 태석이 오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렇긴 하군. 원래라면 인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니 내버려뒀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자에게 색욕을 느끼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거든.”
“나도 내 사람 말고는 다 무시하는 성격이었어서.”
“그러면 우리 둘 다 성격이 변한 건가.”
“성천주다운 냉혈한들이 착해진 걸지도 몰라.”
“그렇군.”
“그래.”
겐세와 고란이 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이제 자신들도 싸워야 한다. 휴식은 끝났으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의 힘을 발휘할 때가 되었다.
예전의, 인간이 죽건 말건 대의를 위해 흑수정을 정화하기만 하던 그들은 이제 없다.
겐세와 고란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나설 것이다.
어쩌면 태석에게 감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원래 이렇게까지 착하지는 않았으니까. 약간만 착했던 것이다. 자신의 사람만 구하던 사람들이었다.
겐세가 중력자를 이용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고란 또한 달렸다. 도심지로 향했다. 사람들이 싸우는 도심지로.
태희는 대피소로 이동 중이었다. 지하철의 통로를 이용해, 헌터들이 생긴 이후로 생겨난 대피소로 지하철 선로를 밟아 이동 중이었다.
‘사람들이 많아.’
쿠구구궁.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몸이 울릴 정도로 진동이 느껴졌다. 태희가 넘어질 뻔했다. 앞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등을 보며 걷던 도중…….
쿠르르르르릉-!
다시 한 번 진동음이 울리고, 태희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천장이 무너졌다. 지하철의 천장이 무너지고, 벽이 바윗덩이마냥 떨어져 내린다. 태희가 서둘러 아이를 덮치려는 벽을 보고는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이를 밀치고 자신 또한 슬라이딩하여 피했다.
쾅!
벽이 땅에 떨어졌다. 아이가 소리쳤다.
“가, 감사합니다.”
어정쩡한 발음이다. 이빨이 빠져서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들렸다. 태희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할 필요 없어.”
그러고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쓰다듬었다.
“앞으로 너도 도우면 되는 거야.”
그래, 도우면 된다.
태희는 종종 생각했다.
안 좋은 일을 당한 사람을 돕는다. 그리고 도움받은 사람이 그 감정을 이어 다른 사람을 돕는다.
구원의 연쇄를 끊어지지 않게 유지한다면, 모든 이들은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생각을 도출하여 말한 것이다.
아이는 그런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째서인지 알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도울게요.”
“잘 생각했어.”
태희가 소년의 머리를 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고 걷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앗!”
태석이 비명을 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주선의 보호막을 뚫고 우주선의 외벽을 뚫으면서까지 진입했다. 그리고 몸이 살짝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내부는 한산한 느낌을 넘어서 스산한 느낌까지 줬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번쩍이는 빛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강화시켰다.
‘여기는……?’
제대로 도착한 것이 맞을까? 여기가 오크 대장 카알이 있는 우주선이 아닌 것일까? 카알은 있겠지. 그리고 카알이 있는 장소에 헤레니아 또한 있다. 헤레니아를 구출하고 카알을 살해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여정의 목적이다. 이번 전쟁의 끝을 위한 행동이다.
태석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고,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오크 둘을 보았다. 무언가 조종하는 방인 모양이다.
“여기가 어디죠?”
태석이 바보 같이도 오크 둘에게 물었고, 오크 둘 또한 어리버리하게도 대답해주었다.
“조종칸.”
“뭐 하고 계셨죠?”
“운전.”
“음…….”
“……?”
“그보다 우리 적이죠?”
“아.”
그래, 적이다. 오크 둘이 황급히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오딘의 지팡이로 둘의 머리를 한 대씩 툭툭 쳤다.
퍽, 퍽!
하지만 제법 큰 소리가 들리고, 오크 둘이 즉사했다. 태석은 그 오크를 적당히 벽 쪽으로 밀어내고 조종칸을 만졌다.
“어디 보자, 분명 우주선 내부 전체에 통신할 수 있는 버튼이 있을 텐데…….”
잘 찾아보자. 그걸 찾아서 카알을 불러내야 한다. 카알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시비를 걸어야 한다.
그리고…….
“찾았다.”
찾았다.
태석이 드물게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면 어떻게 골려줄까?’
재밌는 방법이라……. 대한이라면 잘 알 텐데.
아쉽게도 연락할 상황이 아니라 태석이 직접 그 멘트를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