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 유일신의 땅
[저는 살아 있습니다.]
태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말한 직후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전시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금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합니다. 오크들이 갑작스레 침략을 했으니.]
[저를 비롯한 모든 가즈 나이트들은 분명 이곳저곳에서 싸우면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헌터 여러분, 민간인 여러분, 혹은 군인 여러분.]
태석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화면에 나오는 것을 유심히 보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오크들에게 우리의 땅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이겨내서, 계속해서 찬란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리고는 태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 대사’를 읊는다.
[저는 모든 사람들의 해피 엔딩을 바랍니다. 그곳에는 저 또한 포함되어 있고, 저에게 있어서 행복은…….]
손가락으로 카메라 렌즈를 가리킨 듯, 화면에서 마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저에게 있어서 행복은 여러분들이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화면이 나갔다.
사람들 중 그 화면을 유심히 보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결코 완벽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오크들이 끊임없이 인간들을 도륙하는 상황. 민간인들은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들 또한 이기적인 이타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라고 간략히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대한이 손을 뻗어 지팡이를 꽉 움켜쥐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싸워야지.”
그리고 달려갔다. 눈에 뜨이는 오크 한 마리를 향해.
“모든 사람에게 해피 엔딩이 있기를 바란다라…….”
태석이 방송에서 하는 말을 다시 읊으며, 태석의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겐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괜찮은 대사였다.”
“그냥 제 생각 속에 있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읊어서, 다시 하라고 해도 잘 기억 안 나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다.”
겐세가 그렇게 말했고, 고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하죠, 태석 님?”
“아아, 그거요.”
“우주선에 잠입해야 할 듯한데.”
“중력자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태석이 그러고는 겐세를 보았다.
“가능합니까?”
“이미 시도해봤지만, 저 우주선은 특수한 방어벽에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불가능했어.”
“흐으음.”
들어가려고 태석은 시도한 적이 없지만, 확실히 우주 전쟁을 반복해오던 이들이라면 꽤나 좋은 방어막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어설프게 생각했던 그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침입해야 하는가. 그게 문제인데…….
“아.”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덴!”
“뭐?”
겐세의 물음에 태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덴을 이용하는 겁니다.”
“에덴을? 어떻게?”
“지나치게 에덴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지만…… 에덴이라면 그 우주선에 잠입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않을까 해서요. 에덴에 데려다 주세요. 제가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에덴과 대화 정도라면 지금 여기서도 가능하다.”
“아아, 그렇습니까?”
“그래, 휴대폰으로 전화 걸고 암호 코드 입력하면 된다.”
“뭔가 지나치게 편리한 리모트 시스템이네요.”
태석이 역시 에덴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편리한 시스템에 혀를 내둘렀다.
겐세가 휴대폰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 그리고 삐삐 같은 무언가를 버튼을 눌러 번호를 호출하고는 암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뚜- 뚜-.
몇 번의 신호음 후에 겐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에덴인가. 전화 연결됐다. 기다려, 태석을 바꾸겠다.”
태석이 전화를 받아 들고는 말했다.
“에덴?”
[예, 말씀해주십시오.]
“물어볼 게 있어. 우주선에 잠입하는 방법, 알아?”
[어느 우주선인지 간략한 분석 결과, 오크 대장, 카알의 우주선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인지. 지금 분석 작업에 들어갑니다.]
“빨리.”
[분석 완료.]
“어서 말해봐.”
[간단합니다. 오딘의 힘을 강신하면 됩니다. 단순히 파워가 강하면 간단히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고, 태석 님의 경우, 오딘의 힘을 강신하면 아슬아슬하게 그곳을 넘을 수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
어쩐지 토르가 오딘을 강신하라고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미리 말했으면 이런 착오는 없었을 것이다. 태석이 전화를 끊고 고란과 겐세에게 말했다.
“오딘을 강신해야 합니다. 그게 제게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강신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느냐?”
“그렇긴 하지만…….”
태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번만큼은 모두의 행복을 위해 다시 한 번 저를 희생하겠습니다.”
“정말이지…… 그 논리는 어거지지만,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겐세가 쓰게 웃었다. 고란도 키득거렸다.
“뭐, 태석 님이 또라이 짓 하는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태석 님, 한번 시원하게 저질러주세요.”
“네, 시원하게 가도록 하지요.”
손을 뻗고 오딘의 힘을 강신할 준비를 마친다.
팟!
어라?
분명 강신을 시도했을 태석이었는데, 태석은 자신의 의식이 몽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태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떠 주변을 보았다. 주변은 온통 푸르다. 초록색 풀잎들이 나풀거려 풀 내음을 낸다. 하늘은 새하얗다. 마치 모래사장처럼.
아무것도 없다. 그저 들판만이 가득하다.
이곳은 마치…… 에덴을 보는 것 같았다.
고성능 분석 특화 장치 에덴이 아닌…… 정말로 에덴의 동산. 아름다운 풀숲을 걸어갔다. 편안하다. 전쟁이고 뭐고 전부 잊고 싶을 정도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유토피아가 펼쳐진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걷던 도중 한 남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유일신.”
“유일신……?”
“그래, 곧 그렇게 될 존재다.”
“지금 여기는…….”
“나의 강신 세계. 아니, 나 자신을 스스로 보관해두는 곳이니 집이라고 해도 좋겠군.”
“당신의 집인가?”
“그래.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강신한 탓에 네가 여기로 잠시 튕겨 나간 모양이군.”
“너는 적인가, 아군인가.”
“그거부터 묻는 거야? 하긴, 싸움만 주구장창하던 놈이니 나에게 그런 걸 물어볼 만 하군.”
유일신은 키득 웃었다.
“나는 너의 적이다. 굳이 따지자면, 숙명의 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 너와 내가 싸우는 것은 운명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네가.”
“그래, 이 세상의 위기.”
유일신이 손을 쭉 뻗었다.
“이 세상을 한 번 멸하게 하고 다시 시작할 거다. 간단히 리트라이를 할 거라는 소리다.”
“그렇게는 안 돼.”
“아니,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된다. 나는 신이니까.”
“너는 신이 아니야.”
“뭐?”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존재 따위는 신이라고 할 수 없어.”
태석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주먹을 뻗었다. 유일신이 간단히 피했다.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고 신이 아니라면, 이 세상 모든 신들은 신이 아니다.”
“뭐?”
“신은 대의에 따라 움직이니까.”
“대의…….”
“그래, 대의. 인간은 감히 이해 못 할 큰 뜻. 그 뜻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신이야. 별 신경도 안 쓰이는 인간을 대접하는 게 신이 아니라.”
“그런 걸 신이라고 부른다면…….”
태석이 허우적거리며 들판에 잠기는 자신의 육체를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난동을 부리며 말했다.
“나는 신 따위가 되지 않겠어. 다른 것이 되겠…….”
말은 끝나지 못했고, 유일신의 세상에서 튕겨 나갔다. 유일신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고지식한 녀석이군.”
그리고는 끌끌대며 웃어댔다.
“하지만 재미있어.”
이제 곧 만날 테니, 유일신은 기다리기로 했다. 태석이 강해지기까지.
태석이 눈을 떴다. 자신의 얼굴 반쪽을 가면이 덮고 있었다. 금빛 가면 속에서 푸른 눈이 번뜩였다. 오딘의 눈이다. 광기의 신이라고 불린 오딘의 눈을 뜨자 순간 보이지 않던 정보들이 보였다. 겐세와 고란이 그것을 보다가 고란이 감탄했다.
“굉장하군요.”
오딘의 힘을 강신한 태석이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땅으로 내려찍었다.
팟!
하늘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하늘에서 부유한 채 저 멀리에서 오딘의 눈에 감지되는 우주선을 향해 달려갔다. 하늘을 밟으며, 마치 땅에서 질주하듯 빠르게.
그 장면을 보던 겐세가 문득 말했다.
“대단하군.”
“뭐가?”
고란의 물음에 겐세가 피식 웃었다.
“오딘의 힘을 강신하다니. 오딘이라면, 신 중의 신이 아니던가. 북유럽 쪽에서는.”
“그렇기는 한데.”
“태석은 점점 강해지고 성장하고 있다.”
“신을 많이 강신하니까?”
“아니, 단순히 그런 것뿐만이 아니야. 태석은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고 있어.”
“하긴…… 뭔가 망가진 것 같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태석은 본래 이기적인 이타심이 강한 존재였다. 그 탓에 오딘의 힘을 강신하고는 폭주하기도 했다.”
“들었어. 그때 굉장했다며.”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모두를 구하려는 그런 비틀린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다르다라…….”
“그래, 지금의 태석은 모두를 구하고, 자기 자신 또한 구할 수 있는 힘과 마음이 있어. 그러니 반드시 태석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뭔가 말을 하려던 고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별말 아니야.”
그러고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일이 쉽게 풀렸으면 좋겠군.”
세희가 빛의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하늘을 전속력으로 날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땅 쪽으로 시선을 옮겨 눈동자를 굴리며 오크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하나둘…… 모두 다섯 마리였다. 세희가 최단 경로를 계산하고, 급강하하여 오크들에게 빛의 정령으로 만든 화살로 빠르게 녀석들의 머리통을 뚫었다. 팟팟팟! 오크들의 머리 다섯 개가 빠르게 터지고, 모두 죽었다. 세희는 땅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것에 가볍게 화답하고 다시 날기 시작했다.
‘일단 이곳은 대충 정리되었고.’
우주선 쪽을 본다. 저기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한참 걸린다. 우주선이 워낙 거대해서 가까워 보이는 거지 실제 거리는 수 km는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울 쪽에 집을 갖는 건데. 어째서 경기권의 집을 선택해서…… 집세가 아까웠다지만, 고양이도 사는 데 원룸은 조금 별로였나 싶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한스 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는 심리적 도피도 한몫했다.
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으니 그렇다 치고, 태석이 멀쩡하다니 다행이고…… 세희는 다시 빛의 날개를 펼치며 날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도 달라졌다. 그리고 또다시 달라져야 한다. 태석이 구해준 이후, 세희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순응하고 복종하는 삶에서 벗어나 주도하고 능동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니 그에 맞는 행동을 보일 때다.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할 거다. 그렇게 해서 이 전쟁을 끝낸다.
세희가 더욱더 빛의 날개에 힘을 실었다. 더욱 빠르게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