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모든 신을 받다-80화 (80/102)

# 80

80. 희망과 바람

집에 도착하자 반기는 것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유녀처럼 보이는 소녀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태석은 당황해서 현관문을 연 채 굳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보다 태희가 이렇게 작았던가? 아니다. 태희는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 아아, 잊고 있었다.

태석의 집에는 이제 다른 어린 소녀도 살고 있다. 강지라는 소녀였다.

예전 북한이었던 땅에 도달하여 흑수정 TOY를 정화하고 그곳의 오크들이 노예로 삼고 있던 인간들을 구출할 당시 만났던 소녀가 바로 강지였다.

지금도 그때처럼 오른손은 검은색의 기계팔이었으며, 손등에는 흑수정이 박혀서 불길한 기운을 뿜고 있다.

하지만…… 소녀 자체는 불길하지도 저주받지도 않았다. 태석은 소녀의 순수함과 동정심 탓에 소녀를 자신의 집에서 살도록 했다. 태희가 보살피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지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있는가.

“너, 뭐하는 거야?”

태석이 겨우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고 발을 집 안에 들이밀면서 물었다.

강지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영화에서 보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한테 이러던데요.”

“무슨 영화가 그래.”

“그리고 그다음에 발로 차면서 싸워요.”

“어디의 B급 영화야?”

그때 주방 쪽에서 태희가 천천히 걸어왔다. 한 손에는 국자를 든 채 한숨을 뱉었다.

“왔어?”

“강지 교육 어떻게 시켰길래 이상한 짓을 시작한 거야.”

“나는 잘못 없거든요. 뭔가 영화를 잔뜩 보더니 가끔 따라 하더라고. 나한테는 메이드 흉내도 냈었어.”

“……음.”

영화를 보는 것에 제약을 둬야 하나. 하지만 강지가 원하는 일이라 스스로 한 걸 테니 별다른 걱정은 없다. 다만 이상한 행동으로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 때 어려움에 처하면 안 될 텐데…….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재밌게 놀게 내버려두자. 강지가 스스로 잘해낼 것이다. 믿도록 하자.

태희가 강지에게 말했다.

“이제 일어나자.”

“아뇨, 아직 역할극이 안 끝났습니다. 이 역할극은 이제 태석 오빠가 저의 손등에 키스를 해주는 걸로 끝…….”

“밥인데?”

“일어나겠습니다.”

강지가 서둘러 일어나 오른손에서 끼기긱 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서 밥을.”

“……뭔가 어린 애라는 느낌이네.”

태석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런 게 어린아이지. 그동안 강지가 너무 어른처럼 행동한 감이 있다. 이제 위험한 날도 다 지나 갔으니까 강지도 어린이처럼 행동해도 된다. 그래도 오크들에게 죽거나 잡아먹히지 않으니까…….

태석 또한 싱겁게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좋아, 밥을 먹어볼까.’

오늘같이 평화로운 날에는 역시 가족들과 오붓한 한 때를 보내는 것도 좋다.

“풉.”

태희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태석의 말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지 씨가 상장을 받자마자 울었다고?”

“응. 그렇게 웃긴 일은 아닌데, 아무도 안 우는데 울면서 말하더라고. 힘들었다고.”

“귀엽네, 귀여워. 역시 현지 씨야.”

“하지만 고생도 많이 했지. 나랑 같이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죽을 뻔도 많이 했으니까. 나도 솔직히 눈물은 나오더라.”

“어떤 점에서?”

“다들 어렵게 이루어낸 성취니까. TOY 정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

“거기에 오빠가 힘들어서 나오는 눈물은 없었어?”

“응?”

“그게, 오빠는 이제 변했잖아.”

“아아.”

그런 이야기인가.

태석은 많이 변했다. TOY 사건 이후 오딘을 강신하면서.

그가 남을 위해 싸우던 원동력은 이기적인 이타심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 강해지면서까지 라그나로크를 막으려던 오딘처럼, 태석은 자신을 제물로 바쳐 남들을 구해내려 한 것이다. 그렇기에 목숨을 걸고 리치와 싸우고, 악마 추종자와 싸우고, 악계자와 싸우고, 악마와 싸우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많은 동료들을 만들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태석의 행복은 포함되지 않았다. 태석은 자신의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 태희를 보살피면서 이기적인 이타심의 성향을 쌓아갔던 것이고, 오딘을 강신하고, 싸우고, 강지를 만나고, 아무튼 그러면서…… 더 이상 이기적으로 굴지 않고자 했다. 자기 자신의 행복도 챙기기로 한 것이다.

“뭐, 드워프가 나랑 동료를 욕하길래 혼내주기도 했지.”

“역시 대단해.”

“뭐가?”

“항상 변하잖아. 항상 성장하고, 겨우 며칠 보지 않았는데도 대단하게 변하고. 멋져.”

“뭐, 그렇게 칭찬해주니까 부끄럽네.”

“그러면 이제 말해줘도 되겠네. 오빠가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뭐가?”

태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억해?”

“뭐를?”

“내가 오빠를 피했었잖아.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사건이라면, 모스키토에게 가족이 당한 사건인가.

“사실, 그때 부모님이 나를 죽이려고 했어.”

“……?”

“부모님은 오빠도 죽이려고 했고.”

“그게 무슨…….”

“그러니까 생활고에 인해서 부모님은 우리를 죽이고 자신들도 죽으려 한 거야.”

“…….”

그건…… 몰랐다. 태희는 용케도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야 들었거든. 들어서 계획보다 더 빠르게 나부터 죽이려고 한 거고. 그래서 내가 부모님 옆에서 발견된 거야.”

“그렇…… 구나.”

태석이 쓰게 웃었다.

태석이 대신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부모님은 생활고로 우리를 죽이고 자살하려 했고, 모스키토가 달려들어 부모님을 공교롭게도 죽였고, 나는 그 모스키토를 살해하고…….”

“그 뒤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어. 지석 아저씨가 우리에게 갖가지 지원을 해주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니까.”

“정말이지…… 복잡한 심정이었겠네.”

“그렇지. 나는, 우리는 부모님이 죽고 나서야 편해질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모스키토가 우리를 구해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너는…….”

“응.”

태희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죄책감이 들었어. 내가 이렇게 편해져도 되는 걸까 하는 죄책감. 그리고 오빠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싶었거든. 오빠도 같은 감정을 느낄까 봐. 그러니까…… 나도 이기적인 이타심이 있었던 걸지도.”

“복잡했겠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럭저럭 넘겼어. 별수 없지.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나는 행복해졌는걸.”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잊도록 하자.”

이 모든 일을, 과거의 불행들을.

태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으며 밥을 한술 떴고, 그때였다.

툭.

강지의 오른손이 땅으로 뚝 하고 내려갔다. 마치 힘이 풀린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태석이 살짝 놀란 눈으로 강지를 보았다.

설마 오른손의 부작용인가? 오른손 때문에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벌어지는 건가? 걱정된다. 설마하니 이제야 찾은 그녀의 행복이 무너질지도…….

하지만 역시 기우였다.

“아.”

강지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터벅터벅 걸어가 코드에 10핀짜리 전선을 끼우고, 오른손을 팔에서 분리한 후 적당히 꽂을 곳을 찾아 꽂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충전식이거든요. 충전을 어제 까먹고 안 했어요.”

“아하…….”

태석은 왠지 강지의 만능 기계팔의 단점을 마주한 것 같았다. 충전이라니. 그러면 여태껏 충전을 하면서 살은 것인가? 오른팔이 방전되면 어떻게 싸우려고 한 거지?

“물론 예전에는 피를 양분 삼아 충전했는데, 피 아깝잖아요. 게다가 책에서 봤어요.”

“뭘 봤는데?”

“영양이 부족하면 가슴도 키도 안 큰다면서요? 그건 끔찍해요. 반드시 커져야 해요.”

그리고는 태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태희 언니보다.”

“……?”

왠지 모르게 둘의 눈빛이 불똥이 튀는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그러니까 태석 오빠.”

“……으, 응?”

강지가 입을 앙 벌리며 말했다.

“먹여줘요. 잔뜩.”

“…….”

태희가 왠지 모르게 노려보는 것 같은데, 별수 없다. 지금은 강지의 오른팔도 충전 중인 상태이니 먹여주도록 하자. 조금은 귀찮지만, 그래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찌릿.

그래, 문제는…… 없다. 정말로. 태석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신호 외에도.

태희가 서둘러 태석과 강지의 사이로 가서 말한다.

“내가 먹여줄게.”

“언니 따위의 손길은…… 필요 어어어업.”

“닥치고 먹어.”

태희가 밥을 닥치는 대로 입에 쑤셔 넣고 있다. 삽을 퍼서 항아리에 흙을 퍼넣는 것 같았다. 잠깐, 저렇게 넣어대면 숨이 막히지 않을까? 숨뿐만 아니라 제대로 삼키는 건 맞아? 삽입 양이 처리 양을 따라가지를 못하는데?

괜찮은 것, 맞겠지?

걱정된다.

하지만 왠지 여기서 참견하면 며칠간 힘들 것 같으니까 내버려두도록 하자.

왠지 모를 편안함과 웃긴 감각에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밥을 입에 넣고 씹었다.

“코도락 단일이 벌인 범죄이다.”

“그렇습니까아.”

하레니아가 한눈을 감은 채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늘어트렸다.

“그렇게 알도록 해, 인간 측.”

“알겠습니다아.”

오크 대장, 카알이 그렇게 말했고, 하레니아가 역시 말을 늘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카알은 코웃음을 치며 우주선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고, 입구가 닫혔다. 하레니아가 피식 웃었다.

“코도락이 단일로 벌인 짓이라……. 말도 안 되네.”

“그래, 헛소리지. 시발.”

옆에서 고란이 같이 맞장구쳤다.

겐세가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래도 뭐, 우리 지구 측은 힘이 없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겠어.”

그 말에 하레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힘에 비해 너무 강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 에덴, 그걸 통해 얻고 있는 이익이 상당하니까. 에덴은 이미 많은 우주인들이 노리고 있는 물건이기도 하고.”

고란이 땅을 비비며 신경질을 부리며 말했다.

“서둘러 무기를 개발해야 하는데. 에덴이 분석하는 속도와 우리가 제작하는 속도가 너무 달라. 이미 에덴은…… 시발, 10년 뒤의 물건까지 계획했는데, 우리는 뭐, 5년 전 것도 겨우겨우 만들고 있으니까.”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자.”

하레니아가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우주선을 보았다. 아마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려는 걸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하다. 뭔가 사건이 터질 듯한 그런 느낌.

하레니아는 그러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고란과 겐세도 따라 걸었다.

우주선은 천천히 멀어지고 있다.

오크 대장, 카알이 타고 있는 우주선이.

[에덴의 분석이 실행 중입니다…….]

[태석에 대한 분석 완료.]

[태석은 이 세계의 이레귤러이자 곧이어 찾아올 위기를 막아낼 위인 될 것입니다. 적중 확률 50%.]

[태석에 대한 분석은 너무 많이 했으므로 생략.]

[그러면 이제 다른 분석에 들어갑니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 중……. 세계선 여러 가지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지구만 부수어질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확률…… 100%.]

[전쟁의 종류, 우주 전쟁.]

[그곳에서 태석이 죽을 확률 99.9%.]

[태석이 죽을 경우, 세상이 망할 확률 100%.]

[절망적입니다. 사실상 세계는 이미 망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경고. 이것은 분석도 뭣도 아닙니다. 그저 에덴의 인간의 감정으로서 보았을 때의 바람입니다. 희망입니다.]

[태석이 살아남고, 세계를 지키고, 그 무엇도 부수어지지 않을 확률, 희망 사항 100%.]

[어쩌면 태석의 성격이 저 에덴에게 영향이 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그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것이라고.]

[곧이어 예측한 전쟁이 벌어질 예정인 듯합니다.]

[분석상 전쟁이 벌어질 시기는 앞으로 5분 후.]

[미리 알람을 설정하겠습니까?]

[Y/N]

[선택해주십시오, 에덴을 보고 있는 여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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