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 전뇌 세계와 색욕왕
이렇거나 저렇거나, 세희와 태석은 시연의 마음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KEWP는 하나의 휴식 이벤트와도 같았다. 커다란 공원과 대련장이 딸린 건축물 내부에서 초대받은 인물들끼리 자유롭게 노는 공간인 것이다.
태석이 말했다.
“그러니까 아이언 월드 대회 때 처음 봤었죠? 우리?”
“맞아요.”
“정말이지 세월이 빠르다는 게 느껴지네요. 벌써 아주 옛날일 같은 걸요.”
“세월이라……. 그러고 보니 태석 씨는 그 이후에도 바쁘셨나요? 활동이 뜸하셨던 것 같은데…….”
“대한이랑 피씨방에서 살았죠. 제 기억이 맞다면 삼 일 연속으로 거의 살았던 적도 있어요.”
“윽, 그거 끔찍하게 지루했겠네요.”
“왜요?”
“피씨방…… 제가 3D 울렁증이 있어서. 뭐, 저보고 피씨방에서 살라면 고전 게임만 주구장창할 테지만요. 그래도 게임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음…….”
태석과 세희가 말이 없어졌다. 역시 둘은 남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태석도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이 있었는데, 대화하기 힘들었다. 세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래도 한스에게 이래저래 통제를 받아서 인간과의 교류 자체가 적었겠지. 불행한 둘이었다. 뭐, 이제 와서 태석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고 보니 제가 요즘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요?”
“그러니까…… 하세광?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하세광?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네요. 뭐, 학교 다니면서 한둘은 만난 이름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그게 웃긴 게 사는 주소와 이름을 죄다 읊은 주제에, 그 지역에서 조사해 보니까 등록도 안 되었더라고요.”
“가짜 아닙니까?”
“주민등록증은 있었어요. 조금 모양이 다른 것도 같았지만. 일반적인 등록증이랑은.”
“그러면…… 객관적인 정보로는 찾기 힘들 테고.”
“찾아주실 건가요?”
“가능하다면. 그러면…… 성격이나 생김새는?”
“성격은…… 쓰레기 그 자체였어요. 저랑 만나자마자 섹스하자고 하더라고요.”
“……상상 이상이군요.”
“뭐, 그리고 자신을 어비스의 영웅, 그러니까 뭐였더라…… 섹스 마스터? 그런 클래스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섹스 마스터…… 이상한 클래스네요. 야한 게임인가?”
“자기 말로는 여러 스킬을 즉석에서 만들 수 있다는 직업이라던데요.”
“헌터와 비슷한 건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는 헌터를 어비스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사람이 아이언 월드 대회 결승전 때 작은 소동을 해결해줬거든요.”
“그렇군요. 그러면 좋은 사람이네요.”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석 씨와는 다르지만, 조금 사악한 태석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중2병도 심했고.”
“그게…… 제가 중2병이라는 건, 대체 어디까지 퍼진 겁니까?”
“온 우주 사람은 다 알 걸요.”
“…….”
태석은 부끄러워서 숨고 싶을 정도였다.
그보다 어비스의 영웅이라, 그리고 섹스 마스터라. 하세광이라는 인물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태석이 모르는 사건을 해결해줬다는 점에서 감사 인사도 하고 싶기도 했고.
그보다 다짜고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섹스하자니,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뭐, 태석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언젠가 연이 닿는다면 자연히 만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가 태석과 세희의 몸을 가로막는다. 커다란 가슴이 살짝 시선을 내리고 걷던 태석의 눈에 닿는다. 누구지? 아, 하레니아다. 가슴으로 구분한 게 창피하지만, 고개를 들어 보니 한쪽 눈을 감고 있는 하레니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번에는 몸이 두껍지 않은 것을 보아 이상한 티셔츠는 입지 않은 듯 보였다.
하레니아가 말했다.
“태석 씨.”
“예. 왜 그러십니까? 무슨 용무라도?”
“잠시 따라와주셔야겠어요오.”
“……뭣 때문에?”
“그야…….”
하레니아가 히죽 웃었다.
“에덴과 접촉시켜주기 위해서지요오.”
“……에덴.”
태석이 낯설지 않은 단어를 되새기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이제 에덴을 만나러 간다.
태석이 에덴을 만나러 간다. 하레니아와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하레니아가 말했다.
“에덴에 대해서 어떤 걸 알고 계십니까?”
“많은 우주인들이 노린다는 것? 그리고…… 고성능 분석 특화 장치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뭔가를 분석하여 각종 신기한 장비를 개발해낸다는 것.”
“그렇습니다.”
“기초적인 정보밖에 몰라요.”
“그야 저희 또한 그 정보 외에는 모르니까.”
“네?”
아무리 그래도 성천주가 그걸 자세히 모른다니. 하레니아가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알 수 없으니까.”
그렇군. 알 수 없다라. 하늘의 신이 만든 물건이니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하늘의 신…… 그 신이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에덴이라는 것은 본래 하늘의 신이 어떤 위험을 막기 위해 만든 물건. 그 물건에 의해 위기는 지켜졌다고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제 예상이지만…… 그 에덴을 사용하여 위기를 막은 대가로 신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신들이 말하던가요?”
“뭐, 제 안에 있는 신들은요.”
“그렇군요.”
하레니아가 복도의 정중앙에 멈춰 섰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다. 왜냐면, 편의 시설이랄 것이 없는 공터이고 풍경도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선 채 벽으로 다가가 어떤 특별한 벽을 누르고 다른 벽을 누르고, 반복해서 뭔가 벽으로 암호 같은 것을 새긴 후에 마지막으로 처음 누른 벽을 누른다.
그러자 쿠르릉! 벽에서 문이 드러나고, 그 문을 열고 하레니아가 말했다.
“들어오시지요오.”
“네, 알겠습니다.”
태석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문에는 어떤 계단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에덴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에덴.”
뭐랄까, 뭔가 모습이 초라하다.
네모난 큐브 같은 것이 푸른 빛을 내면서 둥둥 떠 있다. 저게 에덴인가? 그 에덴이 그 어떤 보호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푸른 큐브에서 빛이 홀로그램처럼 튀어나와 어떤 젊은 여성의 모습이 된다. 그 여성이 상반신만 보인다. 에덴이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건가? 에덴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웃은 모양이다. 에덴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에덴. 고성능 분석 특화 장치라고도 불립니다.]
에덴에게 뭐라 대답해야 하는가. 몇 초간 고민하다가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태석입니다.”
기계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상냥했고, 인간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딱딱했다.
뭐, 잘 대처한 거겠지?
하레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만. 54.1%의 확률로 서로 간에 어색해질 가능성이 있기에 최대한 자중하여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러세요.”
[태석 님에 대한 분석 결과, 고민이 많으십니다.]
“고민이야 많죠.”
[우리가 있는 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세상. 그런 세상은 무수히 많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저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태석은 궁금했다. 하레니아가 어째서 에덴을 보여준 것인가. 어떤 특이한 점이 있었던 것인가.
“그보다 하레니아.”
“왜 그러시죠오?”
“어째서 저를 에덴과 만나게 한 것입니까?”
“간단해요. 에덴이 당신을 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자랑할 것도 있다고.”
[맞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어서 제가 부탁했습니다.]
“감정이나 생각을 스스로 한다는 건가…… 요?”
본인에게 묻기는 쑥스럽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에덴이 홀로그램 영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분석을 하기에, 하늘의 신에 의해 감정을 부여받았습니다. 정확히는 인간의 감정을 베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맞습니다. 저는 인간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지요.]
“아무튼, 자랑할 게 뭔데요?”
[자랑할 것…… 그건 제가 열심히 노력하여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세상?”
[전자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 전뇌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기술을 통해 많은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전뇌 세계가 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 세계는 흔히 가상현실 게임과 같은, VRMMORPG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아직 상용화하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저는 이것을 통해 가상의 태석을 만들어보고 태석에게 위기가 닥치는 상황을 만들고 위기를 이겨내는지 시뮬레이션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중요한 정보다. 태석이 이길 수 있나 없나, 지금보다 노력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에덴이 미소를 지었다.
[95%.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100% 확률로 무언가를 잃게 됩니다. 소중한,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그것을 잃음으로써 성공이 가능하기 때문에.]
“…….”
좋으면서도 나쁜 소식이다. 무언가를 잃는다라. 태석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고, 여동생도 떠오르고, 다양한 것들이 떠오른다. 과연, 여태껏 소중한 것들이 많아졌구나. 그 무엇도 잃기 싫었다.
“그렇다면 에덴 씨의 분석은 틀렸습니다.”
[……?]
“5%의 확률을 뚫고,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무엇도 잃지 않고 이겨낼 테니까요.”
[그거 마음에 듭니다. 제 분석을 혹여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습니다.]
에덴이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저는 태석 씨가 제 분석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는 것에 기뻤습니다. 제가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더욱더 지식 욕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제 분석을 뛰어넘을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대하세요.”
태석이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가면서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하는 제스처를 대충 취한다.
“반드시 이길 테니까.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제집으로, 가족이 기다리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태석의 말에 하레니아가 가만 지켜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재미있는 남자야.”
하레니아가 눈을 떴다. 감은 눈에는 이미 천 개의 눈이 발동되어 있었다.
[제 전뇌 세계를 탐지한 모양이군요. 그것도 몰래.]
“당연하지요. 이상한 것을 만들었으니 그게 뭔지 알아봐야 하는 게 성천주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그래서 제 전뇌 세계는 어떻습니까?]
“흥미로워요.”
[어떤 점이?]
“그러니까…… 다른 세계에도 공유가 된다는 점이.”
[그 점을 목적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조금 특별한 세계거든요. 여러 세계와 호환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게임으로 치면 호환성이 좋은 엔진을 썼다는 소리가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도 여러 형태로 쓰일지도.]
“정말이지…… 하늘의 신이라는 자는 무슨 괴물을 만든 건지.”
[그보다 슬픕니다.]
“뭐가요, 에덴?”
[저 때문에 많은 고대의 인류가 쫓겨났다는 사실이. 지하 감옥의 세계에 쫓겨나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산다는 사실이.]
“그건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은 위기를 막는다는 목적을 수행했고, 그 결과 어쩌다 보니 지하 감옥의 세계로 고대의 인류가 이동된 거니까.”
[그래도 슬프기는 하군요.]
“그것이 인간의 불행하도록 감정이 다양한 탓이기도 하지요.”
태석은 하룻 동안의 유희를 즐기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이제 곧 있으면 어떤 위기가 다가올 것이다. 어떤 위기인지는 모른다. 그 누구도.
하지만 태석은 막아낼 것이다. 그 위기를. 반드시. 모든 것을 잃지 않고.
하레니아가 그것을 기대하면서 에덴과 작별인사를 하고 에덴이 있는 방을 나가 문을 닫고 다시 벽들의 속으로 숨긴다.
‘당분간 에덴은 이곳에 두도록 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음 일정을 떠올린다.
‘나도 가족과 함께 놀도록 할까.’
성천주들과 함께.
하레니아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성천주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겐세와 고란을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의 하루도 다 저물어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