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 자웅을 겨루다
태석은 샤워를 마친 후 옷을 갖춰 입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문자가 왔기 때문이다.
[대한 : 하레니아 님이 아침 식사를 제안했다는데? 어서 가봐, 캡틴.]
‘뭐가 캡틴이라는 거냐.’
어이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다. 가즈 나이트라니. 초등학생의 비밀 조직명도 아니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우주적으로 태석은 놀림감이 되는 것 아닐까 했다. 태석은 눈을 감고 로키를 강신했다. 녹색의 안개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그리고 적당히 성천주로 변신 후, 아카식 레코드를 살펴보았다.
가즈 나이트로 검색했고, 성천주 커뮤니티를 염탐했다.
[Acup_Galley : 가즈 나이트? 뭔가 엄청난 이름인데. 간지난다.]
[Gully_Pocky : 가즈 나이트라…… 하긴, 그 녀석들, 전에 영상 보니까, 태석이란 녀석이 대장답더라. 모두가 행복해지는 걸 원한다면서, 리치 잡고, 또 이번엔 TOY를 점령하고 있던 카락스도 처단했다던데?]
[Khooly_Goks : 카락스가 누구인데?]
[Kkijok_Ksua : 카락스도 몰라?]
[Pokusy_kelly : 카락스 말이야. 우주적으로 지명수배자였잖아. 왜, 지 가족 살리겠다고 모두 죽이는 미친 녀석.]
[Sousisi_silly : 캬. 대단한걸? 그 카락스가, 인간에게 죽었다고? 인간들, 제법 강해진 것 같은데. 부하 헌터 물색 좀 하러갈까.]
[Goran_holl : 그 녀석은 누구의 편도 되지 않아. 병신아.]
[Gensae_Nordo : 맞다. 그 녀석은 내가 가지고자 하는 부하 헌터니까, 건드리지마라. 그보다 여자친구 구한다. 대한민국 거주중인 성천주 남자다.]
[Harenia_Kwell : 그보다아-. 내가 오늘 커스터마이징한 인공 눈알 모습 어때? (사진파일) 한 번 봐봐. 평가해줘.]
'중간부터 아는 이름이긴 한데…….‘
그래, 아니겠지.
그보다 성천주들…… 의외로 인간들이랑 다를 바 없다. 인터넷에 글을 써대는 것과 뭐가 다른 걸까. 성천주들의 아카식 레코드라는 것 이렇게 마구잡이로 이용해도 되는 걸까? 우주의 근원의 지식이 담겨 있는 곳인데 이렇게 써도…….
뭐, 태석이 고민할 것은 아니다. 그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성천주로의 변신을 거두었다. 그리고 피곤한 감각에 침대에 몸을 반을 눕히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째깍- 째깍-.
시계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루하다. 뭔가 할 일이 없을까? 그보다 이렇게 노곤하게 지내는 것은 올해 초부터 중반까지 이후로 처음이다. 그때는 긴 휴식기였으니까. 그 뒤로 TOY 정화에 나서고 곧바로 며칠 후 상장 수여를 받고, 이제는 평화롭게 성천주들과 아침 식사.
그보다 이렇게 대화할 거리 준비 안 해도 되는 걸까?
태석이 아무리 그동안 성천주들을 자주 만났어도 그들과 자신은 급이 다르다. 태석이 성장했다지만 성천주들의 지난 수 년간 쌓아온 권력은 태석이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뭔가 예법을 배워야 하지 않나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석은 서둘러 달려가 문을 열었다.
누구 올 사람이 있나? 그보다 태석을 굳이 찾아온 이유가? 벌써 성천주가 부르는 건가? 아니다. 아직 아침 식사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성천주는 아닐 테고.
문을 열고, 의외의 인물이 방문하자 태석이 살짝 놀란 눈을 했다.
“세희 씨?”
세희였다.
한스 셸이라는 현재는 죽은 악마 추종자이자 성천주였던 존재의 부하 헌터였던 정령을 다루는 헌터.
S랭크였으며, 한스에게 험한 꼴을 당하던, 언데디에이션에 걸리기까지 한 불행한 아가씨.
그런 사람을 도운 적은 있지만, 어째서 태석을 찾아온 걸까?
세희가 말했다.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세희와 침대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뭔가, 불편하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아, 네. 하세요.”
“그러니까…… 예전에 그때.”
“그때라……. 아이언 월드 대회 때 이야기인가요?”
“예, 맞아요.”
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감사 인사를 할 생각인가. 그런 거라면 적당히 이야기하고 서로 웃으면서 떠나면 된다.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라 다행이군. 이미 끝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거니까.
그보다 강세희를 태석이 병원으로 데려간 뒤로 벌써 몇 달이나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야 찾아오는 이유는, 이제 마음의 정리가 끝났다는 것이겠지.
큰일을 당했었으니까.
한스에게 폭력을 당하고, 언데디에이션에 좀 먹히는 기분은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마음을 정리하기 힘들었겠지.
세희는 살짝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했다.
“저, 급하니까 자웅을 겨루어요.”
“……?”
“오늘 내에, 아니 오늘 오후라도 좋으니까 빨리 붙어요.”
“……아, 그러니까 대련하자고요?”
오해할 뻔했다.
뭐 이리 말을 오해사기 쉽게 하는 것인지. 세희라는 인물은 날카롭고 냉정해 보이지만, 의외로 입을 열면 빈틈투성이라는 걸까.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대련, 언제 가능하신가요?”
“그야 대련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이제 곧 아침 식사를 해야 해서요. 오후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전화로 연락을…… 아, 전화번호가…….”
“휴대폰 줘요. 제가 연락처 찍고 통화 걸어서 번호 받을 테니까.”
“으음, 알았어요.”
세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태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번호가 태석의 휴대폰에 찍히고 곧바로 기록했다.
“좋아, 이걸로 번호 교환은 했네요.”
“그렇네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이번 대련은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까 교우를 다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오해 마세요.”
“음…….”
오해할 게 있나? 대련에 그렇게 큰 의미가 있나?
아아, 알겠다. 세희는 헌터 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을 헌터로서 해결하려다 보니 대인관계 또한 친해지려면 대련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어떤 캐릭터인지 알겠네. 투쟁광이라고 불렸던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보다 정령술사와의 재대결이라……. 독특한 능력을 쓰는 헌터니까 경험 축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좋아, 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이길 겁니다.”
세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이겨요. 그동안 많이 연습했으니까.”
음, 눈빛을 보아하니 총명하고 맑은 것이 정령을 다루는 능력이 상승한 것 같다. 특히, 빛의 정령 쪽을 많이 발전시킨 것 같다. 헌터로서의 감이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태석이 말했다.
“그러면 저는 아침 식사하러.”
방문을 열고 세희를 나가게 한 후 자신도 복도로 나왔다. 그러면 옷차림을 점검하자.
적당한 양복에 넥타이. 괜찮다. 이 정도라면 적당히 예를 갖춘 거겠지. 애당초 회사 다닐 때의 복장과 비슷하니까 그냥저냥 평범한 느낌이기는 했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천천히 가볼까.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성천주들이 모여 있는 식당 쪽으로 향했다. 식당 앞에서는 고란 홀이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가만히 있었다. 태석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오셨군…… 요. 오셨네요. 오셨어.”
아무래도 태석이라는 걸 알자마자 존칭을 하는 모양이다. 태석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란은 마음씨는 착하지만, 성격이 모난 것인지 말투가 험악하다. 하지만 태석에게만큼은 착하게 대한다. 대한에게는 워낙 이상하게 화를 내는 편이 있기에, 대한은 고란을 싫어한다. 예전에 한창 대한과 함께 휴식기에 접어들었을 시절, 고란과 축구 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완패하면서 거의 두들겨 맞듯이 경기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무섭다.
고란 홀, 무서운 성천주라고 대한은 그녀를 평가한다.
태석이 말했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요.”
“당연히 태석 님을 초대한 자리니까. 그러면 저를 따라오시죠.”
“네, 네.”
천천히 걸어갔다. 식당까지의 길이 제법 멀다. 복도가 길다는 소리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금방 도착하는 거리인 줄 알았는데, 아마 만나기 힘든 인상을 주기 위해 건축물 설계를 이렇게 한 듯하다. 만나기 거리상 힘들면, 아무래도 대단한 인물이라는 심리적인 인식을 주니까 그런 것일까? 뭐, 그런 건 상관없다.
고란이 말했다.
“제가 못 본 사이 태석 님께서 제법 겁나게 대단한 일들을 하셨더군요.”
“네, 네. 그렇습니다. 왜 그러시죠?”
“아뇨, 역시 태석 님은 대단하구나, 생각이 들어서.”
“성천주 님도 대단하시죠.”
“저는 금수저 물고 태어난 거고, 태석 님은…… 뭔가 좀 다르고.”
“저도 어찌 보면 금수저죠. S랭크 헌터로 각성했으니까.”
“그건 분명 금수저가 아니라…….”
“아니라?”
“아닙니다. 아직 대외적으로 밝힐 것은 아니기에, 일단 도착했습니다. 태석 님, 겁나 처먹어보자고요.”
“처먹다니…….”
“?”
“아닙니다.”
역시 고란이라고 해야 할까. 말투가 험악하고 거칠다. 존칭을 가까스로 하고 있지만, 불편해 보인다. 아무래도 사석에서는 욕을 한바탕해서 욕 반 대사 반으로 생활하는 건 아닐까.
무엇이 이 중학생 정도 나이의 영국계 미소녀 같은 소녀 모습의 성천주를 분노하게 만드는 건가.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성격이 개차반인 걸 수도. 태생적으로 말이다.
어찌 됐건, 식당에 도착했고.
하레니아가 고기를 잔뜩 입에 머금으면서 우물우물 말한다.
“오셨쩌요오오오?”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말하세요, 언니.”
고란이 한숨을 뱉으며 자신의 언니에게 말했다. 하레니아는 입에 있는 것을 계속 우물거렸다. 질긴 건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걸까? 핫팩 티셔츠는 지금 입고 있지 않았지만, 묘하게 검고 붉은 드레스를 입고, 겉이 제법 심하게 파여 있다. 무슨 코스프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언밸런스하다. 몸매는 분명 좋고 외모도 좋은데, 입만 열면 깬다.
태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법은 무슨. 이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예법과는 거리가 멀다.
겐세가 대신 말했다.
“아무튼, 온 것을 환영한다, 태석.”
“그러며언! 어서 먹어요! 잔뜩! 양은 많으니까아.”
“네, 알겠습니다.”
태석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그보다 대단하다. 굉장히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잔뜩 있다. 이거, 조금 싸가서 여동생 태희에게 먹이고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
“음식이 굉장하네요.”
“그렇지요오오? 정말이지 엄청난 요리들이에요오. 엄청난 주방장이 만들었다는데? 성? 아무래도 성인이 만든 모양이에요오오.”
“몇성 급 요리사겠죠, 누님.”
겐세가 보다 못해 한소리 했다. 하레니아가 호호 웃어댔다.
“하긴, 그랬던 것도 같더라구.”
태석이 적당히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식기로 적당히 뜯어서 먹기 시작했다. 입에 넣고 먹어보니 맙소사! 엄청나게 맛있다. 정말 대단한 음식이다. 먹는 순간 음식이 파악 터져 입에 마약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황홀하게 한다.
‘요리 만화에서 나오는 모션이 진짜였구나.’
정말 우주를 경험하는 느낌. 기분 좋다. 어디서 만든 요리지? 설마 외계의 주방장이라도 되는 걸까? 한국에서는 전혀 못 먹어본 맛인데.
태석이 그렇게 고민할 때, 고란이 말했다.
“태석 님, 입에 존나 잘 맞으신 듯하네요.”
“존나 잘이라니…….”
“?”
아무래도 자각하지는 못하는 걸까. 하긴 평생을 욕쟁이로 살았으니 그럴 법하다. 태석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네, 엄청나게 맛있네요.”
그러면 신나게 먹어보도록 할까.